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06화 (427/857)

외전 206화

“프레이 블레이크?”

“예.”

남자 생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안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생도, 이름이 뭐였더라.

‘…아.’

도우만.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음. 저, 저기…….”

도우만은 데굴 눈알을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말없이 직시하니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페르안은 그의 기우를 덜어 주기 위해 살짝 웃어 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레이 블레이크.

물론 알고 있다. 입학 당시엔 제법 화제가 되었으니까.

그 블레이크 백작가의 삼남이니 이목이 집중된 것도 당연하다. 블레이크 가문은 제국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가진 마도가문 중 하나고, 특히 현 가주인 이사카는 7성의 아크메이지임과 동시에 제6마탑의 주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극찬하셨지.’

온화하지만, 마도학에 대해서 누구보다 냉정한 시야를 가진 게 셰퍼드 준이다.

그런 아버지가 아낌없이 칭찬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사카 블레이크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다.

유명한 건 이사카만이 아니다.

그의 두 아들인 미샤엘과 하인츠는 모두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천재다. 거기에 빼어난 품성과 수려한 외모로, 사교계 아가씨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듯하다.

그들의 활약으로 블레이크 백작가는 현 시점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블레이크 가문에 있는 삼남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 페르안도 마찬가지다. 프레이 블레이크라는 이름은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흥미를 가졌다.

그는 천재라는 부류에 아주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도 천재를 물색하기 위해서였으니 더 말할 가치도 없다.

블레이크 가문의 일원이라면, 혹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르안의 기대는 곧 싹 사라졌다.

얼마 후, 프레이 블레이크에 대한 여러 소문이 들렸기 때문이다.

[블레이크 가문의 수치]

[웨스트로드 아카데미 사상 최악의 둔재]

[마도학에 눈곱만큼의 재능도 없는 쓰레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온갖 오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프레이는 블레이크 가문에서도 반쯤 버림받은 자식이었다. 사생아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다면, 순전히 그가 가진 절망적인 마나 감응도 때문이다.

프레이는 지금 나이가 되도록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마도가문에서 그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

마나 감응도는 선천적 재능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꼭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근골이 확실히 자리 잡지 않은 유년기 시절엔 각종 영약과 시술, 교육 따위로 어느 정도 육체를 변환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공적으로 마나에 적합한 신체로 개조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순수하게 재능을 타고난 이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대다수의 마도가문이 혈통을 이어 가기 위해 채택하는 차선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블레이크 가문에서 이러한 방법을 모를 리는 없는데.’

그 모든 방안이 통하지 않을 만큼 절망적인 재능을 가진 건가?

그럼 왜 아카데미로 보낸 거지? 이제라도 마도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칠 생각인가?

아니면…….

“최근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지?”

“그게…….”

도우만의 설명을 들을수록 페르안의 표정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프레이 블레이크는 학년 내에서도 따돌림이 심했는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돌연 사람이 바뀐 것처럼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법에서도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는지, 시답잖은 시비를 걸던 동년생들을 연달아 격파했다던가.

“다른 클럽의 녀석들도 찝쩍대다가 된통 당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페르안은 도우만이 왜 프레이에 대한 얘기를 꺼냈는지 이해했다.

“프레이 블레이크를 우리 클럽에 영입하고 싶다?”

“예.”

도우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페르안도 프레이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해 봐.”

* * *

그러나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절했다고?”

“예. 그 건방진 자식……. 실력 좀 붙었다고 우리를 무시하다니.”

“실력이 ‘좀’ 붙은 수준은 아니지. 듣기로는 알렉스 드리미드까지 이겼다고 들었는데.”

“그건… 예.”

도우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드리미드는 제법 이름 있는 마도대회에 참가해 16강의 성적을 거둔 유망주다. 물론 페르안은 그의 대진운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았다는 점에서 가문과 개최진 사이에 오간 뒷거래를 예상했으나, 그 점을 감안해도 놀랍다.

생도 클래스의 마법사가 공식 마도대회에서 16강까지 진출한 건 대단한 일이 분명하니까.

“우리가 [■■■■ ■■]라는 것을 밝혔나?”

“예. 그래도 통하지 않더군요.”

“…….”

영입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말을 듣자, 프레이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페르안은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졌지만 이제 곧 방학이 시작된다. 집에 얼굴을 안 비춘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이번엔 줄곧 피해 왔던 약혼 얘기와도 직면해야 하니, 페르안으로서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에 여유가 없다.

아쉽지만 그와 대면하는 건 조금 더 미뤄야 할 것 같다.

