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6화
[용사냥꾼, 충격의 12연패!]
[고룡 사냥은 과장된 헛소문?]
[히럽의 분대장, 도살자 ‘애시스타’. 고룡 사냥은 거짓이 아니며, 루카스는 내가 본 최강의 술법가…….]
“…….”
바르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간행물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다섯 번은 다시 읽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간행물의 글자는 한 톨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간행물을 품에 넣었다.
“아. 오늘도 그놈 경기 있네.”
“그놈?”
“루카스 말이야.”
“아. 용사냥꾼?”
광장은 도시의 중심이고, 최근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장소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광장에 있는 이들 대부분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건 다름 아닌 용사냥꾼 루카스에 관한 얘기였다.
“용사냥꾼은 개뿔. 너, 그놈 경기 한 번도 못 봤지?”
“어. 그래서 오늘 한 번 볼까 했는데.”
“절대로 보지 마라. 나 그놈 경기 3번이나 봤는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남자가 이를 갈며 말하자, 그의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심각해?”
“그놈, 2주일 동안 12연패나 했다고! 말이 돼? 보통 5연패만 해도 투사라면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인데, 그 자식은 쪽팔림이란 게 없는 건지 계속 경기를 잡고 있단 말이다!”
“12연패면… 와, 대기록이네.”
“맞아. 제길. 그딴 놈한테 3번이나 걸었던 내가 등신이지.”
용인이 혀를 차며 읽고 있던 간행물을 꾸깃꾸깃 말았다. 그러고도 분이 삭혀지지 않는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바르간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저들만이 아니었다.
투쟁의 섬.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섬에 사는 이들의 최대 오락거리는 투기장이다.
아니. 그들에게 투기장이란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닌 하나의 문화, 삶에서 뗄 수 없는 구성요소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리루아는 섬 전역을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거대 투기장을 보유한 대도시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투사나 다크호스, 혹은 언더독의 출현에 목말라하고 있었고, 당연히 용사냥꾼 루카스에 대한 관심도 이례가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실제 그의 첫 경기가 잡힌 날엔 관객석 티켓이 모두 매진되는 등의 기염을 토해 냈다.
…만약 루카스가 이겼다면.
아니, 비교적 대등한 경기를 보여 주기만 했더라도 그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을 보냈을 것이다.
“큭.”
바르간이 주먹을 쥐었다.
그는 알고 있다.
눈으로 보았고, 피부로 느꼈다.
루카스가 얼마나 강한지.
…물론 야생에서 고룡을 사냥하는 것과, 한정된 필드에서 투사와 싸우는 게 전혀 다르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 통칭 술사라고 불리는 자들이 대인전에선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그렇다고 해도.’
홀로 고룡을 토벌한, 루카스의 가공할 만한 전투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
만약 루카스가 리루아 투기장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챔피언, 혹은 랭킹 5위권 안에 드는 최상위 투사에게 패배했다면 이토록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바르간의 의문은 하나였다.
‘왜 일부러 패배하신 거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다.
‘네가 해야 될 일을 해라.’
‘당분간 나를 찾지 마라.’
루카스가 남긴 말들이 족쇄가 되어 그의 가슴을 얽매었다.
‘…내가 해야 될 일.’
그게 대체 뭐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내팽개치고 도망친 일, 그걸 마주하고 매듭지으라니.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그는 투사였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머리 굴리는 건 성미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추측을 해 보았다. 루카스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해.
‘당분간은 계속 패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연승을 해 나가며, 비난과 욕설로 점철된 여론을 반전시킬 생각인가?’
배경만 받쳐준다면 충분히 대스타를 탄생시킬 수 있을 만한 이야기였다. 편견은 반전을 줄 때 효과 있다는 말도 있으니.
하지만… 안 된다.
만약 이런 계획을 시행할 생각이라면, 그건 루카스의 착오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 중에선 수십 년 동안 투기장을 제집 드나들 듯 한 이도 많다. 그러한 이들의 안목은 웬만한 전문가에 버금갈 정도였다.
여태껏 힘을 숨기다가 갑자기 드러내는, 유치한 퍼포먼스에 속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관중과 투사를 모욕했다고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안 돼.’
바르간이 주먹을 쥐었다.
뭐가 되었든, 지금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
흔들리던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투기장이었다.
…역시나 그는 투사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투사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 * *
“12연패라.”
“예.”
“…….”
캉키는 턱을 괸 채로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가 한껏 가라앉았다.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캉키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는, 리루아의 도시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얼굴이었다.
현 투기장 랭킹 3위 ‘파두두’.
물론 투기장에 소속된 투사가 영주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이상한 광경이 아니다. 문제는 파두두가 단순히 예의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양 무릎과 손바닥을 바닥에 댄 채 바싹 엎드리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선 용인 노예조차 취하지 않는, 완전한 굴복을 표하는 자세였다.
투사 노예라고 해서 실제로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상식 있는 용인이라면, 자신에게 복종한 노예에게도 최소한의 경의는 갖춰야 된다.
그들의 밑바닥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깔려 있고 충성심은 그 자긍심에서부터 우러러나온다. 때문에 아무리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노예의 자긍심만큼은 건들지 않는다.
괜히 자극했다간 목숨을 도외시한 채 달려들거나, 스스로 자결할 수도 있으니.
─한 가지는 분명했다.
캉키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파두두에게선, 그러한 자긍심이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룡 사냥은… 그 남자 혼자서 한 게 아니란 건가?”
캉키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거의 작은 산만 한 크기를 가졌다던 고룡. 그러한 사체가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클 것인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다.
