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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15화 (436/857)

외전 215화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스노우의 용태를 본 소드나즈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했다. 세라는 아예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채 소리 없이 끅끅댈 정도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에릭이었으나.

“마단장님, 스노우 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그 또한 떨리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가사 상태시지만, 다행히도 목숨엔 지장이 없네.”

페르안은 막 스노우를 발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소드나즈의 표정에 한 줌의 안도가 어렸다.

그 태도로 스노우만큼은 아니어도, 페르안 또한 제법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길로 스노우 님의 치료를 위한 여행에 나설 생각이야.”

“다시 깨어나실 수 있는 겁니까?”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페르안의 조용한 목소리엔 뿌리와도 같은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에릭이 그에 못지않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도…….”

“아니.”

페르안은 소드나즈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드럽게 만류한 뒤 덧붙였다.

“자네들한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중요한 일이라 하심은…….”

“스노우 님을 부탁해. 무방비한 그분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주게.”

“…저희 다섯 모두 말입니까?”

나 하나라도 좋으니 데려가 달라는 얼굴이다. 중요한 건, 다섯 명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만 데리고 가면 오히려 역효과다.

“소드나즈는 다섯 명이 모였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들었어. 스노우 님이 매번 입버릇처럼 하던 말씀인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

“…그건, 아닙니다.”

에릭이 침통함을 애써 숨긴 채 말했다.

그러나 표정엔 여전히 분노와 답답함이 느껴졌다.

“에릭. ‘리룬드’에 스노우 님을 데리고 가 주게. 그곳에 있는 세계수, 흐루히랄 근처에서 스노우 님을 안정시켜야 해. 이건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스노우의 몸을 두른 냉기는, 딱히 상온에 두더라도 희미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마 무척 무더운 장소라도 괜찮을 것이다. 기껏해야 작열하는 태양빛이나 모닥불 정도에 흔들릴 만큼 그녀의 아이스 하트는 약하지 않으니까.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내에 있는 사기가 폭주할 우려는 있었다.

세계수 흐루히랄이 가진 거룩한 힘엔 정화의 성분 또한 깃들어 있다. 만약 그러한 낌새가 보인다면 조금이라도 지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중태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면 안 돼. 설사 그게 같은 엘프라고 할지라도.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라 믿네. 이 자리에서 약속할 수 있겠나?”

“약속하겠습니다, 마단장님.”

에릭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 같은 동족마저 속이는 형태가 되겠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적어도 에릭에겐 엘프로서 가진 근본적인 청렴결백함보다 스노우의 목숨이 훨씬 더 중했다.

“부탁하지. …그리고 유리아.”

“네.”

“잠깐 얘기 좀 할까.”

“…….”

유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안이 살짝 눈짓하자, 나머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윽고 동굴엔 페르안과 유리아, 루카스만이 남게 되었다.

“조심해야 해.”

“네?”

“…명심해 둬. 이제부터 모든 마법사는 적이라고 생각해.”

유리아의 무표정에 얼핏 난감한 기색이 생겼다. 페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알고 있다.

그래도 친절히 설명할 여유는 없다.

“아말감 숲에 오기 전, 나는 카우심포니에 있는 나의 본가本家에 있었어. 나의 아버지, 셰퍼드 준에 관해선 알고 있겠지?”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국을 대표하는 대마법사이자 서클의 고위 간부시라고.”

“…….”

페르안이 흐릿하게 웃었다.

“겉치레는 괜찮아. …이제는, 그 사람을 아버지라 불러야 될지도 모르겠으니까.”

그 말에 동굴 벽에 기대 있던 루카스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는 나를 죽이려고 했어.”

“예……?”

당황한 건 유리아만이 아니었다. 루카스도 불신 어린 얼굴이 되었다.

“이미 디아블로에게 혼을 팔아넘겼더군. 마도의 극의를 보기 위해서라면 도리에 어긋난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겠지. …아버지는, 셰퍼드 준은 이미 타락해 버렸어.”

“하지만… 갑자기 왜……?”

