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7화
불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스노우는 잠시 침묵했다. 말문을 잃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녀는 일렁이는 불길을 향해 걸어간 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피부가 따끈하다.
즉 헛것은 아니란 거고.
그 밖에도 위화감은 없다. 스노우는 육안으로 세세한 확인을 마친 뒤, 루카스를 보았다.
“이거, 네가 만든 거냐?”
“맞아.”
“마법 같아 보이는데.”
“2성 마법인 파이어 볼이지.”
가장 기본적인 화염 속성 마법. 딱히 그런 설명까지 덧붙이지는 않는다.
스노우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마법사였나?”
“아니.”
루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스스로 마법사임을 부정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이게 현실이다. 마나룸이 붕괴한 상태로 마법사를 자처할 수는 없다. 대마도사의 관점을 가졌던 루카스였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선 더욱 고지식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스노우는 생전 처음 듣는 언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이마를 찡그렸다.
“마법사도 아닌데 마법을 사용했다? 본녀와 수수께끼라도 하자는 거냐?”
“검사가 아니라도 검을 쓸 수 있잖아.”
“그거랑은 다른 얘기지 않느냐. 마도학이란 분야는 재능이 없다면 입문조차 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검이랑은 전혀 다르지.”
이 말은 옳다.
설령 검사나 기사가 아니더라도 검을 쓸 기회는 종종 있다. 딱히 누군가와 겨루지 않더라도, 식칼 정도는 누구든 잡아 봤을 거다.
즉 엄밀히 따지면 단순히 검을 쥐는 행위에 ‘조건’이나 ‘자격’ 같은 건 필요 없다.
반면 마법은 다르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스노우는 루카스의 육체에 마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로 소지한 마도구나 아티팩트, 스크롤 따위가 없단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더 의문스러워하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해.”
루카스는 다시 한 번 데우키드를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이건 검술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노를 젓는 듯 유려한 느낌이다.
“대기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검에 두른다. 그리고 마나가 전부 사라지기 전에 특정 마법의 술식 순서대로 마나를 재배치한다. 그럼…….”
스노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방금은 깨닫지 못했는데─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여겨보고 있지 않았다─, 루카스의 칼끝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칼끝을 붓으로 삼아, 아주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팟!
이번엔 허공에 하얀색 미사일이 나타났다.
“1성 마법, 매직 미사일.”
단순히 마법을 발현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게 공격 마법이라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도록 계산을 이어 가야 했다.
마법에 속도를 불어넣고, 공기 저항이나 바람, 지형지물, 목표물의 위치값까지 고려한 다음.
─루카스는 전방을 향해 검을 쭉 뻗었다.
“…….”
스노우에겐 그 모습이 검사가 아닌, 연주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마에스트로처럼 느껴졌다.
쉬익,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매직 미사일은 가까이 있던 나무를 한 번 후려쳤다.
쿠웅.
생각보단 묵직한 소리가 나며, 나뭇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그런 게 가능하단 건가.”
스노우는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끙끙댔다.
그나마 마도무인이라면 설명한 원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겠지만, 그녀는 마나와는 무관한 검사다. 쉽게 이해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 거다.
그녀의 시선이 데우키드로 향했다.
“그 검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기예인 것이냐?”
“내가 가진 검보단 이게 훨씬 효율이 좋지만, 딱히 이 검이 있어야 가능한 건 아니야.”
기본적으로 데우키드가 가진 기능은 마법을 파훼하는 것이다. 때문에 칼날에 마나를 머금을 수 있는 시간도 아주 짧다. 아무리 루카스라도 그 찰나 동안 4성 이상의 복잡한 술식을 짤 수는 없었다.
‘아예 마나를 칼날에 보존할 수 있는 검이 있다면.’
그렇다면 루카스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폭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흠.”
스노우는 고개를 한 번 털어내고는, 더 이상 복잡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루카스가 설명한 원리를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그냥 한 가지 사실만 받아들이자.
루카스는 전에 없던 특별한 방법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고.
“완벽한 원거리 공격 수단이군. 기습으로도 상당히 유용할 것 같고. 설마 검을 휘둘러 마법을 쓸 거란 생각은 못 할 테니까.”
그 말엔 동의한다.
