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7화
페르안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던 닉스가 곧 추격에 나섰다.
싸울 장소를 바꾸는 것.
페르안 입장에선 최우선으로 달성해야 할 첫 번째 목적을 이룬 셈이다.
‘호기롭게 도발하긴 했지만.’
우습게 여길 상대는 아니다.
오히려 페르안 일생에서 일찍이 만나지 못한 강적이다.
“후우…….”
머리를 식히자.
페르안은 자신이 옅은 흥분 상태라는 것을 자각했다.
우선은 모두 잊는다.
루카스와 닉스가 나누었던 대화.
십여 년 만에 손에 쥔 단서.
프레이 블레이크에 관한 것까지, 모두 잊는다.
잡생각을 하면서 싸울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아마도 페르안은 이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푸화악!
직후, 후방에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시야 대부분을 집어삼킨 화염이 보였다.
이걸 정면에서 막는 건 자살과 다를 바 없겠지.
블링크? 기껏해야 단거리 이동으로 피할 수 있을 만큼 공격 범위가 좁지 않다.
페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화염 너머에 있는 닉스를 관찰했다.
떨리는 눈동자, 과호흡 증세, 상기된 얼굴.
…상대는 반쯤 이성을 잃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그 때문인지 공격 방식도 지극히 단조롭다. 애초에 단순하고 알기 쉽다는 게 불이란 원소가 가진 특색이기도 하다.
‘위축되지만 마.’
스스로에게 되뇐다.
이 압도적인 화력에 지레 겁먹지만 않으면 된다.
물론 그건 페르안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불꽃에 살짝이라도 닿았다간 전세는 단숨에 역전될 테니까. 혹은 그냥 끝장날 수도 있겠지. 다름 아닌 페르안의 전신이 잿더미가 되는 비참한 결말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적의 위압감, 목숨을 건 싸움에서 오는 중압감이 한데 겹쳐져,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만들어 냈다.
이만한 압박감을 버티며 마법을 영창하는 건 웬만한 고위 마법사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그래. 그저 버거운 정도에 불과하지.’
이 정도 난관쯤, 웃으면서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크메이지를 자처할 수 없다.
휘오오!
페르안의 손에 폭풍이 맺혔다.
상대가 불사조라고 반드시 수 속성 마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물론 바람 마법으로 이 거대한 불길을 꺼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설사 실제 태풍이 불어닥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불길의 경로를 바꾸는 것쯤은 가능하다.
콰아아아!
휘몰아친 폭풍은 일시적으로 불길의 위세를 무너뜨리고 흐름을 바꾸었다. 막 숲 전체를 덮치려던 화염은 일순간 진격을 멈추고,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거꾸로 돌아갔다.
즉 닉스를 향하여 들이닥친 것이다.
“…….”
닉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며 자신이 내뿜은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연마된 강철마저 순식간에 녹일 만한 초고온이었으나, 닉스는 따뜻한 바람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털끝만큼의 효과도 없을 줄은.
저 미동조차 없는 표정을 보니 치솟는 허무함을 달래기 힘들었다.
가령 이게 마법사 간의 전투고, 저 불꽃 또한 마법이었다면 얘기는 달랐을 텐데. 스스로 영창한 마법이라고 시전자가 피해를 입지 않는 건 아니니까.
페르안은 재차 상대가 신수, 불사조란 사실을 상기했다.
화염에서 태어난 저 생물에게 자신이 만든 불길 따위, 손톱만큼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콰가각!
휘이잉!
페르안은 어스 프래그먼트와 프로스트 스크림을 동시 전개하면서 현재 상황을 더욱 깊게 분석했다.
순수 기량은 몬스터 퀸이 그를 훨씬 웃돌고 있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페르안이 닉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냉정하다는 것 하나.
보통 냉정함을 잃은 적이 상대라면 두 수, 경우에 따라선 세 수 이상의 격차가 있어도 충분히 승리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페르안이 쏟아붓다시피 영창한 마법의 포격은 닉스가 두른 불꽃을 결코 뚫어내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닉스가 페르안보다 몇 배는 강하니까.