셰퍼드 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무척이나 올곧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평소 페르안에게 들은 게 있고, 유리아 또한 대륙에 있는 고위 마법사들의 성정에 대해선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파악한 셰퍼드 준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진 않는 남자였다.

“그 사람은 7성의 마법사였어. 너도 같은 경지니까 알고 있겠지? 그 시점부터 앞에 놓인 벽이 얼마나 두껍고 높은지.”

…물론 알고 있다.

남은 평생을 바친다 해도 다음 경지로 이를 단서 하나 잡지 못할 것 같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과 자괴감이 천재라 칭송받던 마법사의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른다.

“디아블로는 그런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었어. 그들의 스승을 자처한 셈이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아크메이지에게 그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전 마도학에 대한 추구심보다 스노우 님에 대한 충성이 더 강합니다.”

유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겠지. 그래도 과신하지는 마. …현 그랜드 마스터인 이반의 오른팔, 카이로 위르세만. 9성의 경지에 발을 들인 그조차도 이미 디아블로와 한패가 되었으니까.”

“……!”

그 말엔 루카스와 유리아 모두 놀라고 말았다.

“카이로, 위르세만이 말입니까……? 그건…….”

“확실한 정보야. 난 직접 그들의 공세를 받았어. 아마 그들이 나를 사로잡을 목적이 아니었다면, 이 숲에 오지도 못하고 죽었겠지.”

“…….”

“카이로가 처음부터 디아블로와 협력 관계였는지, 아니면 비교적 최근 서클을 배신하게 됐는지.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 둘은 과거 ‘파라곤’이란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전前 동료라고 할 수 있는 관계다. 애초에 한통속일 가능성도 전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잘 들어, 유리아. 디아블로는 우리들의 생각을 아득히 넘을 만큼 힘을 비축하고 있었어. 웅크린 채로 자신의 발톱을 숨겼고, 아주 많은 것을 준비했겠지.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그 마각을 드러냈다는 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자신이 생겼기 때문일 거야.”

“…….”

“이게 전부가 아니야.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그것이야말로 페르안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10년. 데미갓을 몰아세우고 얻은 평화는 극히 짧았다.

조만간 대륙엔 다시 한번 폭풍이 불 것이다.

“언젠가 다시 재회하게 되면, 나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 줘. 나도 널 그렇게 볼 테니까.”

“…….”

유리아는 몇 번이고 할 말을 찾으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떠나는 소드나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해가 슬슬 저물고 있는 시점이었다.

루카스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그 얘기, 사실인가?”

“무슨 얘기?”

“카이로가 디아블로와 한편이 되었다는 얘기.”

페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 위르세만은 9성 마법사야.”

“그래.”

“깨달음.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갈망. 눈치챘나? 네 말대로라면, 디아블로는 9성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경지를 이룩했다는 뜻이 되는 거라고.”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페르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 또한 그 가능성에 대해 고려하고 있음을.

“…상황은 좀 더 정확히 파악해야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마법사는 디아블로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할 거야. 네 말대로, 그들은 가르침에 대한 갈증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까. 그 대가로 어떤 걸 요구해도 받아들이겠지.”

“그런 건 가르침이 아니야.”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르침이란 대가를 요구해선 안 된다. 루카스가 가진 지론은 그랬다.

“그런데 넌 왜 디아블로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은 거지?”

“응?”

“8성이잖아. 경지가 높을수록 깨달음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질 텐데.”

“…….”

그러자 페르안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글쎄. 상대적으로 덜 간절한 걸지도. 내가 8성이 된 지 얼마 되진 않았으니까.”

루카스는 그가 완전히 본심을 털어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 이상 깊게 추궁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디아블로나 마법사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선은 스노우 님의 치료와 부활이 당면한 과제지. 그러려면 네 말대로 아나스타샤를 찾아야겠고.”

“짚이는 곳이 있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너무 맹신하지는 마. 낡은 정보니까.”

페르안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상관없다. 애초에 루카스는 페르안과 아나스타샤가 접점이 있을 확률이 무척 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페르안은 짚이는 게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낡은 정보라도 괜찮아.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그때 루카스의 시선 끝에 멀찍이 서 있는 토르쿤타가 보였다.

