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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80화 (401/857)

외전 180화

“그렇군요.”

예상대로 페르안은 딱히 놀라지 않은 얼굴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란 이름, 결코 희귀한 편이 아니다.

이름만 보았을 땐 오히려 흔한 축에 속한다. 4,000년 전에도 그랬고, 현 시대에선 더욱 그렇다. 특히 카스트카우의 제국민인 페르안에겐 퍽 익숙하겠지.

트로우맨이라는 성만 덧붙이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여길 이는 없을 것이다.

‘아니.’

지금 루카스의 꼴로는 스스로를 대마도사로 밝혀도 미친놈 취급만 당할 것이다.

프레이 블레이크 시절과 달리 ‘루카스 트로우맨’의 육체를 갖고 있지만, 초췌한 얼굴과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루카스를 보고 그 정체를 알 만한 건 4,000년 전, 그의 진짜 모습을 봐 왔던 이들뿐이겠지.

슈하이저의 기억과 자아를 가진 아나스타샤.

혹은, 이리스 같은.

“그 외에 떠오른 건?”

“…없습니다.”

루카스는 그리 말한 다음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는 겁니까?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페르안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루카스는 그 미소 속에 숨겨져 있는 한 줌의 경계를 눈치챘지만, 딱히 그 사실에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편이 훨씬 이상하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힘이 닿는 데까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는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고, 루카스는 쉽게 그의 의중을 짐작했다.

“가까운 도시까지 데려다주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페르안이 미안하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서클.’

루카스가 재회를 원하는 인물 대부분이 속해 있는 집단.

페르안은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끈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남자다. 그의 부친인 셰퍼드 준부터가 서클 소속이었고, 과거엔 그 또한 서클에 들어가는 것을 희망했으니까.

‘서클은 비밀 조직이었지만…….’

데미갓과의 전면전을 통해 그 존재가 어느 정도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과 쉽게 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루카스는 과거의 인연 대부분과 재회할 생각이 없지만, 반드시 만나야 할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이반.’

무왕권의 당대 계승자.

어쩌면 이반은 카사진이 타락한 이유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반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랜드 마스터.

루카스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카이로 위르세만은 이반을 그렇게 불렀다.

아마도 이반은 현 서클의 최고 권력자일 것이며, 실질적으로 그 비밀 집단을 이끄는 수장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 꼴로 녀석과 독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만만한 위치도 아니고, 서클이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웬만한 지위로는 이반과 독대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처럼 볼품없고 약해진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자 마음 한쪽에서 추악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반은 루카스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지 않고, 한 명의 대등한 친우로서 대해 줬다.

그러니 녀석에게만큼은 정체를 밝혀도 되지 않을까?

일이 꼬여서, 잠시 이곳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

고개를 저었다.

자신한테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역겨운 생각이었다.

인면수심도 정도가 있지. 그딴 행동은 다름 아닌 루카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우선.’

가장 필요한 건 정보다.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

데미갓이 사라진 이후, 대륙 정세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서클은 완전히 그 존재감을 드러냈는지, 아니면 여전히 암중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

이외에도 파악해야 할 것이 적게 봐도 수십 개는 넘게 있다.

“늦어도 모레 아침엔 카스트카우 국경으로 진입할 겁니다. ─아. 카스트카우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입니다.”

카스트카우 제국.

마도제국으로 이름을 떨쳤던 강대국.

데미갓이 마각을 드러내고, 그들의 파괴적인 손길이 대륙 전역을 휩쓸었을 때.

아예 국토째 사라진 곳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도시 몇 개는 우습게 파괴당한 나라가 대부분이었으나 제국의 피해는 경미한 선에서 그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스트카우는 그 어떤 나라보다 빨리 데미갓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당시엔 현명한 판단이었겠지만, 데미갓이 사라진 현시점에선 치명적인 오점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대륙 정세를 주도하던 초강대국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사라졌을 테니, 아마 어떤 형태로든 인접국으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겠지.

루카스의 예상대로라면 그러한 형태로 피어난 국가적 혼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페르안 준을 보았다.

얼굴엔 귀공자 같은 기품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차림새는 담백한 느낌이다. 허름하게 보이진 않지만, 딱 봐도 귀족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

준 공작가는 황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가문 중 하나였으며,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한 권력과 입김을 갖고 있었다.

그 준 가문의 적자인 페르안이 이런 검소한 꼴로 상행에 동행하는 상황이라. 루카스는 이 일에 어떤 배경이 깔렸는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국경에 진입한 뒤 다시 이틀 거리에 ‘바이락’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도시 규모는 크지만, 치안이 안정되어 있어 몹쓸 일을 당할 걱정은 없을 겁니다. 바이락으로 가면 루카스 씨의 임시 신분은 제가 증명해 드리죠.”

루카스는 상념에서 깨어난 다음 차분한 태도를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그러자 페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시군요.”

