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3화
“VP는 20 정도 모았네. 그마이 싸돌아댕긴 것치고는 영……. 니 놀았나?”
“알아듣기 힘든 말투를 쓰는군. 좀 더 정상적으로 말할 수는 없나?”
“엉? 친근감 있고 좋다 아이가?”
신녀가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제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았으니 일곱 이빨의 용이라 불러야 하나.
‘뭐가 됐든 간에.’
루카스가 대답하지 않자 신녀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나마 ‘내’가 젤 사근사근한 편이라가 배려해 준 건디, 어째 태도가 삐딱하다잉?”
“…….”
“표정 보소. 알따. 대신 니도 존댓말 써래이? 카면 내도 말투 바꿔 줄 텡께.”
“알겠습니다.”
루카스가 순순히 다시 존댓말을 사용하자, 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파앗.
미풍이 부는 것처럼, 옷자락과 천이 나긋하게 펄럭였다. 그리고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출렁이는 머리카락이 마치 물드는 것처럼 다른 색으로 바뀌어 간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완연한 청발이 되었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푸른색 머리카락.
“이러면 만족하겠나, 트로우맨.”
차갑지만 어딘가 늠름한 말투. 기억에 있다.
“기절했던 내게 물을 먹인 건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이라. 분리해서 ‘나’를 지칭하는군.”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다.
어떤 근거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한 건가. 그녀에겐 목숨도 빚졌으니, 작은 의문을 풀어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추측이지만, 머리색이 바뀔 때마다 인격도 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마치 다중인격처럼.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건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간단한 개념은 아니지만, 좋을 대로 이해해도 상관은 없다.”
그 말은 루카스의 추측이 빗나갔음을 돌려 말한 것에 가까웠다. 어쩐지 이 점에 대해선 깊게 물어도 들을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럼 다른 질문. 당신은 나를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내가 이 세계에 진입한 이후 가진 생각입니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입니까.”
별것 아닌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그 전부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네가 절대자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
“…당신은 나의 적입니까?”
이 질문엔 무뚝뚝한 신녀가 픽 하고 웃는 기색이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이분법으로 사람을 구분 짓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인데.”
“적도 아군도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나는 너의 목숨을 구해 줬다.”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빚은 언제가 되었든 갚을 생각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 사이의 은원은 비로소 끝난 셈이니까.”
“……?”
루카스는 그 말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아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목숨을 살려 줬으니 아군이다. 그렇게 속단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흠. 그런가. 이거 상처받는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니 딱히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신녀도 딱히 깊게 생각하고 꺼낸 말은 아닌지, 곧 화제를 바꾸었다.
“트로우맨, 이 세계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의미 없는 질문은 아닌 듯하다.
루카스는 여태까지의 경험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 세계에 진입하고서 제법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었다. 위기라 할 만한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일개 전초전이 치러질 장소치고는 과하게 넓고… 또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이곳은 위대한 게임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필드가 아니다.
고작해야 스무 명가량의 참가자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 그런데도 불구하고 웬만한 행성보다 훨씬 거대한 스케일을 가졌다.
크기만 크고 실속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넓은 행성엔 수십억에 가까운 인구가 살아가고 있으며, 각자가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군림자라면 이 모든 것들을 손쉽게 창조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파전四巴戰.
필드에 진입하기 전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실제 전초전을 시작하니 사파전은커녕 다른 군림자와 충돌할 일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것 또한 묘한 점이다.
루카스가 알고 있는 절대자라면 좀 더 격렬하고 알기 쉬운 싸움을 원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먼저 전초전에 대해 들었을 땐 태그매치 따위가 펼쳐질 거라 예상했었다.
“그만큼이나 이해하고 있다면 얘기가 한층 쉽겠군.”
완전한 정답은 아니란 뜻이다.