바싹 타 버려 내려앉기 직전인 나무에, 몸을 반쯤 가린 꼴이었다.

루카스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소드나즈는 이미 떠났어. 토르쿤타, 이리 와도 돼.”

“…….”

“토르쿤…….”

순간적으로 루카스가 멈칫했다.

…토르쿤타와 닉스.

지금 저 육체엔 두 개의 인격, 두 개의 영혼이 공존하고 있다.

육체에 대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토르쿤타일 때는 황금색 눈동자다. 마치 포식자를 연상케 하는, 세로로 쭉 찢어진 눈동자.

그리고 닉스일 때는, 홍염을 머금은 듯한 눈동자가 된다.

루카스가 침묵한 이유는 하나다.

루비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이쪽을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확실하다.

지금 주도권은, 닉스가 잡고 있다.

“조심해.”

루카스가 낮게 뇌까렸다. 페르안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언제든지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직 토르쿤타와 할 얘기가 남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닉스가 깨어나고 말았다.

그럼 이제 어떡한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이쪽을 죽이려 들면, 루카스와 페르안은 맞서 싸울 방법이 없다. 즉, 도망치는 수밖에 없단 뜻인데, 닉스를 상대로 그만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토르쿤타를 다시 한번 불러 볼까.’

아니. 그것도 힘들다.

토르쿤타의 인격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닉스의 정신이 불안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루카스가 그녀의 목숨을 어느 정도 위협하는 데 성공해서다.

지금은 그 둘 중 어느 쪽 조건도 충족시키기 힘들다.

“…….”

이상하다.

상념을 시작하고 제법 시간이 경과했는데, 닉스는 아무 말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루카스의 얼굴을.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눈동자를 돌리더니, 관심 없는 듯한 태도로 팔짱까지 낀다.

“…왜 저러는 거지?”

“글쎄.”

의문을 표하는 페르안. 루카스라고 짚이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닉스에겐 적개심이 보이지 않는다.

“…….”

루카스와 페르안은 살짝 경계 태세를 풀며, 시선을 교환했다.

“우릴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어떡할까. 말이라도 걸어 보면…….”

“괜히 자극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어.”

“전처럼 불안정해 보이지는 않는데.”

“단순히 그렇게 비치는 것일지도 모르지. 통계적으로 정서적으로 크게 불안한 이들은, 그걸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어.”

“…괜히 건드렸다가 잿더미가 될지도 모른단 건가.”

“우리도 관심 없는 것처럼 굴어 볼까? 저쪽 태도도 살필 겸.”

“…….”

나쁘지 않은 작전이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런 뒤 페르안과 함께 나란히 걸어 나간다. 그러면서도 두 남자의 신경은 온통 적발의 여인에게 쏠려 있었다.

열 발자국 정도 내디뎠을 무렵.

타박─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따라오는데.”

“그렇군.”

“우리를 쫓아와 죽일 생각… 은 아닌 것 같지?”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어.”

“워프 마법을 사용해서 떨쳐내 봐?”

“리스크가 너무 커.”

루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의견을 냈다.

“우선 숲을 나가기 전까지만 상태를 지켜보자. 긴장은 풀지 않도록 하고.”

“그래.”

“…그런데, 우린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그 말에 페르안이 품에서 반쯤 망가진 나침반을 꺼냈다. 루카스는 아마 닉스와의 격전에서 저 꼴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윽고 괘를 든 페르안이 북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테르담.”

“…유테르담?”

처음 듣는 지명이다.

페르안이 픽 웃으며 덧붙였다.

“이른바 향락의 도시지.”

* * *

“…….”

닉스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 뒤를 걷다가,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

“두통? 그건 이제 괜찮아. 더 이상 안 아파. 그것보다 지금은… 알고 있다니까.”

줄곧 루카스의 뒷모습에 박혀 있던 닉스의 눈동자에, 묘한 기색이 아른거렸다.

“더 이상은, 안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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