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9화
구름이 드문 밤하늘이었다.
루카스는 어슴푸레한 달빛을 맞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마도 새벽. 평소에 비하면 빨리 일어났다. 그게 달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팔락─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루카스는 독방을 쓰고 있었다. 애초에 1인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방에선 명백한 기척이 느껴진다. 소리는 책상에서부터 들려왔다.
침상에서 상체만을 일으켰다.
새하얀 무언가가 보였다. 처음엔 하얀색 모포인 줄 알았다. 설원에 사는 흰 담비나, 은빛 갈기를 가진 여우의 털로 만든 최고급 모포.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뒷모습이었고, 다시 말하면 백발이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은 달빛이 일렁이는 방에서 조용히 스스로의 신묘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탁.
스노우는 책을 덮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면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백발을 보았을 때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놀라지 않는군?”
“귀신 취급이라도 받길 원한 건가?”
“그것도 재밌었겠지.”
“…놀랐어. 설마 방을 무단으로 침입할 줄이야.”
“아하하…….”
스노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보다 소리는 작아 쿡쿡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뭐 하고 있었지?”
“네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깨우면 됐잖아.”
“단잠을 자고 있는 사람한테 그러면 쓰나.”
스노우의 배려는 어딘가 엇나간 부분이 있었다. 엘프기 때문에? 아니. 그녀 자체가 특이한 성정의 소유자기 때문일 것이다.
“카스트카우 동부에 있는 숲에 다시 언데드가 출현했다더군.”
“…….”
“자그마한 볼일을 마치고, 우리는 그곳으로 갈 거다.”
이상한 일이다.
언데드의 출현은, 물론 자연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현상이지만 그리 출현한 언데드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며 가진 바 힘 또한 볼품없다.
고작 그딴 잡졸 언데드의 출현이라면 스노우와 페르안이 이토록 경계할 이유가 없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란 건가.”
“언데드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잡지식이 깊군.”
루카스는 스노우의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누구 소행이지?”
“말한다고 알겠느냐? 기억도 없으면서.”
“…….”
틀린 말은 아니다.
루카스는 괜히 기억 잃은 콘셉트를 잡은 게 아닌지 약간 후회가 들었다.
“내일 오후에 출발할 생각이다. 페르안의 마법을 사용할 테니 별달리 준비할 건 없다. 아, 그리고.”
스노우는 루카스가 구입한 책들에 손을 얹었다.
“이건 네게 쓸모없을 거다.”
동시에 그녀의 손가락에서 하얀색 냉기가 치솟더니, 순식간에 책들을 모두 얼려 버렸다.
콰작!
힘을 조금 주자 얼음덩어리는 완전히 박살 났다.
“한 달.”
“…….”
“본녀는 바쁜 사람이라서 말이지. 딱 한 달 동안 너를 가르쳐 볼 생각이다.”
스노우는 생각보다 나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루카스는 그리 생각하며,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만약 한 달 후에, 나의 성장치가 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방을 나서기 직전, 싱거운 미소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볼 일은 없겠지.”
* * *
아침이 밝고 나서 여관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한적했다. 상단은 내일 오후쯤 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예정보다 출발 시간이 더 늦춰진 모양인데, 아마 페르안과 모종의 얘기가 오간 모양이다.
졸지에 용병들은 공짜 휴일이 생겨 버렸다. 아마 바이락의 술집이란 술집은 모조리 순회한 뒤, 해가 밝기 직전에 들어왔겠지. 저 꼴로는 오후가 될 때까지 꿈나라를 허우적댈 거다.
루카스는 아침 식사를 하고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오후가 되었을 때 여관을 나섰다.
신청한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다.
시청으로 보이는 건물로 입장한다. 리나의 지인인 여인, 아마 ‘티아’라는 이름이었나.
그녀 또한 루카스를 기억하는지 고개를 꾸벅였다.
“신분증은 나왔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티아가 준 패를 훑어보았다.
이름, 나이, 출신지. 마지막으로 제일 밑 칸엔 반쯤 잘린 허브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레드 허브 상단 신분증의 특징 중 하나다. 허브의 개수가 많을수록 수완 좋은 상인이라던가.
루카스는 견습이다. 홀로 제 몫을 할 수 없는 상인이므로 허브 반쪽이 있는 듯하다.
‘나이는 서른 살. 출신지는 루아노블의 농촌 마을이라.’