페르안은 그리 생각했으나, 얼마 후 그는 프레이를 만나게 되었다.

다름 아닌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 * *

해적의 습격을 당했다.

그럼에도 페르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선박엔 마탑 출신 배틀메이지가 2명이나 있었고, 스스로의 실력에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적은 상상치도 못한 원군을 대동한 상태였다.

고위 언데드인 리치. 그것도 6성 수준의 마법사다.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돌파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페르안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지 알게 되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무력감은, 페르안이 잊고 있었던 공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위축된 꼴을 계속 보일 수는 없었다.

준 가문의 적자로서, 아크메이지의 아들로서, 무엇보다 페르안 준으로서.

그는 매사에 당당할 필요가 있었다.

반쯤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일 때, 그 남자가 움직였다.

프레이 블레이크.

페르안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리치를 죽이고, 해적들을 순식간에 제압한다.

군더더기 없는 판단, 결단력, 거기에 마법.

또래의 누군가를 보고 처음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진심으로 감탄하고, 존경심이 들었다.

그건 아버지에게 품는 존경과는 조금 색이 달랐다.

페르안은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프레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 * *

프레이와 친해질 수 있었다.

기뻤다.

사교계에서, 가식과 견제로 맺어진 인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생전 처음으로 사귄 벗. 페르안은 실로 오랜만에 상쾌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프레이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페르안을 높이지도 않았다.

대등한 관계, 동등한 시야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페르안이 동경하고, 추구하는 우정의 형태였다.

프레이에게 가문을 들른다는 확답을 듣고 나선, 소풍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가슴이 설렜다. 약혼에 관한 일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약혼녀인 소냐 아쿠아리드. 그녀가 프레이와 만났고, 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프레이가 귀족들에게 모욕받는 광경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아버지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상처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너와 대등한 관계를 이어 가고 싶다.

─물론 그러한 관계가 꼭 힘의 척도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 나 또한 그런 걸로 친구를 사귀지 않고. 내가 염려하는 건 네 생각이야.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벌어진다면, 누구보다 너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속내를 그대로 꿰뚫린 기분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페르안도 프레이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우정이 꼭 힘의 척도로 결정되지 않더라도, 페르안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같은 마법사인데도 프레이에게 한참이나 뒤처지는 꼴이 된다면,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페르안은 더 이상 인생을 허무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따분하단 생각도 사라졌다. 과거의 트라우마 따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게 됐다. 지금이라면 설령 스승님이 다시 나타나도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도학에도 다시 재미를 붙였다.

잠시 멈칫했던 재능은 완연히 개화되었고, 페르안의 마음엔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리 되자 페르안은 나태하게 보낸 지난 세월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좀 더 필사적으로 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일에 후회해도 별수 없다.

중요한 건 현재다.

‘강해져야 해.’

마도학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페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겐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에 휴학 서류만 제출한 뒤, 곧바로 남부 끝단의 용암지대로 향했다.

대륙에서도 천연 마나가 가장 풍부한 곳 중 하나였는데, 셰퍼드는 인내심과 끈기, 집중력만 있다면 용암지대가 최고의 수련 장소가 되어 줄 것이라 말했다.

‘…최소 3년.’

이미 6성의 경지에 접어들기 위한 자락은 잡았다.

그러나 페르안은 고작 6성 마법사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

현 시점에서 진지하게 노리는 건 7성이다.

아크메이지(Archmage).

마도학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발 들일 수 있는 경지에, 페르안은 닿고 싶었다.

* * *

긴 시간이 지났다.

…쉽지 않았다.

아니,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토로하자면, 솔직히 몇 번이고 절망했다.

어떻게 해야 7성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후우.”

페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암지대에 오고 2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는 6성의 경지에 접어들 수 있었다. 다시 반년 후엔 대성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후 2년 하고도 4개월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진척도 얻지 못했다.

다만 수확은 있었다.

마나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천연 마나가 넘쳐나는 곳에서 2년 4개월을 명상에 집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단, 이제는 한계다. 휴식이 필요하다. 엄살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이상 수련했다간 정신이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7성에 이르는 단서를 잡으려면 단순히 수련에만 힘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안은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수련에 빠져 있던 3년 동안, 경천동지할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미갓.

암중에서 대륙 정세를 주무르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공세를 취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서클 또한 더 이상 싸움을 피하거나 힘을 모으지 않고, 데미갓과의 전면전을 택했다.

숨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수련이나 하고 있었다니.’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때문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페르안이 강해지려는 이유 중엔, 당연히 데미갓과 싸울 때를 대비하고자 함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났다.