“벼락협곡, 검은 대지, 자이언트 필드, 천상계, 그리고 초대륙 가이아. 너무나도 다른 개별적인 다섯 개의 세계. 혹시 눈치챘나? 가이아를 제외한 모든 세계가, 군림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벼락협곡은 뇌존.
검은 대지는 마왕.
자이언트 필드는 거인.
천상계는 용.
분명하진 않지만, 그 네 개의 구역 모두가 군림자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위대한 게임. 전초전을 치르고 있는 절대자들조차 그 개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트로우맨, 너를 포함해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루카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진짜 위대한 게임은 어떻게 치러지는지, 이기면 어떻게 되고, 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애초에 승패란 게 어떻게 갈리는지조차.
“머나먼 과거에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두고 군림자 넷의 의견이 모두 어긋났던 적이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
“…그렇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믿기 힘든 일이라 되물었다.
군림자의 독선적인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그들의 대립이 좀 더 잦은 빈도로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 보통은 과반수로 결정이 되거든. 넷 중에 최소한 둘은 의견이 일치하거나, 비슷했다. 그럼 나머지 둘도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지.”
“…….”
“하지만 그 사건은 달랐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안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립은 점점 심해졌지. 만약 우리가 그저 그런 수준의 절대자였다면 싸움을 통해 해결을 봤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는.”
우스운 말처럼 들리지만 저건 확고부동한 진실이다.
군림자들의 힘은 아마 대동소이할 것이다. 아마라는 첨언을 붙인 건, 그들의 잠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자신마저 포함해서.
그런 존재들이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 여파만으로 수천 개 이상의 우주가 가루가 되어 버리겠지.
일단 군림자도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소란을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고, 그때 신이 해결법을 제시했다.”
“해결법?”
“직접 싸울 수 없다면 대리자를 내보내 승패를 결정지으면 될 일이었지.”
“…설마.”
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최초의 위대한 게임이었다. 군림자들의 대립이 한계까지 치달은 순간 열리는 대리자 간의 전쟁.”
“…….”
루카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렇다면… 왜 뇌존은 나에게 위대한 전쟁에 대비하라고 말한 거지?
‘나를 자신의 대리자로 삼아 게임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확실히 그런 기색은 보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군림자에게 의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신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위대한 게임에 참가한 것 자체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군림자에게도 소속되지 않았으니까.
만약 위대한 싸움에서 루카스가 승리한다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모든 군림자가 그의 의견에 따르기라도 한단 건가?
루카스는 의문을 감춘 채 물었다.
“위대한 게임이 열렸다는 건, 이번에도 거대한 ‘사건’이 터졌다는 거군요. 군림자들마저 쉽게 넘길 수 없는 사건. 그건 대체 뭡니까?”
“너는 알 자격이 없다. 말해 줘도 변하는 건 없고.”
오만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루카스도 긍정했다. 군림자들끼리 논의할 정도의 일이라면, 지금의 루카스가 알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불안한 생각은 들었다.
“천상계에 노디에소프가 들어왔다. 지금쯤 용신의 섬의 위치를 찾았을 테고, 곧 내가 쳐 둔 결계를 모두 박살 낸 다음 이 땅에 진입하겠지.”
“……!”
“나는 이 세계에서 힘을 제한받고 있다. 카즈 정도의 반쪽짜리 절대자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상대가 진짜 절대자라면 손쓸 방법이 없어.”
“노디에소프 또한 저처럼 힘을 제약받았을 텐데요. 그 상태라면 지금의 당신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 아닙니까.”
지금의 루카스가 신녀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힘이 제약된 노디에소프도 신녀를 위협할 수 없다.
그러나 신녀는 고개를 저음으로써 루카스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절대자 중 노디에소프만큼은 힘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지금쯤 자이언트 필드에 있을 조각상도 손에 넣었을 것이고, 본래의 힘도 모두 되찾았겠지.”
“그게 무슨……. 어떻게.”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친 건 태양거인이다. 노디에소프가 따르는 군림자. 그에게 어떤 뒷배를 받은 건가?
