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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19화 (440/857)

외전 219화

샹들리에 조명에 반사된 와인이 영롱한 빛을 띠었다.

페르안은 달짝지근한 향을 풍기는 액체를 살짝 입에 걸쳤다. 혀를 타고 흐르는 감촉은 물론, 목 넘김도 막힘없이 부드럽다. 이건 틀림없이 명주銘酒다.

“괜찮다면 저도 한 잔?”

문득 들린 목소리에 표정이 돌처럼 굳을 뻔했다.

어느새 뒤에 선 채 방실방실 웃고 있는 한 명의 여자.

이리스다.

순진무구한 소녀에서 퇴폐적인 분위기의 미녀까지.

웃는 얼굴에 따라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게 이리스 피스파인더란 여자다.

의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입만 축였을 뿐인데, 취기가 머리까지 올라오는 느낌이다. 벌써 이리스에게 휩쓸렸다는 증거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마침 곁을 지나던 종업원에게 와인을 받은 다음, 이리스에게 정중히 따라 주었다.

쨍-

살짝 잔을 부딪친 후 동시에 들이켠다.

방금 전만 해도 황홀했던 와인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의외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을 유테르담에서 만날 거란 생각은 못했거든요.”

“…….”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일단 페르안을 보러 이 도시까지 온 건 아니란 뜻인데…….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인 건 맞다. 그는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유테르담으로 왔으니.

그렇다고 속단할 수도 없다.

상대는 검은 마녀다.

언어와 화법의 마술사이자 협상의 달인.

잔뼈 굵은 정치인조차 그녀 앞에선 갓난아기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니 속내를 숨긴 채 배시시 말하는 것쯤 숨 쉬는 것보다 더 간단할 것이다.

“노름은 때때로 괜찮은 기분 전환 수단이 되기도 하죠. 과하게 몰입하면 금물이지만요.”

“후후. 그래도 당신이 카드 패나 뒤집으러 여기까지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뭐. 당연히 볼일은 있습니다만, 이리스 님께 말씀드리긴 조금 껄끄럽군요.”

끝까지 우기는 것보단 다른 목적이 있으나 당신에겐 말해 줄 수 없다는 어투로 나가는 게 나았다. 물론 목소리엔 반드시 강경함을 섞어야 됐다.

‘스노우 님에 대해선 결코 들켜선 안 돼.’

이리스가 온건파인 건 알고 있지만, 동맹 관계인 건 아니다. 오히려 연합 내에선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러니 연합 수장인 스노우가 생사를 헤매고 있단 사실도 반드시 숨겨야 된다.

“이리스 님은 무슨 볼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저는 유테르담의 주인을 보러 왔어요.”

“유테르담의, 주인을요?”

자신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스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네. 요즘 골머리를 안고 있다길래 조금 도움을 주러.”

“그럼 넘버 파이트는 왜?”

“기다리기까지 심심하잖아요.”

덕분에 페르안은 딴 돈의 절반을 그녀에게 잃었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훤칠한 인상의 청년이 이리스를 보며 말했다.

“이리스 님이 맞으십니까?”

“당신은?”

“아실라 님의 비서인 메라드라고 합니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시급히 움직이지 않으면, 골드 하우스의 자금이 죄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기에.”

메라드의 말에 이리스가 낮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이만한 크기의 카지노라면, 아무리 저라도 1주일은 걸릴걸요.”

“그, 그렇군요.”

1주일이면 된단 건가.

새삼 이리스에 대한 경외가 샘솟는다.

이리스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다음, 페르안에게 말했다.

“한 잔 대접받은 답례를 해 주고 싶은데요. 페르안. 당신도 같이 가지 않겠어요?”

“네?”

“당신도 그녀에게 용무가 있는 거 아니었나요?”

“…….”

어떻게 알았지.

페르안은 가슴 한쪽이 섬뜩해진 기분이었지만, 최대한 드러내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겠죠. 메라드?”

“그건…….”

메라드는 약간 난처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다, 곧 표정을 바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다 따라오시지요.”

이리스가 빙긋 웃는 얼굴로 메라드의 뒤를 따라갔다. 페르안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리스와 조우한 이후 줄곧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상대로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없을지도.’

적어도 페르안은 이리스가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광경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실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뒤를 따른다.

* * *

“거기 형님. 더 안 할 거면 자리 양보 좀 해 주지?”

