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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52화 (373/857)

외전 152화

“많이 수척해 보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거든.”

“아하. 힘이 제약된 상태구나.”

“그래, 세디. 넌 나랑 비슷한 시기에 진입했을 텐데, 그동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구나.”

“말이 좀 이상하다? 다른 녀석들도 우리랑 같이 진입하지 않았어?”

“진입은 했지만 그 시기엔 차이가 있어. 너는 튜토리얼을 10단계까지 완수했겠지?”

“그야 뭐.”

“완수 단계에 따라 진입 시기에 차이가 나더군. 제일 늦은 게 너랑 나. 다른 자들은 우리보다 최소 몇 년은 빨리 진입했고.”

“아. 그렇군. …그런데.”

세디는 흥미 없는 얼굴로 대충 대답하더니, 옆에서 무릎 꿇은 채로 오들오들 떠는 판나타를 내려다봤다.

히죽. 그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지어졌다.

“야.”

“예, 옙…….”

판나타가 고개를 들며 대답하자, 만신창이가 된 얼굴이 드러났다.

세디는 그를 깊게 책망하지 않았다. 안면에 주먹 한 대를 꽂아 넣은 게 전부다. 일단 판나타의 얼굴이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철저하게 힘 조절을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파, 판나타입니다, 여신님.”

“그으래애?”

실실 웃던 세디가 판나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 저 얼간이가 무슨 실수 하지 않았어?”

“실수?”

“그래. 가령 주제도 모르고 아버지를 모욕했다거나. 아까 보니까 재밌는 말을 많이 하던데.”

어리숙하다거나. 멍청하다거나.

우득.

세디가 손 관절을 의도적으로 풀며 그리 말했다. 그에 따라 판나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그가 황급히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권위적인 태도로 루카스를 내려다보더니, 지금은 덫에 걸린 초식동물보다 가련한 눈동자로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 태도에 딱히 측은지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판나타를 몰아세운다고 득 될 것도 없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었어. 그러니까 겁주는 건 그만둬.”

“들었지? 야, 너 운 좋았다?”

세디가 밝게 웃으며 판나타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녀는 어딘가 기분이 고조되어 보였다. 루카스와 재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음의 섬에 있는 악기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한동안 웃어대던 세디가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갈까. 우리 집이 괜찮겠어.”

“집?”

“응.”

그리 말하며 세디가 작은 손을 쑥 내밀었다. 잡으라는 건가? 루카스가 손을 포개는 순간이었다.

콰앙!

“……!”

세디가 지면을 걷어차며 하늘 높이 비상했다. 거의 수백 미터는 치솟은 듯하다. 세디는 루카스의 팔을 붙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윽고 바위산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꼭대기가 내 집이야.”

루카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세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한 번 낙하하여 바위산 꼭대기에 안착했다.

“어때? 이 삭막한 땅에서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표정이 왜 그래?”

“…지금은, 내가 인간의 몸이라서. 도약하기 전에, 할 거라고 말해 주면, 좋았을 거야.”

심한 현기증이 났고 속이 진탕 뒤집혀서 토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마나까지 쏟아냈다. 어쩔 수 없었다. 대비가 늦었다면 갑작스런 도약 및 낙하에 의한 충격으로 내장에 막대한 손상을 입고 토혈했을 것이다.

세디는 잠시 멍하니 루카스를 보더니 이윽고 킥킥 웃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약해졌나 보네!”

“…….”

루카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속을 추스른 뒤, 주변을 둘러봤다.

바위산의 꼭대기. 황량한 곳이지만, 과연 누군가 머문 듯한 흔적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쪼그라든, 열댓 개 정도 쌓여 있는 무슨 거대한 주머니 같은 것이었다.

“저건 뭐냐?”

“내 침대.”

“뭘로 만들었지?”

“고룡 심장. 악기를 죄다 흡수하니까 저렇게 쪼그라들더라. 그래도 이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선 제일 푹신해.”

세디는 그리 말하며 고룡 심장 침대에 엉덩이를 붙인 다음 통통 몸을 들썩거렸다. 저런 모습만 보면 참 그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이 바위산 꼭대기에서 제법 오래 머문 듯하구나.”

“근방에선 그나마 주변이 잘 보이는 장소잖아.”

“왜 이동하지 않았나?”

“응?”

“네 성격이라면 한곳에 머무는 것보다 직접 움직이면서 나를 찾을 거라 생각했다.”

그 말에 세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멋대로 움직이면 아버지가 날 찾아오기 힘들 거 아니야.”

첫 만남 때의 세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특한 발언이었다.

루카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군.”

“…….”

세디는 뒤늦게 자신이 한 발언의 진의를 깨달았다.

이래서야 마치 미아가 된 꼬맹이가 괜히 돌아다니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 꼴이 아닌가.

아니,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수긍하기엔 전 절대자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야 뭐. 엇갈리기라도 했으면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적절한 판단이었어. 잘했다.”

루카스는 그리 말하며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건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겉보기엔 열다섯 정도 먹은 귀여운 소녀로 보이지만, 속은 루카스와 같은 격을 가졌던 절대자인 것이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딸을 자처하고 있기는 해도, 그 경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건 그가 요즘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주 보여 주는 행동 중 하나다.

딸에게 그래도 되는 걸까?

애초에 제자와 딸은 어떤 식으로 구분해야 되는 거지?

루카스는 그간 쌓아 온 수많은 경험과 영겁의 세월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거기에 전 절대자 출신을 딸로 삼았을 때의 올바른 대응 방식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절대자란 존재는 대부분이 고고하여, 그 가장 밑단에 위치한 ‘대리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절대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상대가 군림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여긴 악기가 가득한 곳이잖아. 나로선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느낌이 들지.”