게다가 그녀의 불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페르안의 몸에 아직까지 상처가 없는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닉스의 공격이 지나치게 단조롭기 때문. 다른 하나는 닉스의 전투 방식이 일방적 학살에만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막대한 범위를 가진 화염 공격으로 일대를 쓸어버리는 것.’
그것이 몬스터 퀸이라 불리는 닉스의 주된 전투 방식이다.
그러나 페르안은 그녀가 내뿜는 불꽃에 어느 정도 대응하고 있다. 비록 방어에 급급한 형태라고 해도, 아직까지 페르안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즉 퀸은 나만큼 거세게 반항하는 적과 싸워 본 적이 없어.’
덕분에 아직까지 숨통이 끊기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퀸이 가진 전투 센스는 범상치 않다. 지금도 페르안이 사용하는 수많은 마법을 꿰뚫듯 분석하여, 허와 실을 완벽히 구분하고 있다.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니 실상 본능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페르안은 그 사실이 오싹했다.
그러니 결코 방심할 일은 없다.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다.’
분석은 끝났다.
페르안이 내린 판단은 간단했다.
속전속결速戰速決.
“─태초에 한 줌의 바람만이 존재했나니.”
닉스를 견제하면서 입으로 주문을 외운다. 더블 캐스팅의 형태가 되었지만, 견제하는 마법의 완성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선량한 이들에겐 미풍이요, 타락한 이들에겐 태풍이었도다. 보아라. 감당하기 힘든 난적이 나를 막아서도, 온 대지를 할퀴었던 바람의 이빨이 있다면 어찌 두려움에 떨겠는가.”
고오오─
일렁이던 마나는 곧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전조.
지상에 있던 루카스는 누구보다 빨리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페르안을 바라보다가, 돌연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페르안이 시전하려는 마법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나 지금 이곳에서 선포하도다. 삭풍의 어금니가 나에게 깃들었음을, 이윽고 나의 적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겠음을.”
파앙!
확연히 드러난 마법의 전조.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늘에 있던 구름이 확 흩어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쿠르르…….
뒤이어 진동.
반쯤 이성을 잃은 닉스마저 위기를 느낄 만큼,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
뭔지는 몰라도 위험하다.
저 남자,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
푸화악!
다시 한 번 닉스가 화염을 내뿜었다. 구름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만개한 불꽃이 다시금 가득 채웠다.
그러나 루카스는 닉스의 대응이 한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페르안을 바라보며, 그가 사용할 마법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비기닝 윈드.”
쿠오오오!
─주홍색 불꽃은 돌연 나타난 칼바람에 찢어발겨졌다. 마치 노을 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위 마법사의 전투를 처음 목격한 이들은, 자신이 신화의 한 장에 있다고 착각한다. 만약 이 광경을 누군가 봤다면,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까아아아악─!”
닉스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비기닝 윈드는 하늘을 뒤덮었던 불꽃을 흔적도 없이 찢어발겼고, 나아가 그녀의 육체를 할퀴기 시작했다.
칼날 바람이 살결을 파고드는 감촉은 무척이나 섬뜩하여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으나, 얼마 안 가 닉스의 눈엔 독기가 차올랐다.
“감, 히……!”
그녀의 등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치솟은 불꽃이 곧 날개의 형태를 이루려는 순간.
콰가각!
돌연 들이닥친 얼음의 덩굴이 그녀의 몸을 속박했다.
페르안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닉스가 다루는 화염 중 가장 높은 온도를 가진 불꽃은, 그녀의 등에서부터 분출된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견갑골 아래.
그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6성 이하의 마법은 단숨에 사멸시킬 만큼 강하지만, 그건 화염이 온전히 날개의 형상을 갖췄을 때다.
즉 화염을 갓 내뿜었거나 아직 확실히 날개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온도는 그리 높지 않을 수도 있다……. 페르안은 그리 판단했고, 곧 그 내용을 토대로 마법을 전개했다.
결과는 성공적.
