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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45화 (366/857)

외전 145화

화르륵.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꽃이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이미 탔거나, 혹은 타오르는 것밖에 없는 곳에서 이종학만이 유일하게 멀쩡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그의 몸을 휘감은 불길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지만, 이종학의 육체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둘째로, 사방을 뒤덮은 불꽃은 전혀 주변을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 화마라면 하늘마저 주황빛으로 물들여야 될 텐데도.

그리고 마지막, 사실 이게 결정적이다.

이종학은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는 것조차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꾸었으니까.

끄아아아—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형상이 보였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은 듯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종학의 어머니였다.

아, 으, 아, 아…….

그녀가 비통한 얼굴로 이종학을 노려보았다.

반쯤 녹아내린 눈동자에선 원망과 적의가 넘실거렸다.

알고 있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도.

어머니가 그에게 저런 감정을 보낼 리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숨이 턱 막혔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났고, 손발이 저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백, 수천 번을 꿨던 꿈에서, 이종학이 취한 행동은 언제나 같았다.

그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져, 진물이 터질 때까지 손을 휘저었다.

끄아아아—

다시 한 번 비명 소리가 이종학의 가슴속을 할퀴었다.

* * *

“멋진 경기였다.”

“…아.”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민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이종학이다. 그녀는 피딱지 때문에 굳어 버린 붕대를 갈며, 싱겁게 웃었다.

“이종학 씨도 빈말을 할 줄 아네요.”

“빈말?”

이종학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경기였으니까요. 멋지단 단어랑 어울리지 않단 것쯤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아요.”

개최식 이튿날 벌어진 민하린의 첫 번째 경기.

민하린은 긴장하지 않았다.

챔피언십 첫 번째 매치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그런 절호의 상태에서 싸웠는데도 쉽게 이기지 못했다.

무려 세 시간에 걸쳐 접전을 펼쳤고, 종이 한 장 차이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전신에 있는 기력이란 기력은 죄다 쏟아 낸 기분이었다.

승부가 끝나고 그녀는 거의 기절하듯 쓰러졌고, 이틀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다행히 치열했던 경기 내용에 비해 큰 상처는 없었다. 피 튀기는 혈전이 아닌 체력 승부의 양상을 띠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민하린은 지금도 이따금 생각한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약했다면.

혹은 시합 도중에 한 번이라도 의아한 판단을 내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 승자와 패자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깔끔하진 않았지. 하지만 스스로의 승부를 함부로 폄하해선 안 돼. 그건 목숨 걸고 싸운 상대에게도 모욕을 주는 것이니.”

민하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종학이 아차, 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이건 주제넘은 발언이었군. 잊어다오.”

“아뇨.”

민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맞아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종학의 말이 맞았다.

그 대결을 형편없다고 여기는 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민하린은 그 싸움에서 많은 부산물을 얻었지 않나.

루카스의 말이 맞았다.

두 번 하라면 흉내조차 못 낼 처절한 싸움이었지만, 민하린은 막대한 경험치와 몇 가지 깨달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오늘 대결 봤어요. 이종학 씨도 강해진 것 같던데요.”

“미약한 증진이지.”

“…….”

민하린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간 사륵, 하며 붕대 감는 소리만이 들렸다.

질끈.

왼팔 붕대에 매듭을 묶으며 민하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크란의 경기도 있었죠.”

“그래.”

“봤나요?”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봤지.”

“그럼 상대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고 있겠네요.”

“그래.”

크란은 자신의 이명이 어떤 의미인지, 관중 앞에서 완벽하게 증명해 냈다.

일격一擊, 일살一殺.

섬광이 번뜩였고, 목이 날아갔다.

불과 콤마 몇 초도 되지 않는 사이 승부가 났다.

민하린은 욱신거리는 상처의 고통도 잊은 채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크란의 상대에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민하린도 저 투사처럼 목이 달아나고, 즉사했을 테지.

그러니 민하린은 이종학에게 기권을 권하고 싶었다.

‘…아직은.’

아직은 시간에 여유가 있다.

이종학과 크란이 싸우는 건, 둘 다 두 번의 경기를 더 치른 이후다.

일정표를 보니 아직 2주 더 되는 시간이 남아 있다.

혹시 모른다.

그 전에 이종학이 눈에 띄게 강해지거나 혹은 크란의 공략법을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루카스가 돌아올지도.

그러니 민하린은 속내를 삼켰다.

이종학도 이종학이지만, 지금은 그녀 자신을 걱정할 때였다.

“상처는 어떻지?”

“조금 욱신거려도 많이 나아졌어요. 다음 경기 전까진 어떻게 될 것 같네요.”

민하린이 붕대를 칭칭 감은 왼팔을 보며 대답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어느 정도 치료를 마쳤다지만, 당연히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당분간 움직임을 삼가고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챔피언십은 이미 시작됐다. 여기까지 왔다면 더 이상 엄살은 통하지 않는다.

설령 이보다 심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무기를 쥘 여력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연전을 거듭한 건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 때문에 챔피언십은 날을 거듭할수록 처절한 양상으로 변해 간다.

수백 년 전에 치러진 어떤 결승전에선, 사지가 각각 둘밖에 남지 않은 진출자들이 우승을 놓고 싸웠다고 한다.

“몸 상태가 호전되면 나중에 한번 싸워 줄 수 있겠나?”

“네? 이종학 씨랑, 제가요?”

“그래.”

이종학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모의전 개념으로.”

“좋아요.”

민하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뭐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바로 시작해요.”

* * *

챔피언십이 시작되고, 민하린에겐 딱 두 가지 날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경기가 있는 날과 경기를 준비하는 날.

그리 단순하게 분류했기 때문일까.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

칼날이 춤을 추듯 유려하게 흔들린다. 특유의 완만한 움직임이 시선을 교란한다.