아마 기억이 없는 루카스를 대신해 리나가 적어 둔 것이다.
출신지는 그렇다 쳐도, 나이는 서른이라니. 그가 알기로 이 육체의 나이는 아직 20대일 텐데.
‘머리카락 색 때문에 늙어 보이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접고 시청을 나선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입구엔 페르안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빙긋 웃는 얼굴에서 빛이 났다. 페르안의 나이는 현 시점에서 아마도 30대 초반일 텐데, 많아도 20대 중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란히 걸으면 루카스 쪽이 연상자로 볼 것이다.
“어디 갔다 오셨나요?”
“시청에서 신분증을 받아왔습니다. 리나의 도움으로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제국에선 신분증 없이는 제한되는 일이 많죠.”
페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동부에 있는 숲으로 가는 겁니까?”
“아뇨. 우선은 웨스트로드 아카데미로 갑니다.”
“…웨스트로드 아카데미?”
그러고 보니 스노우는 자그마한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아카데미에 들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나.
“이 도시에 있는 워프석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도심지에선 되도록 워프 마법 사용을 자제하고 있거든요.”
그 이유는 루카스도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워프 마법이 편리하긴 하다.
“상단과 같이 가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그들의 최종 목적지도 아카데미라고 들었는데.”
“그만한 인원과 짐마차를 모두 옮기는 건 비용 대비 효율이 좋지 않습니다.”
“그럼 애초에 전달해야 할 물품들만 전송했다면요?”
그랬다면 상단도 용병도 고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페르안은 딱히 귀찮은 기색 없이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물품은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겁니다. 국가 간의 워프 사용엔 많은 제약이 따르지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용할 수 없습니다.”
과연.
루카스가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데, 스노우가 여관에서 내려왔다.
젠키의 가면은 다시 착용한 상태다. 하긴, 이런 길거리에서 맨얼굴을 까고 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는 생김새의 소유자였다.
“페르안, 아카데미 측과는 연락이 되었느냐?”
“예.”
“시리즈와 소냐는?”
“이미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이번 회담 말입니다. 자칫 일이 잘못 풀렸다간…….”
페르안의 목소리는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그 정도 분간도 못 할 놈들은 아니니라. 그리고 만에 하나의 상황이 일어나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어째섭니까?”
스노우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내가 제일 강할 테니까.”
* * *
웨스트로드 아카데미는, 루카스에게 있어선 ‘또 하나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가 무저갱에서 비로소 탈출하고 ‘프레이 블레이크’의 육체에 깃든 뒤, 처음 눈을 뜬 장소였으니까.
그럼에도 사실 잘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가 아카데미에 머문 기간은 불과 한 달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곳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기억났다.
그때의 아카데미엔 워프석은 없었다.
우웅─
워프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직 주변 시야가 환하긴 하지만 곧 가라앉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다소곳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딱딱한 인사는 되었다. 시리즈, 오랜만이구나. 별일 없었느냐?”
“그렇사옵니다.”
“흠.”
스노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턱짓했다.
“안내해라.”
“예.”
시리즈.
그리 불린 여인은 우아한 몸짓으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빙글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기품이 묻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예법을 배운 귀족이라는 뜻이다.
“다른 이들은?”
“폐하께서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가. 그건 좀 별로군.”
스노우가 쯧 하고 혀를 차자 시리즈는 옅게 웃음 짓더니, 자연스레 시선을 루카스에게 보냈다.
“한데, 그 남자는……?”
스노우 대신 대답한 건 페르안이었다.
“새로 연합원이 된 남자요.”
“…그렇습니까.”
그 한 마디에 납득이 됐는지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복도엔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건물이었다. 생도들이 수업을 하는 학생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숙사나 도서관도, 식당도 아니다.
아마 교수들이 사용하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생은 출입할 수 없는 지역.
시리즈는 그 건물을 돌아다니다 어느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을 열며, 입장하라는 듯한 몸짓을 했다.
스노우, 페르안이 안으로 들어가고 루카스도 뒤따르려는 순간, 시리즈가 그를 막아섰다.
“당신은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아니. 안으로 들여라.”
시리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 남자를 대동하시겠단 뜻입니까?”
“뭔가 불만이라도 있느냐?”
“소냐 경이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더군. 미안하지만 계속 대기하라고 일러둬라.”