“네가 생각하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노디에소프의 경우는 특수하지. 그는 참가자를 한 명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전초전에 참가했다.”
“참가자를, 한 명도……?”
“그렇다. 그리고 그건 곧 열릴 본게임에서 아주 커다란 리스크를 짊어진다는 걸 의미하지. 그에 대한 사소한 보상으로, 그는 다른 절대자보다 빨리 이 세계에 진입했고, 조각상의 행방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전초전에 사활을 걸었다는 건가. 장기적으로 보면 미련한 선택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노디에소프의 목적은?”
“명백하지. 너의 죽음과 이곳에 있는 조각상.”
루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노디에소프, 노디에소프가 온다.
카즈 같은 반쪽짜리가 아닌, 완전한 절대자인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러나 루카스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가 절대자로서의 힘을 전부 되찾았다면 이 천상계를 무너뜨리는 건 손쉬운 일일 터. 굳이 직접 찾아와서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있으니까.”
“예?”
“내가 여태껏 노디에소프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천상계를 공격하지 못하게 만든 건 물론, 이 땅에 침입하는 것도 막아 내고 있었지. 용신의 섬에서라면 그나마 힘이 덜 제약되어서 그 정도 억제력은 발휘할 수 있었다.”
“…용신의 섬에서, 라면.”
루카스는 신녀가 꺼낸 말을 재차 반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문이군요. 나를 살리기 위해 용신의 섬을 잠시 떠났었고, 그 틈에 노디에소프는 천상계에 진입한 거였어.”
“지독한 집중력을 가진 남자다. 내가 자리를 비운 건 찰나인데, 그 희미한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었으니까.”
신녀는 예상 못 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다는 용신의 조각상. 그게 바로 ‘가장 특별한 조각상’ 중 하나입니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 하지만 이 섬에 어딘가에 있는 건 맞다.”
“당신의 역할은 뭡니까? 왜 다른 군림자와 달리 전초전에 참가한 겁니까? 아니, 애초에.”
루카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일곱 이빨의 용이 맞기는 한 겁니까?”
“…….”
신녀가 슬그머니 웃는 듯했다. 그리고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인제 보니 그녀는 맨발이었다.
찰박—
물 위를 걷는다. 놀라운 기예는 아니었으나, 루카스는 그녀가 무슨 힘을 이용해 수면을 보행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신녀는 자신을 일곱 이빨의 용이라고 말했다. 단 네 명밖에 없는 군림자.
하지만…….
“내가 군림자로 느껴지지 않나?”
신녀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신비로운 존재인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죠. 나는 당신을 제외한 군림자들을 모두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권능, 쌓아 온 외력, 그것에서 느껴지는 압박감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와 싸우는 데 익숙했다.
그런 루카스조차 처음 군림자를 대면했을 때는 절망감 이외의 것을 느끼지 못했다.
굴복하고 싶다. 의탁하고 싶다.
그 한심한 생각을 떼어 놓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
그렇기 때문에 신녀의 존재에 의구심이 들었다.
힘을 제한받고 있다는 말도 이상하다.
신녀는 군림자다. 삼천세계의 어떤 존재가 감히 그녀의 권능을 제한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일곱 이빨의 용이다.”
신녀가 낮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들이 나를 보면 너와 같은 의문을 품겠지. 그 누구도 나를 군림자로 여기지 않을 거다. 오히려 분개한 채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군. 너처럼 소속이 없는 절대자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그렇겠지.”
일곱 이빨의 용이지만, 일곱 이빨의 용이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루카스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노디에소프와 마주치게 된다면 그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럼 더욱 이해 가지 않습니다. 내 목숨을 살리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왜 나를 구하기 위해 이만한 위험을 부담한 겁니까?”
신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기만 하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겠군. 그럼 한 가지 진실을 얘기해 주자면.”
그녀가 나긋한 어조로 충격적인 말을 입에 담았다.
“군림자, 일곱 이빨의 용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