아크메이지급 마법사가 아니라면 대기 중의 마나가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루카스는 데우키드를 칼집에 꽂은 다음 스노우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받았다.
“미안하구나. 웬만하면 빌려주고 싶지만, 이 검은 본녀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소중한 물건이라서.”
“상당한 명검 같던데.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받은 건가?”
스노우에게 데우키드를 건넨 건 다름 아닌 루카스였지만, 지금 이 세계에서 루카스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다시 한 번 가슴이 욱신거렸다. 딱지가 붙기 시작한 상처를 다시 헤집은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토록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니까.
스노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우戰友에게 받았지.”
“…….”
“뭐, 말해 줘도 넌 모를 거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기색이 느껴져서, 루카스는 입을 닫았다.
* * *
스노우는 루카스를 일반적인 검사처럼 가르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여러모로 희귀종이었고,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특별한 전투 방식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 뚜렷한 주관과 특출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틀에 박힌 주관도 아니고, 단점이라 할 만한 개성도 아니다.
즉 그 두 가지 요소는 루카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조언도 결코 ‘조언의 선’을 넘어선 안 된다.
루카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빈틈. 특정 자세를 취했을 때의 장단점에 대해서만 언질을 던지고, 보완해 준다. 이편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다행히 루카스의 이해력은 비상했다.
아니, 비상한 수준을 넘어섰다.
스노우는 여러 천재를 봐 왔다.
그중엔 페르안처럼 전무후무한 재능을 가진 ‘불세출의 천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루카스와 같은 특성을 가지진 못했다.
가령 나쁜 습관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을 때. 보통 사람은 알고 있어도 고치는 데 한 달, 길면 몇 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습관이고, 그게 몸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으니 나쁜 것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다르다.
이 남자는 스노우의 조언을 들은 순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신의 습관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거지.’
감탄했고, 그 이상으로 아쉬웠다.
만약 팔과 다리가 정상이었다면, 검술에 대한 집념이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실소가 나올 정도로 간단히 마스터급 검사가 탄생했을 것이다.
사실 몸의 장애보다 아쉬운 건 후자였다.
루카스는 검술에 깊은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건 재능이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념, 집착 없이 한 분야에서 대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세와 검술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끝났을 때쯤, 스노우는 이론적인 설명을 하는 데 집중했다.
“검을 목숨처럼 여겨라.”
“…….”
“…라는 말을 하면, 혹자들은 이리 말하지. 그리 집착하다가 검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고.”
스노우가 냉소했다.
“그런 상황이 결코 오지 않게 주의해야지. 검사에게 있어 검이 없는 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 있겠느냐? 우리에겐 이것이 팔이고, 다리며, 육체다. 물론 싸우다 보면 날이 상할 수도 있겠지.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거나, 부러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몸뚱이도 마찬가지. 험하게 굴리면 못 쓰게 되는 건 같다.”
궤변 같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게 신기하다.
스노우의 말이 확실한 논리를 갖췄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단 목소리에 깃든 자신감이, 언뜻 헛소리 같아 보이는 말에 신뢰감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검을 관리하는 데엔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된다. 뭐, 본녀의 검은 딱히 관리 따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너의 것은 그렇지 않다는 거지. 피와 살점을 깨끗이 닦아 내는 건 입에 담을 가치도 없다. 칼과 칼자루의 접합부가 헐겁지는 않은지, 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아닌지, 칼집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지는 않은지. 항상 꼼꼼하게 확인해야 해. 어떤 의미로는 육체보다 더 신경 써야 하지. 우리 몸뚱이야 어디가 불편하면 곧장 머리에 신호를 보내지만, 검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르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검사에게 있어 검의 중요성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단 뜻이었다. 루카스는 허리에 채워진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솔직히 토로하면 이걸 목숨처럼 여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마법사인 루카스에게 있어 검은 어디까지나 날붙이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마법사 시절에도 지팡이나 스태프 같은 무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검을 쓰는 드리드먼트보다 육체만 사용하는 무왕권이 더 적성에 맞았던 것도 이러한 성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겨운 설명은 이제 끝이다. 지금부턴 대련을 시작하겠다. 여태까지처럼 수비만 할 필요는 없다. 네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스노우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서 숲의 반대편을 바라본다.