“…….”

“어이. 내 말 안 들리…….”

거한이 인상을 찌푸리자,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제지했다.

“야, 그쯤 해 둬. 그 형님 방금 판까지 해서 1000골드는 족히 꼴았을 거다.”

“그게 뭐? 노름판에서 돈 꼴은 게 뭔 대수라고.”

“됐으니까. 차려입은 거 보니까 이쪽 동네 공기는 처음 맡아 보는 것 같은데, 너도 알잖냐. 첫 발자국에 개똥 밟으면 얼마나 기분 엿 같은지.”

“…하.”

남자가 실실 웃으며 다가오더니, 루카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금화 하나를 쥐여 줬다.

“가는 길에 따끈한 스프라도 한 그릇 먹고 챙겨 먹고 들어가. 안 그래도 속 쓰릴 텐데 술집 들르지 말고. 알겠지?”

“…….”

루카스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금화.

적선 받은 금화가 반짝이고 있다. 이제는 루카스의 전 재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루카스는 이 돈을 빼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1200골드.

페르안이 준 거금을 모조리 잃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시간이었다.

‘말도 안 돼.’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

열 번에 아홉은 이길 수 있는 게임들이었다.

이길 확률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90퍼센트가 넘었다. 그런 확률에 돈을 거는 건 도박이 아니다.

그런데 졌다.

그것도 연달아 졌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확률로 따지면 수천분, 아니. 수만분의 일이다.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한 판만 더하면.’

이론적으로 따졌을 때 15연패를 할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루카스는 금화를 손에 꾹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하는 거냐.”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찬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서 있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도박은 안 해야겠다. 아니, 정말로.

나름대로 진지한 결심을 마친 순간.

후웅-

“…….”

루카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위화감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한숨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 듯한 기분.

마법의 기척. 그것도 무척이나 은밀하게 전개되었다. 만약 건물 안에 있었다면, 그조차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누구지?’

고위 마법사인 건 분명하다. 설마 디아블로의 하수인인가?

루카스의 손이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찾았으나, 허리춤엔 아무것도 없었다. 승선하기 전에 검은 한 자루 샀지만, 우선은 헥터가 있는 가게에 맡겨 두고 왔다. 카지노에 칼을 찬 채로 입장할 수는 없을 테니까.

스노우의 조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 어떤 때라도 검을 갖고 있으랬지. 잊을 만하면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절감된다.

그래도 아예 대응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

루카스는 서늘한 비수의 감촉을 느끼며, 위화감이 느껴지는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 * *

까마득한 높이의 나선 계단에선, 삼인三人이 만들어 내는 발소리만이 고즈넉이 울렸다.

이리스는 말이 없어졌다. 메라드가 끼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는 페르안에게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쉽게 결론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며, 기계적으로 계단을 오른다.

1층의 소란스러움이 거의 들리지 않을 때쯤, 꼭대기에 다다랐다.

거대한 강철 문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들락거릴 사이즈가 아니다. 거인이라도 허리를 꼿꼿이 선 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안쪽에서 아실라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스는 옅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강철 문 앞에 섰다.

그리고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문 사이를 툭 건드렸다.

끼이익-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거대한 강철 문이 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메라드가 놀란 눈으로 이리스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안도 그 뒤를 따랐다.

쿠웅

두 사람이 입장한 직후, 문은 다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나 페르안의 정신은 더 이상 강철 문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방 내부는 밝았다. 빛 때문이 아니었다.

“…….”

금괴.

엄청나게 많은 금괴가 방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감히 세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내부는 거대한 문 크기가 걸맞을 만큼 컸는데도, 금괴의 산은 그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페르안은 시야에 보이는 금괴들이 진품이란 사실을 한눈에 깨달았다.

“앉으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눈에 들어온 건, 금괴의 산 앞에 놓인 업무용 탁자였다. 그곳에 젊은 여인이 앉은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실눈에 백색에 가까운 금발.

분명 플래티넘 블론드라고 했나. 흔치 않은 머리색을 가진 여자다.

이리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아실라.”

페르안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당황했다.

이리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댓말로 일관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예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구에게든 동일한 태도를 보이며 벽을 세우는 것. 즉, 처세술의 일환이다.

그러나 지금 이리스의 어조엔 명백하게 정중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아실라라고 불린 여인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만들더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 남자는?”

