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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22화 (343/857)

외전 122화

상쾌한 바람이 머리를 간질였다.

루카스는 슬슬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도시군.”

혼잣말인 것을 알지만, 바르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히 대답했다.

“[리루아]는 8개의 대도시 중에서도 돋보일 만큼 거대한 투기장을 소유한 곳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소도시로 분류되는 곳이었습니다.”

“소도시라.”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물론 루카스가 천상계에서 접한 도시라곤 헤루이뿐이었으나, 마침 거기가 소도시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더 괴리감이 느껴졌다.

이 거대하고 발전된 도시가, 수십 년 전에는 헤루이와 같은 소도시였다는 사실이.

리루아는 성곽 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었고, 각 성 내벽을 지날수록 지면이 점점 높아지는 계단 구조였다.

그 때문에 도시 가장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가장 솟아오른 지면 위에 건축되어 있었고, 안 그래도 높고 큰 덩치가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리루아는 도시 국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투쟁의 섬에만 7개가 더 존재하다니.

역시 천상계는 하나의 세계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광활한 곳이었다.

“저 건물이 투기장인가?”

“예.”

당연히 그렇겠지만, 굳이 물어본 이유는 하나였다.

외관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도저히 투기장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나라의 왕성王城조차 저토록 거대하고 사치스럽진 않을 것이다. 그건 아주 두껍고 뭉툭한 탑 같았다.

일반적인 탑과 다른 점이라면, 누군가 거대한 칼로 자른 것처럼 건물에 비스듬한 단면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높고 거대했지만.

아마 건축자는 의도적으로 미완성된 느낌을 주려 했을 것이다.

“빅매치가 있는 날에는, 상공에서 경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천장을 떼어냈습니다.”

“상공에서 경기를 본다? 하늘마차를 이용하는 건가?”

“부유석 위에 설치된 관람석이 있습니다. 물론 유지하는 데만 고액의 비용이 발생해서 웬만큼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들은 누리지 못하는 사치죠.”

그 말을 듣고 투기장 상공을 향해 눈가를 좁혀 보니, 확실히 작달막한 부유석이 둥실 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에서 보면 조약돌만 한 크기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법 널찍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아무리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해도, 저런 높은 곳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자들의 신경이 어떻게 돼먹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용인들은 구름 위의 섬에서 태어났으니, 기본적으로 고소공포증 따위는 갖고 있지 않는 걸까?

루카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르간이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고룡의 사체 말입니다. 대영주들에게 그렇게 훌렁 넘겨 버려도…….”

─루카스가 다섯 명의 대영주에게 고룡 사체를 넘긴 것도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바르간은 아직도 그때를 회상하면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루카스의 태도도 그랬지만, 대영주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고룡의 사체를 공짜로 손에 넣게 됐지만, 의외로 그들은 대놓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표정을 굳히고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사실 바르간이 생각하기에 가장 괜찮은 방도는, 다섯의 대영주에게 고르게 사체를 매각하는 것이었다. 두개골처럼 특히 값어치가 높은 부위만큼은 그들에게 자발적인 경쟁을 시킨 뒤, 보다 높은 대가를 제시하는 쪽에게 팔고.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면 다섯 명의 대영주 중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무상으로 사체를 제공했다.

대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니. 그들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호의를 주었다고 호의로 되돌려 받을 거란 기대를 거는 건 그야말로 무르디 무른 생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아무튼 대영주들은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루카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무언가 꿍꿍이를 품고 있단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미끼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다.

“훌렁 넘긴 건 아니지. 돈은 받았지 않나.”

“…사체값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요.”

대영주들은 애초에 제시한 금액인 2,000만 에루를 루카스에게 주었다. 다섯 명 모두에게 받았으니 지금 그에겐 1억이라는 자금이 생긴 것이다.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룡이나 노예 투사 같은 부산물은 받지 않았다. 딱히 당장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법서.’

루카스는 가방에 있는 세 권의 술법서를 떠올렸다.