시리즈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티는 내지 않지만, 스노우의 명령에 불만이 있는 게 느껴졌다.
스노우는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휙휙 저었다.
“어차피 본격적인 회담도 아닌데 뭐 그리 깐깐한 게냐? 좋지 않은가? 우리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숨길 수 있는 건데. 뜻밖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페르안만으로 충분하고.”
“…알겠습니다.”
왠지 시리즈의 언짢은 시선이 루카스에게 향했다.
엉뚱한 화풀이… 는 아닌가. 루카스는 슬쩍 그 시선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이다. 아마 회의실로 사용하는 장소인 것 같은데, 공간에 비해 가구물이 허전하다.
거대한 원형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전부였다.
저벅저벅 걸어간 스노우가 그중 한 의자를 차지했다. 페르안은 스노우의 옆에 선 다음 루카스에게 눈짓했다. 왼쪽에 나란히 서라는 건가. 그의 뜻대로 서자, 꼭 왕을 보필하는 두 명의 충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스노우는 여왕이고 페르안은 귀족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당신은 목숨의 위협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페르안의 말이었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모습을 드러낼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존재들이지만, 결코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폐하의 의도는 짐작 가지 않습니다만, 부디 위축되지만 마십시오. 우리가 당신을 지켜 줄 테니까.”
“…….”
스노우는 금세 심드렁한 얼굴로 다리를 까닥이고 있었다.
페르안의 말은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는 듯했다.
어쩌면 이 회의실 안에 루카스가 입장한 건, 페르안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카스는 곧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폐하는 이미 안에 오셨… 자, 잠깐. 뭐 하시는 겁니까?”
콰앙!
─문이 그대로 날아갔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문짝째 날아간 것이다.
그것도 포탄보다 수십 배는 빠르고 흉포한 기세로.
이쪽으로 온다.
루카스는 반응할 수 없었다. 문짝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다. 머리가 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몸이 원활히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움직여도, 지금 그에겐 대리석으로 만든 문을 일격에 베어 낼 만한 신체 능력이 없었다.
핏─
문짝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꽈앙!
반으로 갈라진 문이 회의실 구석에 처박혔다.
철컥, 스노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넣은 뒤 고적한 시선을 보냈다.
“발정기라도 온 것이더냐? 오늘따라 더 야만적이군.”
“나흘 정도 잠을 못 잤더니 예민하다. 개소리 지껄이는 새끼가 있으면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로.”
루카스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니 주둥이 열기 전에 한 번 주의하길 부탁하지.”
더 이상 문이 존재하지 않는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 강철 같은 육체가 동시에 보인다.
“…….”
루카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내가 두 번째인가? 꼴등은 아니군.”
남자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말문을 잃은 루카스에게, 더욱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아뇨. 당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좌악─
허공에 새로운 공간이 덧씌워지며, 마지막 남은 하나의 의자 전체를 뒤덮었다.
그건 루카스에겐 어느 정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공간에 간섭하는 힘.
“…….”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
“하암.”
이반은 코웃음을 쳤고, 스노우는 하품을 했으며.
“주연들이 모두 모였군요. 그럼 이제 회담을 시작해 볼까요.”
이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한순간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적대, 견제, 그리고 경계.
마주친 시선에선 온화한 감정이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스노우와, 이반과, 이리스는 모두 서로를 적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대체.’
툭 하고.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끊겼다.
그게 도화선이 되어 속이 끓기 시작했다.
마치 용암을 머금은 것처럼,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가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시작된 업화는 곧 전신을 뒤덮었다.
으드득.
돌연 들린 심상치 않은 소리에 페르안은 루카스를 보았다. 함부로 존재감을 드러내도 될 자리가 아니라고, 눈치를 주려고 했다.
그러지 못했다.
루카스의 얼굴, 그리고 표정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되었다.
‘…대체.’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뒤를 맡겼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들이 맡겨 달라고 말했으니까.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이 우주에 대해선 털끝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세계가 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염려가 있다면, 내가 이곳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였다.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았을, 무엇보다 아름다운 우주를 눈에 담지 못할까 봐. 혹 눈에 담게 되더라도 인간적인 감상을 느끼지 못할까 봐.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고,
억겁의 세월을 버텼는데.
‘…대체 너희들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그러니 그가 가진 이 감정은, 틀림없이 합당했다.
루카스 트로우맨은 순수하고 선명하게,
이 상황에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