고작 5성 마법인 아이스 바인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었으니까.
“크, 크으으……!”
닉스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아이스 바인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강화된 블리자드마저 녹여낸 게 그녀의 화력이었으나, 지금은 5성 마법조차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비기닝 윈드 때문이었다. 강풍 속에서 모닥불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내뿜는 불꽃이 겁화가 되기도 전에 휘몰아치는 칼날 바람이 산산이 분쇄해 버린다.
닉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이놈은, 대체…….’
정체가 뭐지?
물론 마법사란 건 알고 있다. 다만 그녀가 여태껏 죽인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7성 마법사, 아크메이지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고위 마법사들조차 닉스를 이렇게 몰아세우지는 못했다.
“…….”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본 루카스는, 순간적으로 복부의 고통조차 잊은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비기닝 윈드.
태초의 바람이라 불리는 저 마법은, 8성의 마법 중 하나다.
그걸 완벽하게 구사해 냈다. 심지어 더블 캐스팅의 형태로.
즉 하늘 위에서 닉스를 몰아붙이고 있는 저 마법사는, 전무후무한 나이에 8성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는 뜻이다.
콰가각!
페르안은 압도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여전히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아이스 바인이 점점 굵어지더니, 이윽고 닉스의 전신을 반쯤 집어삼켰다.
“아흑.”
닉스가 신음했다.
차갑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불사조에게 냉기란 치명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몸이 싸늘해지는 건 죽음이 임박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스 바인.
비록 5성 마법에 불과한 마법이지만 착실히, 그리고 확실하게 닉스에게서 온도를 뺏어 가고 있었다.
‘아… 파…….’
고통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비기닝 윈드는 여전히 닉스의 전신을 할퀴고 있다.
처음엔 할퀴어진 상처에서 피가 나오지 않았다. 불사조의 재생력으로 갈라진 살결은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그것도 한계다.
이제 그녀의 상처에선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 아, 극……. 그, 그만…….”
닉스는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으나, 페르안은 마법의 전개를 멈추지 않았다.
사정 봐줄 때가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패배하고, 죽게 될 테니까.
쩌저적─
아이스 바인은 곧 닉스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닉스는 고통에 신음하는 얼굴로 얼음조각에 갇혔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쿠우우우─
마지막 일격.
비기닝 윈드의 남은 풍력을 한데 모아, 저 얼음조각을 산산이 부순다.
불사조조차 재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잘게.
그럼 이 싸움은 끝이 나게 될 것이다.
“…….”
페르안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 *
…닉스는 어둠 속에 홀로 있었다.
─떠나시는 건가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고 연약한 목소리.
익숙하다. 누구 목소리지?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아. 알겠다.
이건 내 목소리다.
닉스는 그 사실을 깨달았으나, 곧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했던가?
─네가 있을 곳은 내 옆이 아니란다.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닉스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들었다.
어디서 들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달리 하고 싶은 건 없느냐?
다만,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고이는 것 같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동족들을 찾고 싶어요.”
닉스는 그리 대꾸했다.
기억 속의 목소리와, 자신의 대답이 겹쳤다.
─그들이 너를 거부하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너는 큰 존재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들의 그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명심해라.
─■■■■는 아직 있느냐?
누구?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와 육체를 공유하는 건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몬스터로서 천여 년을 살아온 놈이라 성품은 천하지만, 너와는 제법 미운 정이 든 모양이구나.
몬스터?
1,000년을 살아와?
미운 정이 들었다고?
…나한테 하는 말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지칭하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를 소중히 여겨라.
─■■■■. 닉스를 잘 부탁한다.
그 말에.
어디선가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당연한 소리를. 이 여자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된다고.
이죽이는 듯한 목소리.
순간 닉스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두통, 그녀를 괴롭혔던 그 고통이 갑자기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어둠 속에 홀로 있는 게 결코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샛노란 눈동자가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았던 한 쌍의 눈동자.
누구라도 공포에 떨 만한 광경이었으나, 닉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그녀의 반신半身의 이름을 속삭였다.
“…토르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