아카드의 대영주인 스페라가 제시한 물품으로, 술법에 관한 흥미는 만만하기에 받아 두었다.

리루아에 오는 동안 읽고 싶었지만, 고룡 새끼의 심장을 다듬느라 그럴 여유가 거의 없었다.

아무튼 대영주들은 고룡 사체를 갖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언젠가 자신의 도시에 온다면 극진히 대접하겠다는 상투적인 말과 함께.

루카스는 그 말에 대충 대답하며 이종학을 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종학은 루카스의 강력한 뒷배경이 될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홀로 움직이며 실력과 명성을 쌓거나, 지닌 바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 게 이로울 것이다.

결국 루카스에게 남은 부산물은 애초의 목적이었던 고룡의 심장과 두개골, 그리고 고룡 새끼의 사체가 전부였다.

바르간은 애시스타에게 그 부산물들을 옮겨 줄 것을 부탁했다.

이가루에게 말하지 않은 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그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애시스타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스시리스의 추태로 인해 루카스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루카스의 입을 빌려 부탁을 하자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애시스타는 아무런 비용도 받지 않고 짐을 모두 옮겨 준 다음, 루카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카스는 그녀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루아에도 뛰어난 실력의 대장장이가 있습니다. ‘바빌론의 불망치’ 정도는 아니지만, 그라면 고룡의 두개골을 다루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은 두개골이나 새끼 고룡의 사체를 쓸 생각이 없어. 당분간은 보관만 하고 싶은데.”

“가능합니다. 보관비가 좀 들겠지만요.”

고룡의 두개골이라면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도 무시 못 할 정도지만, 지금의 루카스에겐 웬만한 금액이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고룡의 부산물들을 모두 맡긴 뒤, 그들은 리루아의 거리 중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폭풍 같은 이 주였다.’

고룡과의 조우, 토벌에 이어 다섯 명의 대영주와 만나게 되고 그들을 상대로 협상까지 했다.

바르간의 이번에 겪은 이 주가량이, 그간의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사건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단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반면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루카스는 평소처럼 삭막한 표정이었다. 어떨 때 보면 감정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투기장을 둘러보고 싶지만, 그전에 방부터 잡도록 하자. 바르간, 안내해다오.”

“…물론입니다. 따라오시지요.”

루카스는 바르간의 뒤를 따르며 리루아의 거리를 둘러보았다.

대로를 몇 블록만 걸어도 대략적인 도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리루아는 거대한 활기가 꿈틀거리는 도시였다. 시간대가 오전이기도 했지만, 거리를 누비는 이들의 걸음걸이엔 힘찬 활력이 실려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건축물의 퀄리티가 무척이나 높았다. 중앙에 있는 투기장을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투박한 용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세련미가 있었다.

“리루아의 건물들은 평화의 섬에 있는 건축가들의 도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군.”

용인들은 태어난 섬에 따라 전혀 다른 종족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평화의 섬에 있는 자들은 대개 지적이고 온건하며, 예술가적인 기질이 깊다고 한다.

바르간이 안내한 여관 또한 무척이나 세련된 건물이었다.

끼익—

일반적인 여관이 으레 그렇듯, 1층에 술집을 겸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점은 1층과 2층 사이의 벽을 허물어 천장이 무척이나 높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닌데도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공간을 적절하게 잘 활용했다는 것이겠지.

술집은 비교적 한적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빈 테이블이 훨씬 더 많았다. 술집이 활성화되는 건 해 질 녘부터니 당연한 일이다.

바르간은 바(Bar)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하더니 루카스를 보았다.

“식사는 바에서 드시겠습니까, 1층에서 드시겠습니까?”

“1층에서 먹자.”

“알겠습니다.”

바르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주문했다.

그사이 루카스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마친 바르간은, 다소 어색한 얼굴로 루카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그로선 주인과 겸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루카스는 합리주의자였고, 하나의 일행이 두 테이블에 흩어져 식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적해서인지 식사는 금방 나왔다. 따끈따끈한 베이컨 스프와 통째로 구운 훈제고기, 일부러 딱딱하게 말린 육포였다. 역시 고기투성이 반찬이었으나, 이 시점에서 루카스는 어느 정도 용인의 식문화에 적응이 된 상태였다.

