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5화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죽음의 섬이 태고부터 이토록 황폐한 곳이었던 건 아니다. 그 옛날엔 빼곡한 삼림과 높이 치솟은 산맥, 아름다운 호수가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만들어 냈다. 야생의 섬에 뒤지지 않는 자연이 이곳에 있었다.
자원이 풍부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사방에 넘쳐났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죽음의 섬이 지금보다 덜 위험했던 건 아니다.
기름진 땅엔 생명체의 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아무리 자원이 풍부해도 그 권리와 영역을 두고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짐승이라고 예외는 없다. 오히려 인간보다 훨씬 잔혹하고 비정하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는 용인 중 그 풍경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그렇다.
현 시대의 아룡들은 자식에게 깊은 모성애를 가지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섬의 포식자 중 거의 꼭대기에 위치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자식을 많이 낳지 않았고, 낳았다고 해도 아무 곳에나 방치하기 일쑤였다.
기껏 낳은 알을 부수지는 않았지만, 부화할 때까지 얌전히 지키지도 않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아룡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룡의 알은 먹이사슬 중간쯤에 위치한 포식자들에게 영양 있고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중에선 검치호와 흡사한 생명체도 있었다. 송곳니는 그보다 훨씬 날카롭고 길었고, 덩치도 2배는 컸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흡사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아룡의 알이었다. 단단한 송곳니가 있기 때문에 알의 껍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수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생태계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 검치호가 아룡의 알을 발견했다.
다른 알과는 다르다. 알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예로부터 초록색은 식욕을 떨어뜨리는 색이었다. 육식을 선호하는 검치호도 마찬가지다. 풀이 생각나는 색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룡의 알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검치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별미란 생각이 들어 송곳니부터 들이댔다.
콰직—
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안에서 고소한 액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나 문득, 검치호는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와 맛이 다르다. 짭조름하고, 비린내가 났다. 이것도 검치호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알에서 날 맛은 아니었다.
그 직후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그어어어—!”
포효를 터뜨렸다.
송곳니가 부서졌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검치호가 마신 건 알의 내용물이 아니라, 이빨이 부서지면서 나온 핏물이었던 것이다. 알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검치호는 화가 나서 더 격하게 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이빨로도, 발톱으로도 알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 절벽 위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알은 멀쩡했다.
결국 그 검치호는 알을 먹는 걸 포기했다.
도전자는 검치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흉포하고 거대하며 강한 개체들이 알을 노리고 접근했다. 아룡의 알은 상당히 인기가 많은 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검치호와 같은 결과였다. 알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채, 부서진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쓸쓸히 돌아갔다.
알은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부화하지 않았다. 보통 길어도 3개월이면 부화될 조짐이 보이는데, 이 알은 6개월이 지났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 2년 정도가 지나 어떤 포식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무렵.
알이 부화했다.
용왕 카즈의 탄생이었다.
카즈는 선천적인 포악함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짓밟았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심심풀이로 죽였다. 태어나고 반년도 되지 않은 생명체가 사냥과 살육의 즐거움을 깨우친 것이다.
1년이 지났을 때, 이미 일대는 카즈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그때쯤 카즈는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걸 확신했다.
아룡치고는 기형적일 정도로 작은 체격을 가졌으나, 일대를 주름잡는 지배자조차 카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에겐 무적의 비늘이 있었다.
그 어떤 이빨도, 발톱도. 그의 비늘을 다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승리뿐인 삶이었다. 카즈는 패배를 몰랐다. 몇 번인가 위기에 처한 적은 있었다. 죽음의 섬은 넓었고, 각 지역의 터줏대감들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카즈는 다시 붙으면 자신이 이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비늘엔 싸움을 거듭할수록 흠집이 일고, 금까지 갔으나 며칠 지나면 더욱 단단해진 새 비늘이 돋아났다.
그리고 끝내 카즈는 살아남았다. 오히려 경험과 관록이 붙어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쉴 새 없이 바뀌었다.
