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4화
“어처구니없군. 너, 싸우기도 전에 그딴 말을 입에 담는 거냐?”
싸늘하게 쏘아붙인 건 이종학이 아닌, 그의 옆에 서 있던 용인이었다.
바빌론의 챔피언인 ‘신즈’. 서열상으로만 따지면 이종학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 있는 투사.
용인치고는 작은 체격을 가진 남자였으나,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네놈도 투사라면 모르지는 않겠지. 상대에게 기권을 종용하는 게 얼마나 모욕적인 행위인지.”
“…….”
그러나 크란은 신즈에겐 관심 없다는 듯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무례한 태도에 신즈가 쌍심지를 돋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즈, 그만 괜찮습니다.”
이종학이 차분하게 신즈를 만류했다.
“괜찮겠나? 저 남자는 자네의 긍지를 더럽혔어.”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서 입씨름한다고 해결될 건 없지 않습니까. 투사는 혓바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고, 이곳은 투기장입니다. 그와 나는 얼마 안 가 검을 맞부딪치게 될 것이고요.”
이종학의 시선이 크란에게 향했다.
“모욕은 그때 가서 갚아도 충분합니다.”
“…흠.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신즈는 불쾌함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기색이었으나, 억지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학은 크란을 바라보았다.
“나는 기권하지 않을 겁니다.”
“…….”
그 말에 크란은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극히 찰나였다.
그가 곧 흥미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 *
경기 순서가 모두 정해졌다.
민하린이 주목하는 인물만 간추려서 설명하자면,
A그룹엔 민하린과 신즈.
B그룹엔 바르간과 샴바르.
C그룹엔 크란과 이종학이 속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경기는 내일부터 시작되지만, 오늘 행사가 모두 끝난 건 아니다. 아직 시시콜콜한 이벤트들이 몇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인기투표의 결과 발표였다.
투표는 챔피언십 개최 수개월 전부터 진행되었고 참가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투쟁의 섬에 머물고 있는 이라면 누구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집계하는 데만 한 달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듯하다.
그리하여 최다 득표를 얻은 10명의 챔피언, 현 시점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영웅들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끝자락인 10위에 등재된 것은 다름 아닌 이종학이었다.
그는 투사치고는 절제된 태도를 겸비하고 있었고, 경기에서 독특한 전투방식을 많이 선보였다. 그런 점들을 신선함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많아 외부인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팬층이 두터웠다.
7위는 크란이었다. 실력에 비하면 생각보다 다소 짠 순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투사로 이름을 올린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상승세였다.
3위는 이종학과 같은 바빌론 투기장 출신 챔피언 신즈다.
그는 왜소한 체구와 달리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광견狂犬 같은 면모를 보였다. 그러한 모습이 관중의 피를 들끓게 만든 건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1위는 샴바르였다.
당연한 결과였기에 모두 수긍했다.
그는 실력만이 아닌, 인기 면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샴바르가 단상 가장 높은 곳에 섰다.
“나, 아카드의 투사 샴바르는 이곳에 모인 64명의 영웅을 대표해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그가 관중석에 앉은 자들과, 투기장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챔피언들.
그 모두를 시야에 담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투사의 혼과 긍지에 부끄럽지 않은 승부를 펼칠 것을. 칼날에 묻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망각하지 않을 것을.”
밑에 선 챔피언들은 샴바르의 말을 재차 입에 담았고, 아까와 달리 조용한 갈채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민하린은 비로소 챔피언십이 정말 개최되었음을 실감했다.
* * *
그날 일정이 모두 끝났을 때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바르간 씨.”
민하린은 챔피언들 사이에 섞여 돌아가던 바르간을 불러 세웠다.
“부르셨소?”
빙글 몸을 돌리며 바르간이 대답했다.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니,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의 외면이 극명한 변화를 겪게 된 건 아니었다.
바르간은 기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캉키의 기갑인 [카메슈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주변 용인들을 내려다볼 만큼 크고 높은 거체는 아니었다.
카메슈의 신념은 바르간의 몸에 딱 알맞은 형태로 축소되어 있었다.
이것이 루카스가 네크두에게 말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기갑의 핵심적인 부품만을 빼내서 재조립한 것이다. 본체에 비하면 출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사용자의 수준을 폭발적으로 높여 주는 기능이 달려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카메슈의 신념:改]라고 해야 될까.
기존 기갑도 완전히 해체하진 않았다. 비록 껍데기만 남았지만, 언제라도 기동할 수 있도록 리루아에 잘 보관되어 있다.
본체엔 최소한의 기능만이 남았지만 당장 처분할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는 대외적인 활동을 대비해 캉키의 신분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B조에 편성되셨죠?”
“그렇소. 당신은 A조였던가?”
“네. 일단 당분간은 서로 부딪치지 않겠네요.”
그리 말한 다음 동시에 웃었지만 억지 미소에 가까웠다.
A조에는 신즈가, B조에는 샴바르가 있다.