그는 불만 없이 베이컨 스프를 몇 번 떠먹었다.

잠시 식기가 달각대는 소리만이 울렸다.

얼마 안 가 식사 시간은 끝났다.

둘은 거의 동시에 식기를 내려 뒀다. 이 또한 바르간이 루카스가 먹는 속도에 맞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카스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다음,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바르간.”

“예.”

“리루아를 가리켜 투쟁을 잃은 도시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

바르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루카스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떠돌이 용인 투사 바르간]

[레벨: 54]

[이명: 후려치는 바르간, 타협하지 않는 자]

[직업: 투사]

[종족: 용인]

[스킬: 검술(Lv.7), 독기(Lv.6), 생존기술(Lv.7), 야생의 감(Lv.5)]

[충성도: 81]

[난이도: C]

[참가자에 대한 감정: 신뢰, 동경, 충성]

충성도가 80을 넘으면서, 새로운 항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해당자가 루카스에 갖고 있는 감정이었다.

지금 바르간은 자신을 믿고 있다. 딱히 상태창을 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리루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도시의 어둠은, 주인님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위험합니다. 물론 주인님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 얘기를 듣게 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니 말해다오.”

“…알겠습니다.”

바르간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떼려는 순간이다.

끼익—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루카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썰렁하던 1층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로 다수였고, 세상의 소란은 다 몰고 다니는 것처럼 시끌벅적했기 때문이었다. 차림새로 보니 투사들인 것 같다.

곧 그들에게 시선을 떼고 다시 바르간을 바라봤다.

1층이 소란스러워졌으니, 방으로 올라가 얘기를 듣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르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르간.”

“아… 예, 예. 죄송합니다.”

바르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카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소란스러워졌으니 올라가도록 할까.”

“…그편이 나을 것 같군요.”

둘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정확히 말하면 올라가려고 했다.

“바르간?”

누군가 바르간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맞네, 바르간.”

바르간과 안면이 있는 건가?

그러나 기분 탓인지, 목소리에 조롱기가 섞여 있는 것 같다.

루카스는 뒤를 돌아 남자의 얼굴을 보았고 자신이 느낀 게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했다.

“꼬리 말고 도망친 개새끼가, 리루아엔 무슨 낯짝으로 발을 들였나?”

히죽이며 말하는 거한의 남자, 그의 얼굴엔 빈정거림과 경멸밖에 없었다.

문제는 남자만이 아닌, 주변에 있는 투사들 전원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르간? 투기장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된 그놈 말인가?”

“소문으로는 ‘헤루이’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돌아다닌다던데.”

“하! 한심하군. 그딴 작은 도시에서나 설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리루아 투기장 출신인 게 부끄러울 정도야.”

모멸감 섞인 발언이 하나씩 들린다.

어떤 이는 술맛 떨어졌다며 바닥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바르간이 심호흡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쯤 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힘바.”

“그러게. 10년 정도 됐나?”

“훨씬 더 됐지.”

“크크크.”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이나 한잔하지. 그간 못다 한 얘기도 좀 나누고.”

“아니. 지금은 좀 바빠서 이만 가 보겠다.”

싸늘하게 쏘아 붙이고 홱 고개를 돌리는데, 힘바라 불린 남자가 과장스럽게 말했다.

“어어. 섭섭하게 빼지 말라고. 오랜만의 재회잖아. 아니면 주머니가 빈곤하신가? 걱정 말라고. 내가 한턱낼 테니까. 너도 알다시피 리루아의 투사들은 돈이 부족하지 않아.”

“…….”

바르간의 표정에 짙은 경멸이 어렸다.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것 같다.

“주인님이 기다린다.”

“…주인님?”

힘바는 어리둥절하게 반문하더니, 뒤이어 시선을 루카스에게 보냈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앞에 있는 그 비실이가 네 주인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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