다름 아닌 서클 측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많은 이가 죽었다.

페르안은 가장 처음으로 가족의 안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셰퍼드와 라일리아는 무사했다.

그다음으로 신경이 쓰였던 건, 프레이다.

“아버지, 프레이에 대해서 무언가 들은 게 있습니까?”

“…음?”

셰퍼드는 잠시 눈가를 좁히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누구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제 친구인, 프레이 블레이크 말입니다.”

“…프레이, 블레이크? 블레이크 가문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제가 집에 초대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와는 직접 대면까지 했었습니다만.”

“…미안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셰퍼드가 직접 대면까지 했던 이를 잊었다?

그럴 리가 없다.

페르안은 혹 셰퍼드가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문득 느껴지는 강한 위화감. 페르안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지로 무시하며, 프레이의 수소문에 나섰다.

“…누구요?”

“프레이 블레이크?”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어느 곳에도 그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의 재적부에도, 프레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프레이 블레이크란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블레이크가의 삼남?”

“이상한 소리 하지 마쇼. 블레이크 가문엔 둘째까지밖에 없었소.”

“뭐, 숨겨 둔 사생아라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블레이크 가문은 몰락해 있었다.

가주인 이사카가 데미갓과 협력한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페르안에게 중요한 건 그딴 것들이 아니었다.

“하, 하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모두 프레이 블레이크에 대해 잊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건?

내가 만난 프레이 블레이크는 대체 뭐란 말이지?

난 환각이라도 본 건가? 아니면 꿈이라도 꾼 건가? 그것도 아니면, 아주 예전에 미치기라도…….

“…그럴 리 없어.”

페르안은 강하게 부정했다.

미쳤거나, 꿈을 꿨거나, 잘못 봤거나.

그런 게 아니야.

프레이는 실존했고, 나와 우정을 나눴고,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졌다.

다른 이는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왜냐하면 나 페르안 준은,

프레이 블레이크란 존재로 인생이 바뀌었으니까.

“…페르안 님.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있을 거다.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 묻고 다닌대. ‘프레이 블레이크’를 알고 있냐면서.”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거다.

“프레이 블레이크? 블레이크 가문이라면… 대재앙의 시기에 망해 버린 곳이잖아.”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그 가문에서 ‘프레이’라는 이름은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단서를 찾아내라.

멋모르는 자들의 수군거림 따위 무시하고.

“…그런 사람은 없어요, 페르안.”

“너 괜찮아? 아, 아니. 이상하단 소리는 아니고. 그냥 좀…….”

“기분전환이라도 하는 건 어때? 서쪽 바다에 괜찮은 휴양지가 있는데, 같이 가자. 네가 간다면 콧대 높은 영애들도 분명…….”

지인들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라버니, 그런 사람은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괜찮으냐? 피곤하면 좀 쉬도록 해라.”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페르안을 제외한 모두의 기억에서, 프레이 블레이크가 사라졌다.

이쯤 되니 세상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들여. 인정해. 모두가 아니라잖아.’

‘그 이상 설쳤다간, 진짜로 미친놈 취급받을걸?’

“…….”

다수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이미 ‘다수’라는 수치를 넘어섰다.

하나의 세상이 주장하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페르안이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세상을 향해 고개를 젓는 것.

…어쩌면, 미친 건 페르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상태로는 납득할 수 없다.

그러니 고집을 부릴 것이다.

다행히도 페르안은 쇠고집엔 자신이 있었다.

“난 이상하지 않아.”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페르안은 하늘을, 세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상한 건, 너희들이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까 보냐.

나의 인생을 바꿔 준 남자다.

고작 이 정도로 잊는다면,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재회했을 때 고개를 들 면목이 없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내게 가르침을 준 너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니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다시 한 번 비웃으려는 듯.

다음 날부터 프레이에 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으스대는 건 아니지만, 페르안은 자신의 기억력이나 암기력 따위가 비상히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하.”

그러나 페르안은 오히려 기뻤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어떤 존재가 프레이의 존재를 소거하고 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 사실 상관없었다. 그런 존재가 있단 걸 깨달은 것만으로 큰 수확이다.

필기도 소용이 없으니, 페르안은 항상 프레이에 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어쩌면 벌써 몇 가지는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사실만큼은, 항상 입에 달고 다니기로 했다.

“내겐 친구가 있어.”

누구보다도 멋진 친구가.

…그러나 그러한 중얼거림이 습관으로 바뀔 때까지.

페르안은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