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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74화 (395/857)

외전 174화

언제나 의지가 되었던 목소리.

힘들 때 떠올리면 언제나 힘이 되었던 얼굴.

지친 심신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손짓.

그 모든 것이, 아직 눈가에 선명하다.

그 때문에 지금 민하린은 더욱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있었다.

상냥했던 스승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본 적 없는 건 아니다. 민하린은 때때로 루카스가 이런 표정을 짓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적과 대치했을 때.

지금, 루카스는 민하린을 적처럼 대하고 있었다.

“아, 으……”

혀끝이 굳어 버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태어나고 이만한 공포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공포는 단지 ‘루카스’란 절대자가 발휘할 수 있는 기백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믿었던 스승의 배신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인가?

몰라. 모르겠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멀리 떨어져 있던 리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모든 광경을 보았다. 보았는데,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루카스가 보인 태도,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착각이 아닐까.

그런 안일한 생각은, 그의 눈빛을 받는 순간 사라졌다.

“무슨 말이냐고?”

흡.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덜덜 떨고 있는 민하린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왜 너희들에게 실망했는지?”

으득.

루카스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그가 신경질 섞인 동작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을 보아라. 이 난장판을 보라고. 용신의 섬은 가라앉았고,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런데 노디에소프는? 내가 놈의 목에 구멍을 내기 전까지, 너희들이 놈에게 의미 있는 상처를 하나라도 새겼나? …복부에 있는 유일한 상처조차 신녀의 성과인 걸 알고 있다.”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세디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놈은 절대자였어, 아버지.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우리라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게 둘러대지. 적이 너무 강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운이 나빴다……. 역겨운 변명이고, 핑계에 불과하다. 결국 나약해서, 빈약한 의지력을 가져서, 혹은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 꼴이 된 거다.”

“…….”

세디는 잠시 뗐던 입술을 다시 붙였다. 그건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의 루카스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루카스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조금은, 정말 조금은 믿었다. 어쩌면 너희들이라면 다를 거라고. 다른 인간들과 달리, 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었어. 너희들은 나의 기대를 배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자 따윈 거두지 않는 게 좋았어.”

루카스의 시선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천천히 향했다.

민하린, 세디, 리오, 그리고 아리드까지.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몸을 떨었다.

설마 루카스에게 저런 눈빛을 받을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싸늘하고, 경멸마저 섞인 시선.

“나는 너희들에게, 인간이란 존재에 진심으로 실망하고 말았다.”

“…….”

“그중에서도 가장 한심한 건, 바로 너다. 민하린.”

가장 앞에 있는 민하린에게 다시 시선이 향한다.

루카스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간 다음 거칠게 멱살을 잡았다. 그에 실린 힘은 대단치 않았다. 민하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뿌리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전신은 마비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마주한 시선.

루카스의 푸른 눈동자를 직시하자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된 거지? 이종학의 죽음으로 옛 기억이 떠올랐나? 네가 지키지 못했던 부모의 얼굴이 되살아나기라도 했나? 그로 인해 트라우마가 자극받고, 죄책감과 자괴감에 헤어 나올 수 없게 됐나?”

“아, 으…….”

“만약에 그렇다면 넌,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다.”

쥐었던 멱살을 거칠게 풀었다. 거의 내동댕이치는 것과 다름없는 동작이었다.

민하린은 힘없이 얼음대지에 무릎을 꿇었다.

“네 주변을 봐라. 이종학만이 네 동료였던 거냐? 다른 자들은 왜 보지 않는 거지? 잃은 것보다 가진 게 훨씬 많은데도 이미 떠난 존재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다. 이 상황을 자초한 건, 너의 좁은 시야 탓이다.”

“아, 아…….”

“…양손 가득 구슬을 쥐고 있다면, 언젠가는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수밖에 없지. 떨어지는 구슬을 붙잡기 위해 허우적대면, 그나마 쥐고 있는 것마저 모두 놓치게 돼. 대체 왜,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거냐?”

루카스가 숨을 몰아쉬며 민하린을 내려다봤다. 민하린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반쯤 죽은 눈으로, 스승을.

아니.

스승이었던 존재를 올려다봤다.

“다, 당신은…….”

민하린이 떠듬떠듬 말했다.

“스승님이, 아니야.”

“──.”

루카스가 침묵했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지 않았더라도, 민하린에겐 그의 표정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을 거다.

“스, 스승님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아. 항상 온화하고, 다정하게 우리를…….”

“…이끌어 줬다고. 아직도 그런 모습을 내게 기대하는 건가. 정말로 역겹군. 그래, 그걸로 되었다.”

서늘한 비수가 폐부를 가르는 것 같다. 민하린은 덜덜 떨리는 얼굴로 루카스를 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법사의 세계>에서 발버둥 치는 노디에소프를 보았다.

저 정도로는 부족하다. 과거에도 그랬듯, 9성 마법 <마법사의 세계>엔 결정력이 부족하다. 기껏해야 시간벌기가 전부다.

콰직!