세디가 손을 주억거리며 대답하며 루카스를 힐끗 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버지는 꼴이 말이 아니네.”

“제한을 많이 받았으니까. 거기에 죽음의 섬에 와서도 온갖 고생은 다했고.”

“죽음의 섬?”

“이 섬의 이름이다.”

그러자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뭐야. 여기 섬이었어? 그런 것치고는 사이즈가 터무니없던데.”

“행성 자체가 큰 편인 것 같더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부유대륙, 천상계라는 곳인데…….”

루카스는 이 필드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천상계만이 아닌 검은 대지, 자이언트 필드, 벼락협곡, 초대륙 가이아까지.

거기에 지금까지 있었던 대략적인 일들을 말해 주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가장 특별한 조각상을 구하는 게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서 챔피언십에 출전해야 된다는 것까지.

“챔피언십?”

“그곳에 크란이 나올 거다.”

“흐응. 그 인간이…….”

“지금 우리 중에선 그를 확실히 이길 만한 존재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군.”

세디는 죽음의 섬에서 진득한 악기를 흡수하는 것으로, 자신의 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지금 그녀라면 크란을 상대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들어.”

“어떤 점이?”

“용신의 섬이라고 했던가. 뭐 그리 대단한 섬이라고 출입을 통제한다는 건데? 뭐 전쟁하자고 쳐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말인데.”

세디가 특유의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그냥 우리—”

“막무가내로 신녀의 섬에 돌입해서, 조각상이 진품인지만 확인하고 오자?”

세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아? 챔피언십인지 뭔지, 그딴 걸로 시간 안 끌어도 되고.”

효율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렇겠지만,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출입이 제한된 성역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세디는 납득하지 않을 테니, 보다 직관적인 이유를 댔다.

“신녀의 힘이 미지수다.”

“하. 기껏해야 필드에 준비된 꼭두각시일 텐데, 지금의 나보다 강할 리 없잖아.”

“속단할 수는 없지.”

“…그건 나를 못 믿는다는 거야?”

세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루카스는 침묵했다. 세디의 강함을 의심한다기보단, 신녀가 가진 힘이 미지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얽힌 전설들과 천상계 전체를 아우르는 영향력, 아리드에게 들은 말로 예상하자면, 최소 지금의 세디의 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디는 루카스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코웃음을 쳤다.

“약해져서 신중함이 늘어난 건 알겠는데, 내가 합류하면 그런 걱정 필요 없어. 때로는 막무가내로 들이박아야 될 때가 있는 법이라고. 그리고 만에 하나의 사태가 일어나도, 내가 아버지를 지켜 줄 테니까.”

마지막은 얄미운 목소리를 의도하며 그리 말한다.

아마 루카스의 색다른 반응을 기대하는 듯했지만, 애초에 루카스가 그녀를 찾아온 목적 중 하나였으므로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부턴 네가 날 좀 지켜 줘야겠다.”

“…그런 태도로 말하니까 되게 재미없네.”

흥미가 사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침대에 몸을 눕힌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물을 구하기 힘든 곳이라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텐데 그녀의 머리카락엔 윤기가 흘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경지를 높일수록 전신에서 배출되는 노폐물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으니까.

“이 근처에 있는 용인들 말이야. 나를 여신이라 부르면서 칭송해. 재밌지? 큭큭. 내 본질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녀는 일찍이 죽음을 뿌리던 절대자였다. 여신이라는 거룩한 이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고룡 몇 마리를 잡았거든. 기력도 보충할 겸해서. 보다시피 난 심장 말고는 딱히 필요한 게 없어. 썩어 가는 고깃덩이를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는데, 무슨 신의 은총이라나.”

그제야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즉, 세디가 그들의 위에 서서 군림한다기보단, 그들이 세디를 멋대로 떠받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루카스가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까지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리오뿐인가.”

“음?”

세디가 반쯤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그놈부터 찾고 나한테 마지막에 오지 그랬어. 어차피 난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무리해서 올 필요 있었나?”

“네가 제일 위험해.”

“응?”

잘못 들은 것처럼 눈을 깜박거린다.

“아리드는 이 섬에 절대자가 있다더군.”

“……!”

세디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상체를 일으키며, 한껏 신중해진 얼굴로 물었다.

“누군데?”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어.”

“음… 그런데 그 녀석들도 힘을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 아니야? 지금 아버지가 나보다 약한 것처럼, 그놈들도 약해져 있을 거 아니야.”

“희망적으로 관측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 세계엔 그러한 제한들을 풀기 위한 아이템들이 수도 없이 배치되어 있어. 운과 노력만 따른다면 단기간 내에 본신의 힘을 되찾을 확률도 분명 존재한다.”

“…….”

그건 맞다.

세디는 내심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곳에서 악기를 흡수하면서 상당히 강해졌지만, 그래 봤자 필멸자의 틀 안이다.

그녀 또한 절대자의 위치에 섰으니,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지금 힘으로는 그놈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레피트, 카사진, 노디에소프. 그들 모두 세디가 전성기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던 자들 아닌가.

실제로 카사진에겐 참패하기까지 했고.

‘쳇.’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무튼 반응을 보니 그들을 만나진 않은 듯하군.”

“맞아. 한 명도 보지 못했어. 그 밖에 귀찮은 놈은 있었지만.”

“귀찮은 놈?”

“용왕이라는 놈이야.”

용왕.

아까 판나타에게 들었던 존재다.

죽음의 섬의 지배자라고 했던가.

“어떤 존재지?”

“정신이 나간 놈이야.”

“어떤 의미에서?”

“날 꼬셨어.”

“…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루카스가 멍하니 반문했다.

세디는 역겹다는 듯 내뱉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구혼했다고.”

“…….”

그 발언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루카스는 생각보다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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