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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73화 (394/857)

외전 173화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당연한 현상이다. 목소리는 루카스 내면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고민이 끝나고 ‘답’이 나온 지금, 목소리가 또다시 들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루카스의 마음의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었을까?’

절대자라면 결코 품어선 안 될 생각이었다.

여태껏 걸어온 길이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든, 스스로가 쌓아 온 삶을 부정하는 건 절대자의 근본을 이루는 신념을 제 손으로 부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

‘…나약한 생각.’

지금 시점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예상이 간다.

전초전에 진입하고 인간의 육체를 갖게 됐다.

식사를 하고, 수면과 휴식을 취하고, 다친 곳에서 피가 나는, 인간의 육체.

이 육체에 존재가 구속되었다. 그리고 옛적에 잃어버린 감정이 되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립고 아련한 향수에 코가 마비되고 뇌리까지 어질해질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진 그게 싫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육체와 정신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가 합일된 초월체야말로 절대자의 상징이고, 완벽함의 산물이었다.

‘…이것마저 군림자들의 안배인가?’

루카스에게 인간 시절의 감상을 떠올리게 만들어 나약함을 깃들게 하고, 그로 인해 짙은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럴 리가.

군림자들이 그를 특별히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들은 루카스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군림자를 위협할 수 있는 건, 같은 군림자뿐. 루카스만 한 절대자는 ‘지배자 등급’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이딴 견제를 할 의미는 하등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부터 루카스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꿈틀—

‘손가락’을 움직인다. 이미 심장은 멈췄다. 반쯤 시체 같은 상황이다.

개의치 않는다.

두뇌가 완전히 박살 나거나, 육체 전부가 사멸하지 않는 이상 몸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다. 아마 내장 대부분이 사라져도 당장은 죽지 않겠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전신이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기절하기 직전, 그는 반쯤 물에 잠겨 있었는데 그 상태로 신녀가 수면을 전부 얼렸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였다.

억지로 몸을 빼내려 했다간 달라붙은 얼음이 피부를 찢을 거다.

화륵—

루카스의 몸에서 미약한 화기가 일렁였다. 화기는 그를 붙잡던 얼음을 빠르게 녹여 나갔다. 반쯤 젖어 있던 옷도 빠르게 증발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생각만큼 잘 움직이지 않는다. ‘육체를 움직인다’기보단, 꼭두각시의 실을 조종하는 듯한 감각이다.

한계를 초월한 감각, 더없이 익숙하다.

“…….”

루카스의 시선이 얼음대지 저편을 향했다.

그곳에 노디에소프가 서 있었다.

손가락을 뻗는다.

치직—

검붉은 빛. 앱솔루트가 꿈틀댔다. 육체가 아닌, 그와 연결된 초월체까지 삐걱대는 게 느껴졌다.

무시하고, 쏘아냈다.

앱솔루트 빔이 노디에소프의 목을 꿰뚫었다.

* * *

흐릿하게,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욱신—

“크…….”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군가 두개골 안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 같다. 육체가 휴식을 호소하고 있다. 조금만 더 쉬게 해 달라고 거센 시위를 벌인다.

억지로 무시한 채, 눈을 떴다.

“…….”

흐릿한 시야 속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건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스승님.”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칵칵칵.”

잔뜩 삼킨 물을 꿀렁꿀렁 뱉어내는 듯한 소리였다.

“칵칵칵칵칵.”

노디에소프의 웃음소리다. 그는 뚫린 목에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개소리도 그쯤 되니, 재밌군.”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뒤, 자신의 목을 한 번 쓰다듬는다.

상처는 치유할 수 없지만, 지혈 정도는 가능하다. 그는 죽은피를 조금 걸러낸 다음 목을 큼큼 풀었다. 고통은 둘째 치고, 발성 기관에 손상이 가서 말하는 게 조금 힘들었다.

“방금 전 그 기술.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 육체 능력으로 사용할 만한 게 아니었다.”

“…….”

“너는 지금 반시체나 다름없어. 그 꼴로 모습을 드러내기에 오히려 함정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군.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훨씬 귀찮아졌을 텐데, 왜 이리 안일하게 움직인 거냐?”

만약 루카스가 모습을 숨긴 채 공격했다면 당분간 그에 대한 경계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노디에소프로선 그런 상황이 몇 배는 더 까다로웠다. 비수란 모습을 감추고 있을 때 비로소 위협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러나 루카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진입한 떨거지들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를 앞에 두고 허세라도 부릴 생각이었나?”

“오늘은 유난히 말이 많군, 노디에소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칵칵… 그야 있지. 비로소 네놈을 죽일 수 있게 되었는데. 눈엣가시 같았던, 네놈을.”

“설레발은 접어 둬라.”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창백한 얼굴에선 이제 짙은 피로까지 느껴졌다.

“그보다 내 경고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는데.”

“경고?”

노디에소프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 지금 당장 천상계에서 꺼지라고 말했나? 그럼 목숨만을 살려 준다고?

“하. 나는 개소리에 일일이 답해 줄 만큼 친절한 성격이 아니야.”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디에소프도 비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왜 이 시점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냐?’