목소리에 희미한 의심이 느껴졌다. 아까와 달리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이 또한 당연하고, 예상했던 반응이다.

기억이 없다는 건 스스로의 근본조차 모른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다니는 듯한 철저한 고립감과, 그로부터 오는 공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루카스도 그 정도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럴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기억을 잃은 자를 연기할 수 있었다. 기억 상실로 인해 겪을 혼란이나 공포도 꾸며 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페르안의 눈빛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이가 있었다.

이러한 남자를 어설픈 연기로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성품을 드러내며, 때때로 분간이 힘들 만큼 작은 거짓만을 입에 담는 편이 나았다.

“조급하게 군다고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흐음. 맞는 말씀이지만…….”

페르안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고, 루카스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존댓말.

─서로에 대한 경계심.

─한 줌 의심이 섞인 눈빛.

그 모든 것이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벽의 두께를 실감케 한다.

‘그런가.’

지금 이 장소, 이 순간에.

페르안은 더 이상 그의 친우가 아니었다.

‘…익숙해져야겠지.’

고작 이 정도로 우울함을 느껴선 안 된다. 과거의 인연을 마주할 때마다 이리 슬퍼한다면,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정신이 먼저 무너져 내릴 것이다.

루카스는 약해진 육체만큼이나, 자신의 내면 또한 약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모되었던 인간적 감정과 면모가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연약함]을 되찾았으니까.’

그렇다고 약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바란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니까.

* * *

덜컹─

루카스는 짐칸의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어둡다. 노을이 질 때보다는 많이 쌀쌀해진 게, 아마도 계절은 가을쯤인 듯하다.

이런 한밤중에 마차를 모는 건 위험하니 곧 이동을 멈추고 야영 준비를 시작할 거다. 아마 평평한 지대가 끝나는 대로.

─루카스의 심신은 안정된 상태였다.

그는 짐칸에 쌓인 상자에 기댄 채,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고심하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

이 고향 우주에서 루카스가 완수해야 할 목적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절대자로서의 힘을 되찾는 것. 그에겐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고, 그를 위해선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주를 넘나들기 위해선 다시금 절대자의 위치를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필멸자의 정신과 육체로는 차원 간의 이동을 버텨낼 수 없으니까.

둘째 목적은 첫 번째와 이어진다.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이 방법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몇 가지 있으니 우선은 넘겨 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어찌 보면 이 우주에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인, 카사진이 타락한 이유를 찾는 것.

셋 중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조급하게 해결하려 들었다간 아예 일을 그르칠 확률도 있었다. 그러니 루카스는 장기적으로 일을 볼 생각이었다.

차근차근, 한 발자국씩 내디딘다.

언뜻 느릿한 진척 속도에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 될 것이다.

우선은 도시 ‘바이락’에 내린 뒤, 당분간 그곳을 거점으로 지내며 홀로 살아갈 만한 역량을 쌓을 생각이다. 붕괴된 마나룸을 수복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심해야겠고, 마법을 쓰지 못하는 동안 스스로의 몸을 지킬 만한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그 ‘수단’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루카스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의 육신. 아니, 그 이하다.

팔과 다리에 장애를 안고 있으니 일반적인 방법으로 육체를 단련하는 것조차 힘들다.

신력 같은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마법과 신력을 뺀다면,

루카스에겐 스스로를 지킬 만한, 혹은 누군가를 쓰러뜨릴 만한 수단은 무엇이 남을까?

상황은 절망적이다. 비참하다고 표현해도 적절할 것이다.

과거 절대자였던 존재가 격락하여, 인간 사회에서 보신保身할 수단에 대해 강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러나 의외라고 해야 할지, 딱히 암담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흘 뒤.’

그때가 되면 이들은 바이락에 도착하고, 루카스는 그곳에 홀로 남겨지게 될 텐데 그 전까지 되도록 페르안에게 얻고 싶은 정보가 있다.

서클에 대해서다.

지구에 있을 때 아리드의 힘을 통해 이반의 모습을 엿보았다. 수심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반에게선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아마도 녀석은 데미갓 이외의 어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했다.

…페르안도 이반이 처한 ‘문제’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과거 페르안은 웨스트로드 아카데미의 생도 모임 중 하나인 ‘트로우맨 링즈’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생도 모임이 아닌 ‘진짜’ 트로우맨 링즈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동경심의 발로인지, 페르안은 항상 주황색 반지를 손가락에 차고 다녔다.

‘아까 봤을 때는 반지가 없었지.’

페르안의 손가락은 비어 있었다.

“…….”

변심한 건가. 아니면 다른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루카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으나, 고심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내일 페르안과 좀 더 얘기해 봐야겠군.’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이 좀 귀찮아졌다. 서클에 대해 넌지시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날 루카스는 잠들기 직전까지 페르안과 어떤 화제로 얘기를 나눌지에 대해 고심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밤새 했던 고민이 전혀 필요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페르안 준이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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