“…숲이.”
“무슨 일이지?”
“숲이 울고 있구나.”
길쭉한 귀가 한차례 쫑긋거린다. 스노우의 고개가 살짝 기우뚱했다.
그것도 잠시.
“…….”
곧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건… 살기인가?
스노우가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다. 금방 돌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도록.”
“뭐?”
탓.
스노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대답조차 듣지 않고 떠난 것이다. 본신의 힘을 냈는지, 이미 어디로 떠났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루카스는 잠시 황망한 얼굴로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휘이잉.
더운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 꺼끌꺼끌한 혓바닥으로 피부를 핥아댄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 든다.
…기분 탓이겠지.
루카스는 고개를 저은 뒤 공터에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곳엔 취사도구가 갖춰져 있었다.
우선은 배부터 채울까. 숲에 오고 아직 한 끼도 안 먹었으니까.
근처에 있는 강으로 가서 수통에 물을 채운 뒤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다. 그런 뒤 공터로 돌아와 모닥불을 피웠다.
마른 장작이 미리 구비되어 있는 것도 행운이었으나, 불을 피우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갖고 있는 강철 검을 이용해 파이어 볼을 시전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데우키드보단 효율이 나빠서 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국 파이어 볼을 만들어 낸 건 10분 뒤였다.
이만큼 오래 걸리면 실전에선 쓸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소요 시간은 연습을 거듭할수록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높은 경지의 마법을 사용하려면 장비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익숙해지면 낮은 등급의 마법은 쉽게 발현할 수 있겠지.
‘손가락으로는 불가능한데.’
나뭇가지도 안 된다.
마나를 어느 정도 두르기 위해선 금속이라는 최소조건을 만족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칼끝의 형태는 무척이나 예리하기 때문에 마나를 재배열하기 아주 적합했다. 반면 손가락 끝은 뭉툭해서 이토록 세심한 작업을 수행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쯤 되니 루카스는 더 이상 칼이 날붙이로 보이지 않았다. 이건 그에게 있어 검의 형태를 한 지팡이나 다름없었다.
대충 물고기를 구워 먹고, 검술을 단련했다.
루카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검술을 간단히 제로식Zero式이라고 명명했다.
고작 저등급 마법 몇 개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뿐인데, 검으로 수련하는 게 조금은 즐거워졌다.
다만 이 방식으로 절대자의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절대자가 되는 것.
아직까지는 너무나도 머나먼 얘기만, 언제까지고 아득한 목표로만 여겨선 안 된다.
‘…힘.’
결국 루카스에게 가장 부족한 건 힘이었다.
힘만 있었다면 임시 회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서클의 내분에 대해서도 확실히 물어볼 수 있었겠지.
강해져야 한다.
지금으로선 안 된다.
루카스는 수련에 몰두했다.
* * *
육체가 슬슬 한계를 토로한다. 가만히 서 있어도 팔근육이 후들후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제로식을 수련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다.
“후우.”
한숨엔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환경이 아쉽다.
아말감 숲엔 마나가 너무 적다. 이 숲에 분포한 마나 농도, 루카스가 현재 소유한 무기로선 기껏 3성 마법이 발현할 수 있는 최대치다.
이스파니아 산맥처럼, 마나가 농밀한 곳에서 수련하면 훨씬 효과가 좋을 텐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막사로 돌아갔다. 수통에 든 물을 반 정도 마신 뒤, 근처에 있는 나무 열매를 땄다. 물론 식용을 위해서다.
사실 숲 열매를 함부로 먹는 건 아주 위험한 행위지만, 천막 안에는 누군가 까먹은 듯한 열매 껍질이 덩그러니 뒹굴고 있었다. 같은 껍질을 가진 것들만 골랐으니 먹고 탈이 날 걱정은 없을 것이다.
까드득.
시고, 딱딱하다. 다만 끝 맛은 조금 달달하다.
한 마디로, 먹을 만했다.
루카스는 전투적으로 열매를 씹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말 뒤늦게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거의 하루를 꼬박 수련에 집중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금방 돌아오겠다던 스노우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휘이잉.
“…….”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전에 느낀 것처럼, 불길하고 더운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