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72화 (393/857)

외전 172화

다섯 명은 동시에 다른 생각을 했다.

첫째로, 세디는 해일이 자신들을 덮치기 전에 노디에소프의 멱을 딸 생각을 했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안은 아니었다. 그와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고, 그녀는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노디에소프가 그 꼴을 두고 볼 리도 없지 않나.

민하린과 리오의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세디보다 훨씬 가능성이 떨어졌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선 1초의 유무가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른다.

아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힘. 루카스는 소통을 그렇게 불렀다. 시도한 적은 없지만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이 재앙도 막아서는 게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힘을 전개해야 되지?

그 누구도 적합한 대처 방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신녀를 뺀다면.

“아이스 에이지.”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녀 주위에 냉기가 폭사되었다.

8성 마법.

광대한 범위는 물론, 위력마저 이론적으로 ‘마도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끝단에 위치해 있다.

9성의 마법이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8성과 9성을 구분 짓는 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나 위력이 아닌 앱솔루트를 다룰 수 있느냐다.

즉, 신녀가 사용한 아이스 에이지는, 충분한 마나만 받쳐준다면 일대의 지형은 물론 기후까지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위력이 실려 있었다.

쩌저저적─!

폭사된 냉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갔다. 부수고, 흩어졌던 얼음 조각이 다시 결합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수면은 새하얀 얼음으로 만든 대지가 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예외는 없었다. 냉기는 놀랍게도 낙하하는 물줄기를 거꾸로 얼려 갔다.

“……!”

민하린은 치켜뜬 눈으로 그 광경을 모두 보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마도학.’

그리고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경지란 말인가?

너무나도 멀고, 아득하다.

“하악…….”

신녀가 거친 숨을 내뱉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녀님!”

“괜찮으십니까?”

흑백술사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으나 그녀를 부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은 노디에소프의 힘을 억제하는데 젖 먹던 여력마저 죄다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노디에소프가 픽하고 웃었다.

“제일 까다로운 존재를 무력화시켰군. 나의 복부를 꿰뚫은 기술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겠지.”

정곡이다.

지금 신녀에겐 앱솔루트를 사용할 여유가 없다.

아이스 에이지에 대부분의 마나를 사용해 버렸다.

‘…섬이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각지에 있는 진陣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1차 해일로 섬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물에 잠겼고, 이제는 얼어붙기까지 했으니 진도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가장 심각한 일은 그게 아니다.

신녀의 시선이 흑술사와 백술사에게 향했다. 그들에게 내린 명령, 루카스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그들은 완수하지 못했다.

루카스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

착각한 게 아닐까? 정말로 죽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아니라면, 진짜 루카스가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 생각을 애써 죽인다. 지금 생각해야 될 건 이 싸움에 대해서다.

어차피 노디에소프와의 전투에서 루카스의 지원을 받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니 ‘전력적인 의미’에서의 손실은 없다.

“…마나 대부분을 쏟아 냈습니다.”

새하얀 냉기를 토해 내며, 신녀가 말을 이었다.

“일대에 있는 바닷물을 대부분 동결시켰죠. 블리자드를 사용했을 때처럼 수면만을 얼린 게 아닙니다. 그 밑에 위치한 해류도 대부분 얼어붙었을 거예요.”

“노디에소프는 더 이상 이 싸움에서 바닷물을 무기로 사용하지 못한단 건가.”

세디의 이해는 빨랐다.

그녀는 신녀 다음으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였다.

“아직 할 만은 하다는 거군.”

주먹을 쥐었다가 편다. 몸은 움직인다. 다른 녀석들은?

민하린의 상태는… 좋지 않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다 혼절해 버렸다.

근육과 골격, 정신력까지. 모두 한계에 맞았다. 더 움직였다간 후유증이 남을 테니 육체가 강제적으로 휴식을 판단했다. 미간의 주름이 꿈틀거리고 있다. 아마 혼절한 지금도 전신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거다.

리오의 상태는 그보다 나았지만, 그래 봤자 앞으로 2~3분 더 버틸 수 있는 정도고.

힐끗 뒤에 있는 아리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아리드가 움찔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아리드의 마음에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다.

세디의 시선은 곧 그에게서 떠났다. 그녀는 목 관절을 풀며 리오에게 말했다.