캉키는 그러한 소식을 늦게 접했고, 때문에 사체 쟁탈전에 끼어들지 못했다.
다섯의 대영주가 무상으로 고룡 사체를 분배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속이 뒤틀렸던가.
그에게 있어서 무상의 이익을 취하지 못했단 사실은, 그 어떤 추태보다 뼈아팠다.
그런데 그 고룡 토벌의 주인공인 용사냥꾼이 리루아에 왔다. 캉키는 그 소식을 듣고 난 이후 그 남자, 루카스의 행보에 줄곧 주목했다.
루카스는 투기장에 진출했다.
그건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그만한 실력자가 리루아 같은 대도시를 찾을 이유는 하나니까.
기대를 갖게 되었다.
물론 루카스가 보여 줄 강함을 기대한 건 아니다.
용사냥꾼이라는 이명이 이끌어 내는 주목도,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화제성과 뜨거운 관심……. 그러한 집중은 곧 투기장의 수익과 직결된다.
그것을 기대하고, 첫 상대로 나쁘지 않은 실력의 투사를 붙여 주었다.
쉽게 말해 판을 깔아 준 것이다.
만약 그 승부에서 이겼다면, 루카스가 가진 주목도는 순식간에 곱절이 되었을 테지.
그런데.
‘완패하다니.’
예상하지 못했다.
고룡을 토벌한 남자가, 고작해야 자이훔 정도의 투사에게 완패하다니.
힘을 숨기고 있는 건가?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패배했으나 루카스에겐 상처가 없었다. 그 정도는 웬만큼 안목이 있는 자라면 쉽게 꿰뚫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경기에서도 그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애초에 큰 상처를 입었다면 고작 2주 동안 14매치를 수행하는 미친 짓을 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역겨운 수작질.’
캉키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의 권위가 침범당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이 투기장에서 승패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그에게만 있어야 되니까. 이를테면 리루아의 대영주인 캉키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다.
그러한 권능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외부인이 흙발로 짓밟았다.
그의 불쾌감이 최악까지 치달아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르간이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고?”
“예.”
바르간.
기억하고 있다.
그가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시절 끈질기게 가로막던 투사 중 하나다.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바르간은 눈여겨볼 만한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포섭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놈에겐 대국을 읽는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투사란 놈들이 으레 무식하다고 하지만, 바르간은 특히나 심했다.
제대로 된 지원 아래 착실히 성장했다면, 현 리루아 투기장에서 10위 안에 드는 승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을.
“쯧.”
아무튼.
바르간이 루카스의 옆에 붙어 있다는 건, 그 남자 또한 투기장의 승부조작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캉키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상성이란 참으로 재밌는 것이지.’
고룡 토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해도 어차피 술법가.
대인전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투사들 앞에선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곳은 리루아다.
그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피땀으로 일군, 오직 그만의 영토.
설령 다른 대영주라고 할지라도 그의 땅에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대장간에 고룡의 두개골을 맡겼다고 하니.’
놈을 광고하는 데 쏟은 비용은, 그걸로 대신해 둘까.
캉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파두두에게 말했다.
“‘후비’를 불러라.”
* * *
‘타깃은 힘을 숨기고 있으니, 주의하라.’
암살자 ‘후비’는 캉키에게 직접 들은 조언을 떠올렸으나,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캉키의 조언을 한 귀로 흘린 건 아니다.
다만, 적이 얼마나 강하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 판단했을 뿐.
스으으.
조용히 창문이 열렸다. 그런데도 후비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동안 기다렸다.
…방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런 확신이 든 후에야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움직임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
타깃, 루카스는 침대에 누운 채 숙면에 빠져 있었다.
창가에 비친 달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과연. 확실히 용인이 아닌, 어딘가에서 흘러온 외부인의 얼굴이다.
스릉.
품에서 단검을 꺼낸다. 단검에선 공기마저 갈라 버릴 정도로 스산한 예기가 흘렀다.
후비는 소리 없이 루카스에게 다가간 다음, 왼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제야 루카스의 눈이 떠졌다.
“……!”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순식간에 혼란과 다급함, 공포가 어렸다.
후비는 동요하지 않고 몇십, 몇백 번이고 반복했던 일을 시행했다.
단검은 능숙하게 갈비뼈 사이를 헤집고, 거침없이 심장까지 닿았다.
부르르.
미약한 경련은, 이윽고 침대를 삐걱거리게 만들 정도로 거칠어졌다. 이를테면 죽음 직전에만 선보일 수 있는 최후의 발버둥이다.
조금 소란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이곳은 술집을 겸하고 있는 여관이란 걸 알고 있다. 지금도 희미하게 술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용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 덜컹임을 깨달을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다.
후비는 단검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으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끝.
루카스의 눈이 까뒤집어진 걸 확인하고,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바닥을 회수했다.
손엔 끈적한 타액이 묻어 있었다. 대충 옷에 닦은 다음 루카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놔두면 소란이 일어나겠지. 그의 주인이 바라지 않는 일이다.
다행히 그는 시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한 사람이 돌연 실종되는 건 충분히 이목을 끌고도 남을 일이지만, 루카스는 현재 리루아 내에서 최악의 평가를 듣고 있는 ‘외부인’이다. 거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연패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용인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자가 돌연 모습을 감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욕설과 함께 가래침을 내뱉을 뿐. 찾으려 들지는 않겠지. 기껏해야 야밤에 도망을 친 거라고 추측이나 할까.
후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루카스의 시체를 이불로 꽁꽁 싸맨 다음 방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끼이익—
들어올 때와 달리, 창문에선 미세한 소음이 일었다.
그게 전부였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방엔 고요한 정적만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