자포자기?

그건 아니다.

창백한 얼굴, 힘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

그에 반해 눈동자만큼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냉정하고, 침착하다. 곤궁에 처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놈도 절대자니 내심을 감추는 건 익숙하겠지만, 일말의 동요도 없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즉, 루카스는 믿는 구석이 있다.

‘재밌군.’

일곱 이빨의 용.

권위를 잃은 군림자는, 노디에소프의 입장에선 실망마저 느낄 정도로 쉬운 상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 존재를 없애고 가장 특별한 조각상을 손에 넣는 건,

갓난아기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쉽다.

물론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취감’이 없었다.

“…흥.”

돌연 든 생각에 노디에소프가 픽 웃었다. 어쩌면 지금의 그 또한 감정적인 면모에 휘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다.

감정이란 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불순물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몸에 나쁜 걸 알면서도 마약을 흡입하는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몸과 정신을 장악한 감정을 통제하지 않았다.

“…그런가. 물러설 생각은 없단 거군.”

루카스는 홀로 무엇을 납득한 건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뻗어 노디에소프를 겨냥했다.

“그럼 약속대로 죽여 주지.”

“…….”

그에게 남은 여력이 거의 없단 것도, 방금 전과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단 것도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순히 허세를 부리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닐 것이다.

노디에소프는 루카스의 공격에 대비했다.

“노디에소프.”

“뭐냐.”

“잠시 찌그러져 있어.”

“…뭐?”

퓻.

루카스의 앞에 마법이 발현했다.

하얀색 빛으로 이루어진 창. 노디에소프는 고개를 틀어 공격을 피했다.

‘뭐지……?’

마법 자체의 수준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낮다. 가장 기초적인 마법. 그러나 일반적인 마법과는 무언가 다르다.

화륵—

뒤이어 주먹만 한 화염이 피어난다. 이것 또한 노디에소프를 향해서 쏘아졌다.

피한다.

그러나 쏘아져 오는 마법엔 끝이 없었다. 종류도 점차 다양해졌고, 위력도 거세지고 있었다.

번개, 대지, 얼음, 어둠, 빛, 그리고 다시 화염.

수십 개의 마법이 동시에 노디에소프를 덮쳤다.

“…이게 네놈의 ‘믿는 구석’이었나?”

그 광경을 바라보며, 노디에소프는 허무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마법과 다르다. 수도 많다. 위력도 강하다.

“하.”

그런데도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딴 게, 고작.

꽈드득.

노디에소프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의 눈가에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넘실거린다.

“너는 정말로, 나를 화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

“이딴 수작질에 무슨 의미가 있단 거냐? 고작해야 시간벌이가 전부인 것을.”

…의미라면 있다.

노디에소프는 이해조차 못 하겠지만.

루카스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노디에소프의 얼굴에 분노가 치솟았다.

실망이 컸고,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이딴 저열한 수단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엿봤단 말인가?

역겨울 정도의 자만이었고, 절대자에 대한 둘도 없는 모욕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영혼을 손에 넣겠다. 내가 전초전에서 승리한다면, 거인께서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주시겠지.”

“…….”

“너와, 너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자들의 영혼을 모두 수거해서 멸망한 우주의 가축들의 몸뚱이에 심어 주마.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영겁을 겪게 만들어 주겠다.”

노디에소프가 외력을 쏘아내자,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마법이 허공에서 스러졌다.

루카스가 예상한 대로다. 아무리 9성의 마법이라고 해도 절대자를 죽이기엔 많은 것이 부족하다. 그러한 단점은 아주 옛날부터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노디에소프는 이 마법 <인피니티 필드>를 단시간에 파훼할 수 없다.

노디에소프는 이미 정답을 말했다.

루카스가 이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두 가지였고, 그중 하나가 바로 ‘시간벌이’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스승, 님.”

“…….”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불신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는 건, 민하린이었다.

“왜 이곳에 오신 건가요?”

“…….”

“여기 계시면 안 돼요. 힘을 쓰시는 건 더 안 되고요. 이, 이곳에 계시면, 저자가 스승님까지…….”

루카스는 말없이 민하린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는 손이 닿을 거리에서 멈춘 다음,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

그 시선이 너무 낯설었다. 민하린은 자신의 몸이 옅게 떨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직후.

단순히 ‘낯설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짜악—!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욱신.

뺨을 아릿하게 만드는 고통에도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입안에서도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불쾌하고도 익숙한, 피맛도 느껴졌다.

찢긴 입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민하린이 텅 빈 눈동자로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스승—”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민하린은 크게 흠칫하고 말았다.

분명 알고 있는 얼굴인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카스가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들.

혐오와 경멸.

그 이상의, 실망.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 물었나? 그걸 묻는 것이냐? 네가?”

“스, 스승님.”

“더 이상 나를 그리 부르지 마라.”

숨이 턱 막힌 것 같다.

민하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내 말이 듣기 어려웠나? 민하린, 나를 스승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루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너희들을 제자로 여기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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