“이봐, 애송이.”

“예.”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랑 나뿐인 것 같은데,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 작전이고 뭐고 이제 의미가 없거든.”

“…예.”

“내 경험상 죽을 가능성이 압도적인 상황에선 ‘승리’를 보고 싸우는 건 별로더라고.”

리오의 표정이 묘해졌다. 세디가 충고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다. 루카스 이외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아니.’

딱히 그를 인정했다기보다는, 우습게 여기던 존재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란 거겠지.

“그냥 살아남을 생각만 해라. 생존이란 단어만 머릿속에 박아 두란 말이야. 적의 여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내 몸뚱이가 얼마나 버텨 줄지, 지금 상황이 어떤지. 그딴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네, 고맙습니다.”

“…하.”

세디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오와 시선을 한번 교환한 다음,

동시에 노디에소프를 공격했다.

* * *

─노디에소프.

호리호리한 체격에, 여태껏 사용하는 힘은 술법이나 마법과 흡사한 이능에 근접한 권능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리오는 맞붙기 전, 어쩌면 육탄전엔 생각 외로 취약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전혀 아니었다.

세디의 발차기와 리오의 주먹을 동시에 흘린다.

이어지는 연격도 효과가 없다. 손바닥에 기름이라도 칠한 것처럼,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놀랍게도 이 남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양팔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회피나 방어하는 것만이 아니다.

때때로 가하는 공격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로웠다.

대충 비율로 보면 이쪽이 열댓 번 공격할 때, 한 번씩 반격이 날아오는 정도다. 때문에 언뜻 보면 세디나 리오가 격렬한 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리오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다. 상대에게 여유를 주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쏟아 내서 공격하고 있는 거다.

그럼에도 전부 흘려진다.

마치 ‘물’을 상대로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

‘생각하지 말자.’

리오는 암담해지려는 생각들을 애써 없앴다. 세디의 충고 그대로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리오와 달리, 세디는 전혀 다른 감상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싸울 만한 거지?’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싸움다운 양상을 띠게 될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할 여유를 가질 거라곤 더더욱 생각 못했고.

‘이 자식, 아직도 힘을 아껴 두고 있잖아.’

어째서?

그에게 있어선 가장 커다란 위협인 신녀와 루카스.

신녀는 거의 전투 불능이 되었고, 루카스가 참전할 수 없단 사실도 이제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을 아껴 두고 있다.

놈은 대체 어떤 상황을 대비하고 있는 거지?

탓!

리오와 세디의 힘을 역이용하여 흘린다. 찰나 수십 개의 빈틈을 동시에 발견했다.

“…….”

그곳에 외력을 뻗는다면, 꽃의 줄기를 꺾는 것처럼 쉽게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다.

그러지 않는다.

외력에 여유가 없어서? 아니, 결계를 무너뜨리는데 외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용솟음치는 물줄기에 외력을 곁들였다면 신녀의 마법 따위로는 결코 얼릴 수 없었을 거다.

‘…카사진.’

묘한 일이다.

이 섬 어딘가에서 놈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건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희미했다. 그러나 이 경우엔 희미한 게 오히려 그의 발목을 더 붙잡게 되었다.

‘안전한 곳에서 구경만 하다 실리만 챙기겠다는 건가?’

필드에 진입한 순간부터, 모든 절대자는 서로를 적대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맺었던 형식적인 동맹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 것이다.

애초에 전초전의 콘셉트 자체가 사파전四巴戰이었다.

‘여기서 외력을 전부 사용했다간, 카사진에게 당할 수도 있겠어.’

지금 시점에서도 생각한 것보단 더 많은 외력을 사용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카사진의 힘은 상당히 제약되어 있을 게 분명하지만, 그건 노디에소프도 마찬가지. 신녀에게 권능이 구속된 지금이라면, 약해진 카사진도 충분할 만큼의 위협이 된다.

그렇게 판단하고 외력을 아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노디에소프의 성대한 착각이었다.

카사진은 지금 천상계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기척이 느껴지는 건, 단순히 크란의 존재 때문이었다. 기척이 ‘희미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착각은 결과적으로 세디와 리오의 목숨을 연장해 주었고, 싸움을 길게 끌게 되었다.

“…….”