매화검법梅花劍法이다.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얼마 전의 민하린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쐐액!

느릿하게 움직이던 칼날이 순식간에 기세를 바꾸며 덮쳐 왔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평정심은 유지하되, 눈에는 힘을 빼지 않는다.

검로劍路가 보인다.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

까앙!

힘 대결은 승산이 없다.

민하린은 검격을 반쯤 흘러내며 화염 마법을 쏘아냈다.

화륵!

약 1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장기전, 상대의 집중력도 많이 소모되었을 터. 제대로 허점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불시에 들이닥친 화염을 가볍게 피해 냈다.

“칫.”

민하린이 약하게 혀를 차며 다음 공격 수단을 생각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리 말하며 먼저 검을 늘어뜨리니, 민하린도 그 이상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막 몸이 달아오르던 찰나라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녀와 달리, 이종학에겐 내일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경기가.

“솔직히 말해서.”

이종학이 어딘가 감개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젠 너를 상대로 필승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군.”

“…….”

그게 둘러말한 칭찬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민하린도 새삼 감회가 깊었다.

모든 사냥꾼이 우러러보던 영웅, 인룡 이종학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리다 툭 말했다.

“종학 오빠 덕분이죠.”

챔피언십이 시작하고 2주가량 지났고, 그간 이종학과의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다.

그가 여러 방면에서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단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 모의전만 해도 그렇다.

이종학은 교전 중에도 민하린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그녀는 챔피언십에서 3연승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중 쉬운 승부라 할 만한 건 한 번도 없었다. 상대했던 이들 모두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

그럼에도 민하린은 패배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운이다.

민하린의 대진표는 누군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만만한 적은 하나도 없었지만, 달리 말하면 도무지 승산이 보이지 않는 강적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점차 강해지는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 되었다.

만약 대진 순서가 조금만 비틀어져 있었더라면, 가령 3회전의 상대를 1회전이나 2회전에서 만났다면… 아마 민하린은 조기 탈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는 일을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결국 그녀는 이겼고, 살아남았다.

그로 인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제 한 번.

딱 한 번만 더 이기면, 4강에 진출하게 된다.

그건 이종학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경기요.”

“음.”

“기권하는 게 어떨까요.”

민하린으로선 정말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요 2주간 크란을 보고, 이종학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 터져라 궁리했고, 끝내 나온 결론이 이것이다.

“위험해지면 기권한다고 말했잖아.”

“그냥 아예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제야 이종학은 민하린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내가 그의 일격조차 못 버티고 죽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가.”

“…….”

속내를 정확히 읽혔다.

민하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버틸 자신 있어요?”

그녀는 투기장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경기를 관람하며 분석했지만, 크란의 경기를 볼 땐 특히나 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혹시 모를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크란의 경기는 볼 때마다 충격과 경악, 그리고 찬탄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기는…….

“어제 있었던 경기요. 크란의 상대는 대도시 [티크리트]의 챔피언이었어요.”

“주니발. 뛰어난 투사였지.”

“네. 크란의 일격에 전신이 으깨지기 전까진 그랬죠.”

주니발의 시체는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짓밟힌 것처럼 보였다.

피와 살점, 내장이 끈적하게 뒤엉켜 원래 형상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주니발은 약한 투사가 아니었다.

지금의 민하린, 이종학에게도 밀리지 않는 강자였고, 대도시의 챔피언 자리를 차지할 만한 역량은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관중은 주니발이야말로 크란의 선공을 버텨낼 거라 크게 기대했었다.

헛된 기대였다.

그는 아마 자신의 죽음조차 깨닫지 못한 채 핏물이 되었을 거다.

“…솔직히 말하마. 나는 항복할 생각이 없어.”

“이유는요?”

“그도 내게 항복을 권고했었지.”

민하린의 눈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그랬죠.”

“그게 이유다.”

“…크란이 오빠를 무시했으니까? 자존심에 흠집이라도 났단 거예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쏘아붙이는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그게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이종학은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런 미련한 이유 때문이 아니야. 그는 조종당하고 있다고 했지. 그럼에도 내게 항복하라고 경고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겠나?”

다행히 민하린의 머리는 비상한 편에 속했다.

“…완전히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

이종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야. 나는 예전에 그가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때도 엄청나게 강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지. 지금 그의 힘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

“성장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는 튜토리얼을 10단계까지 클리어했을 게 분명해. 즉, 이 세계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단 거지. 투기장에 출현한 시기를 계산해 보면, 성장을 도모할 시간은 거의 없었을 거다. 그래서 한 가지 가정을 해 봤지.”

“가정이라면…….”

“시작과 동시에 선보이는 첫 일격이야말로 그의 필살기가 아닐까?”

민하린이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되물었다.

“네?”

“말 그대로. 첫 번째 일격에 힘과 기력 대부분을 쏟아내는 거지. 시작과 동시에 상대를 끝장내는 걸 최우선 목표로, 다소 육체에 부담이 가도 무리해서 말이야. 이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그의 무위는 범접조차 못 할 수준까진 아니란 게 입증되지.”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굳이 선공필살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것도 추측이지만, 정신 조종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싸움이 오래 지속되면 세뇌가 깨질 위험이 있다… 고 가정하면, 그럭저럭 앞뒤가 맞는데.”

“…….”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추측이다.

아니, 상당히 확률이 높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만약 추측이 틀렸다면.

크란의 첫 일격이 전심전력을 다한 게 아닌, 평범한 일격에 불과하다면.

악마왕이 그를 납치해 모종의 방법을 통해 강하게 만든 것이라면…….

“아까 그의 선공에 버틸 자신이 있냐고 대답했지. 물론 있다.”

“…….”

이종학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죽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기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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