강산이 몇 번이고 바뀔 무렵, 선천적으로 단단한 비늘을 가졌던 돌연변이 아룡 한 마리는 용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죽음의 섬에 살던 지성체들, 용인들이 그를 떠받들기 시작했다.
아룡이나 검치호처럼, 본능이 앞서는 짐승들은 격으로 굴복시켰다.
그 상태로 수백 년이 흘렀다.
섬을 제패하고 그만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카즈는 짙은 무료함을 느꼈다.
더 이상 적수가 없다.
용인이나 아룡들을 학살하거나, 깜짝 놀랄 만큼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이는 것에도 질렸다.
그래서 카즈는 섬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맞설 상대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날개를 펼쳤다.
카즈 일생 최악의 인물과 마주친 건, 그가 일대 바다를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 * *
비로소 전의가 사라진 것 같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루카스와 세디다.
루카스가 데리고 온 참가자들 중 가장 강한 두 명이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좋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절대자와 필멸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메꿀 수 없다는 것을.
전략이나 계책, 혹은 천운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루카스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잔여 마나가 불과 500도 남지 않았다.
이 정도면 7성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여력이 다한 것 같지만.]
카즈가 슬며시 운을 뗐다. 그의 눈동자가 사이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뜨거움을 느낀 건 조금 불쾌하군. 그러니 사라져라.]
입을 쩍 벌린 순간, 거의 아무런 전조 없이 용탄이 쏘아졌다.
사찰도를 가루로 만들었을 때보다 더 강한 힘이 실려 있다.
루카스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이상의 대책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확실한 생존을 보장하진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막아선 안 된다.
저 파괴력, 지금의 루카스로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확실히 피할 수는 있나? 점멸 마법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리고 저만한 규모의 용탄이라면, 직격탄을 피해도 그 후폭풍만으로 루카스의 전신을 종잇장처럼 찢어 놓을 것이다.
탓!
그리 생각하는데 세디가 앞에 나섰다. 마치 루카스를 지키듯 뒤에 둔 채로, 두 손바닥을 펼쳐 용탄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꽈릉!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의 기절할 뻔했다.
주륵.
안구의 실핏줄이 터지며 피눈물이 흘렀다.
“세디!”
루카스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디는 방어에 급급해서 대답하지 못했다. 손바닥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그대로 쓸려나간다.
‘망할.’
이곳에서 악기를 수급하며 제법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절대자를 상대로는 힘들다는 건가.
루카스는 세디의 방어를 잠자코 지켜보지 않았다. 얼마 없는 마나를 짜내서, 공격을 강행했다.
파파팟!
수십 개의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다. 모두 3성 마법이다. 그 이상은 마나가 받쳐주지 않아 사용하기 힘들다.
일전에 고룡을 토벌했을 때와 같은 수법.
다양한 속성마법으로 동시에 공격해서, 어떤 속성에 취약한지 알아내야 된다.
꽈과광!
마법이 카즈에게 작렬했다. 효과가 있을 리는 없다.
기껏해야 3성 마법으로 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분석한다. 아주 작은 흠이라도 상관없다. 약점만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실낱만큼이라도 생긴다.
[…확신했다. 그건 술법이 아니군.]
그러나 카즈의 전신엔 아무런 흠도 없었다.
전혀, 아주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는 건가?
루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한 방어란 있을 수 없다.’
그 사실은 알고 있다.
비늘이 절대방어에 근접한 내구를 가지고 있다면, 비늘이 보호하지 않는 부분을 노리면 된다.
안구, 항문, 사타구니, 입. …그런 곳에 마법을 욱여넣는다면.
그리하여 안쪽에서부터 데미지를 준다면…….
하지만 그런 급소에 정확히 공격을 맞추려면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연산’할 수는 있다.
지금도 루카스의 머리는 해당 방법을 해내기 위한 대안을 세 가지 정도 떠올렸다.
다만…….
‘마나가 부족하다.’