그 순간 노디에소프가 <인피니티 필드>를 찢어발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의복은 넝마가 된 채 나풀거리고 있었지만, 전신에 상처랄 게 보이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데미지도 받지 않고 9성의 마법을 파훼했단 뜻이다.

“이제 인간이란 존재에 신물이 난 거냐? 아니면 정말 자포자기하고 만 거냐.”

“신경 끄시지.”

“나를 속일 생각 마라. 네놈의 육체, 마치 말라비틀어진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있지 않나.”

“……!”

그 말에 멍하니 있던 리오가 깜짝 놀라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전신은 로브가 대부분 감싸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드러난 곳이 있었다.

얼굴과 손끝.

‘왜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루카스의 손가락 끝은 갈라져 있었다. 노디에소프의 비유처럼 금이 간 도자기 같은 꼴이다.

갈라진 손가락에서 살 가루 같은 게 부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육체 수준에 맞지 않은 힘을 억지로 쓴 대가다. 네가 사용한 기술들 모두, 이 같잖은 수작질조차 지금 네게 허락된 기술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디에소프가 의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네놈을 증오한다. 아울러 너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혐오감 이외의 감정은 들지 않아. 그럼에도 네가 절대자란 사실 하나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묻겠다. 루카스 트로우맨, 왜 스스로의 ‘초월체’를 깎아내고 있는 거지?”

“뭐……?”

그 말에 세디의 표정이 무서울 만치 굳었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대꾸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라, 노디에소프. 내 목을 따는 게 네 최대 목적 아니었나?”

“너는 죽고 싶은 건가?”

“네가 안 온다면 내 쪽에서 가지.”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노디에소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핏─

두 절대자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꽈앙!

하늘 저편에서 두 개의 거대한 힘이 격돌했다. 그로 인한 여파만으로, 단단히 얼어 있던 얼음 대지에 쩍 금이 갔다.

꽈앙! 꽈앙!

교전이 일어날 때마다 하늘과 바다가 떨리는 것 같다.

핏!

루카스의 손가락에서 다시 한 번 앱솔루트가 쏘아졌다.

“그딴 게 몇 번이고 통할 것 같나─!”

노디에소프가 노호를 터뜨리며 물로 만든 막을 양손으로 펼쳤다.

수막水膜에 닿은 앱솔루트는 마치 거울에 굴절된 빛처럼 방향을 바꿨다. 얼음 대지에 서 있는, 민하린에게로.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대지에 주저앉아 있었다. 전신을 흔적도 없이 사멸시킬 공격이 시시각각 접근하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깨닫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만.

“…….”

루카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퓻.

점멸 마법, 그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민하린의 앞에 나타났다.

스스로 시전한 앱솔루트 빔이었지만, 노디에소프의 수막에 한 번 걸쳤을 때 놈의 외력이 묻어 버렸다. 덕분에 말끔하게 회수하거나 요령 좋게 흘리는 건 불가능하다.

왼손을 펼쳐서, 정면에서 막는다.

꽈앙!

아찔한 충격이다.

루카스는 눈과 코, 입에서 동시에 피를 쏟아냈다.

이미 만신창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처참한 꼴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조금만 더 버텨 주길 간절히 바란다.

쩌적─

손바닥 끝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살과 근육이 파이며 새하얀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카스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붙잡은 다음, 그 힘을 다시 한 번 노디에소프에게 튕겨냈다. 어렵사리 공격을 넘긴 루카스와 달리, 노디에소프는 쏘아져 오는 앱솔루트 빔을 가볍게 쳐냈다.

“…어째, 서?”

뒤에 서 있던 민하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루카스의 왼손은 새하얀 백골이 되어 있었다. 루카스는 흐르는 땀을 닦지 않고, 그렇다고 민하린에게 대답도 하지 않으며 다시 한 번 노디에소프와의 전투를 재개했다.

“…….”

멍하니 있던 민하린이 세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디, 초월체를 깎아내고 있단 게 무슨 의미야?”

“…….”

“넌 무언가 알고 있는 거지? 지금… 스승님은 어떤 상태인 거야?”

다시 한 번, 루카스를 그렇게 불렀다.

세디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짓눌린 입술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뭐……?”

“여태껏 절대자가 되기 위해 쌓은 모든 업적을 연료燃料로 쓰고 있는 거라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죽는 것보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겠지.”

즉 루카스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여, 완전한 무無가 되는 것이다.

“…….”

신녀가 가라앉은 눈동자로 루카스를 바라봤다.

* * *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소멸을 각오한 채 나와 싸우는 거지?’

루카스가 사용하는 기술들, 위협적이지만 그게 전부다.

놈은 결코 나를 죽일 수 없다. 노디에소프는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결국, 그가 자신의 존재를 바쳐서까지 치고 있는 발버둥은 곧 들이닥칠 패배, 뒤따르는 소멸을 늦추는 결과밖에 낳지 못할 것이다.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분들의 아량을 조금이라도 바랄 수 있었을 텐데.’