무력감에 치가 떨린다.

세디와 리오는 훌륭히 싸워 나가고 있지만, 이미 패색이 짙게 드리운 게 보였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곧 죽는다.

아리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쑥대밭이 된 용신의 섬. 이곳은 그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었다. 안 가 본 곳이 없고, 어느 지역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곳이 이제는 원형조차 남지 않았다.

기절한 민하린, 만신창이가 된 신녀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를 보았다.

…내가 싸웠다고 볼 수 있나?

목숨을 걸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방관이고, 구경이었다.

‘싫어.’

이러기 싫었다. 함께 싸우고 싶었다.

물론 후방의 지원 또한 중요한 역할이라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모든 이들이 다치고,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중에서 오직 아리드만이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나?

스스로 떳떳하다고 여길 수 있는 건가?

[이 세계에 진입하고 누군가를 죽인 적이 있나?]

루카스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 순간 아리드는 루카스가 질문을 한 의도를 이해했다.

싸우지 않으면 모두 잃는다. 상대를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때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루카스가 말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싸움에서 나약함이란 죄가 된다.

가진바 힘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타고난 성정 또한 마찬가지다.

착하고 상냥하다는 말은 결국 나약하다는 말과 종이 한 장 차이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죽이는 건 용서 받지 못할 패륜 행위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노디에소프를 막지 못해 앞으로 수백만 명이 죽는다면, 과연 그를 죽이지 않은 걸 올바른 행위라고 부를 수 있나? 치솟은 살심을 가라앉힌 게 칭찬받을 일이 되는 건가?

‘…….’

아니다.

그건 결코 아니다.

죽여야 된다.

이 자리에서 노디에소프를 죽여야 된다.

아리드의 마음에 생전 처음으로 살기가 치솟았다. 그건 그 고유의 능력과 어우러져 순간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떨어진다.

몸도, 마음도 어둠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아마 나는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겠지.’

그건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리드가 결심을 마쳤다.

턱-

“……!”

그 순간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가장 먼저 밸런스가 깨진 건 리오였다. 그의 육체는 진작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도약을 하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무릎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리오는 균형을 잃고 얼음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2:1이었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던 거다. 한쪽이 무너진 이상 다른 한쪽도 무너지는 게 수순이다.

빠악!

세디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복부에 손가락이 깊숙이 꽂혔다. 내장이 전부 찢어지는 것 같다. 거칠게 공기를 토해 내며 그대로 굳었다. 전신이 마비되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쿠웅

쓰러졌다. 곧바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지 못했다. 노디에소프가 세디의 얼굴을 짓밟았다.

“스스로가 강해졌다고 생각하나?”

발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거세지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솜털을 가다듬는다고 칼날이 될 수 있겠나? 벌레는 아무리 단련해도 벌레지. 그게 바로 태생적 한계란 거다.”

압력이 점점 강해진다.

두개골이 삐걱대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머리에 못질을 하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었으나, 세디는 이죽거렸다.

이대로라면 머리가 터져서 죽겠군. 참 추한 죽음이야.

“혓바닥이 길구나. 죽여라.”

“…뜻대로 해 주지.”

노디에소프가 그대로 세디의 머리를 으깨려는 순간이다.

파앗!

그 순간 어딘가에서 검붉은 빛이 다시 한번 날아왔다. 반응이 늦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파악!

검붉은 광선이 노디에소프의 목을 꿰뚫었다.

“컥.”

그는 심대한 타격을 입고 비틀거렸다.

압력에서 벗어난 세디가 벌떡 일어난 뒤, 쓰러진 리오를 데리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신녀에게 말했다.

“뭐야. 더 쓸 수 있었으면 진작 썼어야지. 우리가 다 쓰러진 다음에 쓰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러나 신녀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녀의 얼굴 또한 불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가 사용한 게 아닙니다.”

“뭐?”

다시 한번 노디에소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목에 흐르는 핏줄기를 틀어막은 채 부릅뜬 눈으로 어딘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쪽을 경계하고 있지 않다. 마치 그럴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시선을 따라간다.

얼음으로 된 대지에,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남자가 서 있었다.

“노디에소프. 더없이 확실하게 경고하겠다.”

루카스 트로우맨은 유난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천상계에서 꺼져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