둘 모두 뛰어난 장비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그나마 대진이 비교적 뒤쪽으로 미뤄져 있단 것 정도.
“아.”
민하린의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 향했다.
“이종… 리 하오 씨.”
“…….”
“잠깐 얘기 좀 하죠.”
막 바빌론의 투사들과 숙소로 떠나려던 이종학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민하린을 직시하더니, 일행들에게 짧게 말했다.
“볼일이 생겼군요. 먼저 가십시오.”
“아는 사람인가?”
“예.”
“흠… 알겠네.”
신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투기장을 떠났다.
그제야 이종학이 말했다.
“금방 끝날 얘기는 아닐 것 같군.”
“네.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도 될까요.”
“그러지.”
민하린은 이종학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챔피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방이다. 그곳에서라면 여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달칵—
문을 닫았다.
바르간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민하린은 이종학과 둘이서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종학이었다.
“얘기는 들었다. 5년 전쯤에 천상계에 왔다고.”
“네.”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군. 한눈에 봐도 알겠어.”
“이종학 씨도요.”
의례적인 말들이 오갔다.
어느 정도의 정은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식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민하린의 마음은 여전히 싱숭생숭했다.
솔직히 말하면, 동향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거북하더냐?]
루카스의 말이 떠오르자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그녀에겐 아직까진 이종학의 존재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민하린은 필사적으로 그러한 기색을 숨겼다.
“…그런데, 루카스 님은 어디 있지? 바깥에 있는 갑옷 남자는 아닌 듯한데.”
바르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약간의 살결도 노출시키지 않는 전신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이종학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이나 움직임을 통해 루카스가 아니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는 바르간이라는 이름의 투사입니다. 스승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
“네.”
민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리드와의 만남, 세디가 있는 장소, 그곳에 있다는 절대자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종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 돌아오지 못하셨단 건, 일이 원활하게 풀리고 있는 게 아니란 거군.”
“아마도요.”
“…….”
이종학은 잠시 골몰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민하린은 어느 정도 그의 머릿속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분침이 다섯 번 정도 돌았을 때, 그녀가 물어보았다.
“정말 크란과 싸울 생각인가요?”
민하린은 침묵하는 이종학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악마왕에게 납치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전초전에도 그의 부하로 참가했을 확률이 높아요.”
현 시점에서 크란이 적일 확률이 더 높다는 건 명백하다. 크란이 이종학에게 기권을 종용하는 건 그녀도 들었다.
민하린은 그게 모욕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쩌면 크란이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종학은 강하다. 하지만 크란만큼은 아니다.
만약 항복하지 않고 싸운다면,
이종학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군.”
“네?”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나.”
민하린이 찔끔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나나?
아니면 루카스와 이종학의 눈이 비상할 정도로 빠른 걸까.
그녀는 의문을 감추며 짜내듯 변명했다.
“…싫어하진, 않습니다.”
아니. 변명이 아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악감정은 루카스의 조언을 들은 이후 홀로 정리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느끼는 건 거북할 뿐이다.
민하린이 그리 생각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밑으로 내렸고, 그 모습을 보며 이종학이 픽 웃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그와의 승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미리 말해 두는데, 죽을 생각은 없어. 다행히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엔 기권이라는 기능이 존재하지 않나?”
여차하면 기권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하린은 슬며시 미소 짓는 이종학을 바라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불길함을 느꼈다.
* * *
방문을 닫는다.
크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문이 있는 곳으로 성큼 걸어간 다음 커튼을 쳤다. 촛불 한 점 없는 방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풀썩 기절하듯 쓰러졌다.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 같다. 누군가 이 광경을 봤다면 돌연사한 거라 착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륵—
어두운 방 안에,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꾸물거렸다.
그건 점토처럼 저들끼리 덕지덕지 붙더니, 이윽고 두 개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하나는 유려한 곡선을 가진 여인의 형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악마의 형상이었다.
[조정이 덜 끝났나 보군요.]
여인의 형상이 바람에 맞은 촛불처럼 일렁였다.
[아직까지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요. 지금 단계라면 자아를 지우는 것쯤 간단한 일일 텐데, 완전히 꼭두각시로 삼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그러자 악마의 형상이 대답했다.
[최소한의 사고력은 있어야 전투에서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크란이 여태껏 쌓은 경험은 그냥 삭제하기에 아깝다.]
[흐응. 정말 그뿐인가요?]
[…….]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구요?]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도를 넘지는 마라.]
[…….]
[혓바닥을 함부로 놀릴 상대 정도는 구분하란 뜻이다.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 당신에 대해선 제가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위대한 왕이시여.]
악마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검은대지’에 있는 조각상을 찾는 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군. 아마 레티프도 난항을 겪고 있겠지. …노디에소프 같은 경우에는, 제법 흥미로운 수작을 벌이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요?]
[루카스 말인가.]
살짝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어도 이 전초전에 한해서, 그는 더 이상 위협 요소가 되지 못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