검은 가시의 마왕은 그를 극도로 혐오하지만, 태양거인의 적대감은 그만큼 격렬하지 않다. 천둥우레의 뇌존에 이르러선 루카스를 나쁘지 않게 여기고 있단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니 만약 혼 자체를 저당 잡히더라도 나쁘지 않은 처우를 받을지도 몰랐다. 노디에소프는 그의 영혼을 추악한 가축에 집어넣어 고문하겠다고 말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은 일이었다.

‘이 발버둥에 무슨 의미가 있단 거냐?’

그 순간이었다.

“……!”

노디에소프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루카스 때문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의 내부에서 갑자기 벌어졌다.

‘힘이……?’

모두 돌아왔다?

노디에소프가 손을 꿈틀거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자로서의 권능 대부분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의 전신을 얽맸던 구속과 제약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이다.

‘신녀의 힘이 다한 건가?’

아니. 그건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다.

노디에소프는 의구심부터 느꼈다.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돌연 사지를 묶고 있는 쇠사슬이 부서진다면, 기뻐하기보단 의심부터 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니까.

결과적으로 노디에소프는 찰나 동안 멈칫거렸다.

그리고 신녀는, 노디에소프가 그리 행동할 것이라 정확히 예상했다.

콰아아아─

“……!”

어느새 후방에 신녀가 서 있었다. 노디에소프는 한 발짝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칠색七色으로 휘황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눈동자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두 손바닥을 교차시킨 채, 노디에소프를 겨냥한다.

“─채홍彩虹의 숨결.”

번쩍─!

거센 광휘가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 나왔다. 얼마나 밝은지 하늘이 어둡게 보일 지경이었다.

빛은 엄청난 규모로 퍼져 나갔다. 이 순간 천상계에 존재하는 섬 어디에서든, 하늘을 뒤덮은 일곱 광휘를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카가가각!

“끄으으!”

일곱 빛이 발휘한 엄청난 물리력이 노디에소프의 전신을 우악스럽게 짓눌렀다.

‘힘의 제약이 풀린 건, 나만이 아니란 거냐……!’

이 일격을 위해 일시적으로 용신의 섬만이 아닌, 천상계 전체에 두른 결계를 해제한 것이다.

노디에소프조차 방어가 불가능하다.

채홍의 숨결은 노디에소프를 하늘대륙의 바다 가장 밑바닥까지 처박았고, 그러고도 기세가 죽지 않은 채 아예 천상계에서 그를 퇴출시켰다.

상공 1만 미터에서의 추락.

노디에소프는 다시 한 번 바다에 떨어졌다. 천상계 바다가 아닌 대륙의 바다. 그 심해 가장 깊숙한 곳까지 가라앉는다.

아마 그는 두 바다의 끝자락에 모두 닿아 본 최초의 존재일지도 몰랐다.

루카스는 숨을 몰아쉬며 신녀를 노려봤다. 그리고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한 도움이었습니다.”

“그런가. 위험해 보이던데.”

“용신의 섬만이 아닌, 천상계를 둘러싼 결계를 모두 해제했군요. 지금 그 힘이 당신의 전력입니까?”

“그래.”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디에소프는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전력은 대단했고, 아마 놈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가 될 겁니다. 그는 상처를 입었고, 이제 분노를 터뜨릴 테니까. 이젠 정말로 이 부유대륙을 추락시키려 들지도 모르겠군요.”

“네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 것 아닌가, 루카스 트로우맨.”

그러자 루카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듯 지껄이는군요.”

“물론 잘 알고 있지. 너에 대해선 몇천 번이고, 몇만 번이고 들었으니까.”

“아리드에게 말입니까?”

“아니. 너의 첫 번째 제자에게.”

“하린… 민하린은, 당신과 대화를 나눌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둘이 얼굴을 마주한 기간은 기껏해야 한 주 정도에 불과하다. 몇천 번은커녕, 몇 번 얘기하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러자 신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섭섭한 말을 해 주는군. 아니면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무슨.”

“벌써 잊었나? 네가 처음으로 거둔 제자를.”

“…….”

무심히 신녀를 바라보던 루카스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떠졌다.

“설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용龍의 근원이 바로 나다. 모든 용족이 나를 시작으로 뻗어 나간 갈래에 불과하지. 그리고 어떤 용족이든 죽음에 이른다면, 비록 시간은 걸릴지라도 차원을 넘고, 우주를 넘어서 결국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하프(Half)였을 텐데.”

신녀는 빙긋 웃었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시선을 마주했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 신녀는,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아, 아하하.”

멋쩍은 듯, 수줍은 웃음은 분명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이런 순간에 재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

“그래도,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그녀는.

도무지 한 집단의 수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렇지만 루카스가 아는 누구보다 멋지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여 준 아이였다.

동시에 그에겐 한恨으로 남은 아이였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지키지 못한 존재였으니까.

“…….”

여유가 없다.

이럴 때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말문이 턱 막힐 정도의 감회에 젖어 들고 말았다.

재회를 생각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고향 우주에 있는 이들과의 재회에 대해 결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된지 알고 있었으니까. 반쯤은 의도적인 회피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카사진을 만나고, 그의 변화를 알게 된 이후엔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더욱 말문이 막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절대자 루카스가 아닌, 대마도사 루카스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였다.

루카스가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베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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