이리스에게 소개를 맡겨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르안 준이라고 합니다.”

“…페르안 준.”

아실라는 낮게 중얼거린 뒤, 물어보았다.

“카스트카우 제국의 대마법사인 페르안 준?”

“그렇습니다.”

그러자 다시 시선이 이리스에게 향했다.

왜 이 남자와 동행했는지 묻는 것 같다.

“당신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아서요. 오는 김에 데리고 왔습니다.”

“흐음. 어떤 용무?”

마음을 녹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페르안은 긴장감을 더 끌어 올렸다.

…자, 어떻게 대답할까.

아실라.

유테르담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존재와 만나는 데는 성공했으나 독대의 형태가 아니었다. 바로 옆엔 결코 방심해선 안 될 여인, 이리스가 눈 똑바로 뜬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동행을 허락한 이유는 페르안의 진짜 목적을 알고 싶어서겠지.

‘…목적을 숨기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겠지만.’

그렇게 둘러갈 거였다면 애초에 이리스와 동행하지도 않았다.

페르안은 망설임 없이 본론을 꺼냈다.

“리갈의 유물이 필요합니다.”

“흐응.”

아실라는 흥미 있는 태도를 보였고, 이리스는 힐끗 페르안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내가 리갈의 유물을 갖고 있단 건 누구한테 들었니?”

“…그건.”

“아니, 물을 것도 없으려나. 헥터, 그 뺀질이겠지.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고 다니다니.”

꾸욱.

화를 삭이는 듯한 목소리엔 살기가 넘실거린다.

분명 조곤조곤한 어조인데, 등골이 오싹할 수준이다.

“…그래도 뭐. 안 그래도 고위 마법사를 한번 불러 볼 생각이었으니까. 때마침 대마법사가 제 발로 찾아온 건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

“예?”

“그럼, 너희 둘한테 동시에 보여 주도록 할까.”

탓!

아실라가 그리 말하며, 테이블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페르안이 눈을 깜박였다.

칠흑색 상자였는데, 제법 크다. 성인 남자의 상체 정도는 넉넉하게 들어갈 만큼.

“이게 뭐일 것 같니?”

빙긋빙긋, 웃음 섞인 어조로 아실라가 물었다.

“…상자군요.”

“또?”

“…….”

페르안은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상자를 관찰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푸르스름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마도 유물, 입니까?”

“정답.”

“거기에, 봉인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 한눈에 깨닫다니. 좋은 눈썰미를 갖고 있구나.”

아실라가 기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르안 준. 제국의 최연소 대마법사이자 마도학을 거슬러도 유례를 찾기 힘든 불세출의 초천재. 아이야. 너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단다.”

“…소문엔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죠.”

“나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지만, 적어도 너의 경우는 아닌 것 같은데.”

“…….”

“리갈의 유물을 바란다고 했었니? 좋아. 값어치 있는 유물이지만, 못 줄 것도 없어. 대신에.”

둥실-

검은 상자가 절로 떠오르더니, 페르안과 이리스의 눈앞까지 이동했다.

“이 상자의 봉인을 풀어 줄 수 있겠니?”

“…….”

페르안은 물끄러미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침묵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리갈의 유물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됩니다. 필요하다면 목숨도 걸 수 있을 만큼 절실한 상황이죠.”

“그래?”

“예.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페르안이 단호히 말했다.

“저로선 이 봉인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예. 좀 더 확실히 말하면, 전 이 상자를 봉인시킨 마법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래? 아쉽구나. 그럼 다른 마법사를 찾아야 되나.”

“누구를 불러도 마찬가지일걸요.”

페르안이 아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이리스가 말한 것이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상자 주변을 돌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페르안은 제국의 최연소 대마법사예요. 하지만 그가 이른 경지는 이미 대마법사를 자처하는 늙은이들보다 몇 단계는 앞서 있죠. 저조차도 당대에 그 이상 가는 마법사는 다섯 이상 떠오르지 않을 정도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니?”

“그런 페르안이 어떤 마법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아마 어떤 마법사를 불러와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죠.”

“9성의 마법사가 와도?”

“지금 당신의 호출에 응할 9성 마법사가 있기는 하나요?”

“음. 없지.”

“…게다가 제 예상대로라면.”

이리스가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9성 마법사를 불러와도 딱히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아실라. 대체 이 검은 상자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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