결국 돌고 돌아서 이른 결론은 같았다.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파고들 부분이 있다면 카즈의 자만심이다. 그는 자신의 방어력에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세디.”
“…어.”
세디가 눈가의 피를 쓱 닦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상태도 정상적이지는 않다. 무리를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놈의 입을 공격해.”
“입?”
“그래.”
“…과연.”
세디는 루카스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바깥 쪽에선 공략이 불가능하니 안쪽을 노린다…….
하지만 의문도 들었다.
“…저놈, 자만심이 들끓지만 경험이 부족한 건 아니야. 아마 그곳이 몇 안 되는 약점이란 건 인지하고 있을 텐데. 게다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소용이 없고.”
“입술 근처엔 비늘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다른 곳에 비하면 방어력이 낮을 거다. 이빨도 비늘만큼이나 단단하지는 않을 거고. 주먹을 꽂은 동시에, 그곳을 통해 대량의 악기를 밀어 넣으면…….”
“풍선처럼 몸이 부풀어 오르겠군.”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세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제 와서 노릴 건 그 정도밖에 없나.”
악기는 아직까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몸뚱이가 문제다.
육체 피로도가 거의 한계다.
이 이상 혹사시키면, 그녀의 나약한 몸뚱이는 그대로 붕괴할 것이다. 아무리 엔진이 좋아도 그걸 받쳐주는 본체가 튼실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다.
이만한 악기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필멸자의 육체로 소화하기 힘들었다.
‘정말 불편한 몸이라니까.’
투정은 여기까지.
세디가 집중력을 높였다.
“지금.”
루카스의 중얼거림이 신호가 되었다. 세디가 다시 한 번 카즈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거냐.]
그는 슬슬 흥미가 떨어지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세디의 주먹이 보인다. 입을 노리는 건가? 아둔하고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그냥 맞아 줘도 되지만, 눈빛을 보니 이 공격에 사활을 걸었다.
혹시 모르니 막도록 할까. 팔 하나로 충분…….
콱!
[……!]
그 순간 양팔이 무언가에 붙잡혔다. 카즈의 시선이 힐끗 밑을 향했다. 지면이 쑥 솟아올라 그의 양팔을 구속하고 있었다.
털어내는 것쯤은 간단하지만, 약간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빠악!
세디의 주먹이 카즈의 입에 정확히 꽂혔다.
이건 감촉이 있다.
세디가 꽂아 넣은 주먹에 힘을 줬다.
“처먹어라! 역겨운 자식……!”
콰과과곽—!
악기가 카즈의 입을 통해 식도를 타고 내장까지 흘러들어갔다.
카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 윽, 억…….]
괴이한 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쯤 루카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마나고갈 현상, 겪는 건 수백 년 만이다.
먹혀들어야 된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효과는 있었으면 한다.
만약 이 수단까지 먹혀들지 않는다면 승산은 전혀 없으니까.
그때 카즈의 움직임이 뚝 멈추더니.
[…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본 순간,
루카스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악기를 내장까지 욱여넣었을 텐데.”
[그건 실수한 거다.]
“뭐라고?”
[왜 이곳이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게 됐는지 알고 있나?]
알 리가 없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나 카즈는 듣는 이의 의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과거 이곳에서 커다란 싸움이 있었다. 이 천상계에서 유일하게 나와 견줄 수 있는 존재였지. 내 인생 유일의 완패完敗. 다시 싸워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던 건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그딴 게 섬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상관있지. 그 싸움의 여파로 이 섬의 생명체 대부분이 죽었으니까.]
“뭐……?”
아니, 잠깐.
세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현듯 스친 생각 때문이다.
그의 비늘에만 신경이 쓰여서, 마땅히 생각했어야 될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죽음의 섬 중부지역,
가장 짙은 악기가 존재하는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용왕의 거주지가 아니었던가.
[나의 반려자여. 네가 다루는 악기는.]
카즈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후, 그의 전신에서 악기가 치솟았다.
[내게 있어서도 익숙한 힘이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