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0화
“떠돌이에겐 떠돌이가 된 이유가 있어요.”
민하린은 루카스가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했다.
“특히 ‘투쟁의 섬’에 살아가는 용인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종족 특성이라고 해야 되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심한 편이거든요.”
그 때문에 10년에 한 번 열리는 ‘챔피언십’은 모두 용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고 덧붙였다.
혹여 민하린이 챔피언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이 도시 ‘헤루이’ 전체가 최소 일주일은 거나한 축제판을 벌릴 것이다.
챔피언십은 단순히 최강의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대회가 아니다. 투쟁의 섬만이 아닌, 천상계 전역이 주목하는 일대 이벤트이자 지역대항전인 것이다.
“바르간 같은 실력의 투사가 떠돌이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혹여 고향 도시에 대한 애착이 없어도, 어떤 투기장에서든 넉넉한 대우를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럼에도 떠돌이로 남길 선택했다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는 거겠죠.”
민하린은 잠시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주제넘은 참견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 * *
“투쟁을 잃은 땅이란 무슨 의미지?”
루카스는 우선적으로 그에 대해 물었다.
바르간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투사들이 살아갈 수 없단 뜻입니다.”
“그건 이상하군. ‘리루아’에 대한 얘기를… 린에게 들었다.”
‘린’이란 민하린이 이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명이었다.
풀네임은 ‘린 서머리스’.
그런 다음 약간 멋쩍은 기색으로, 딱히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지은 이름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리루아는 투쟁의 섬에 존재하는 여덟 개의 대도시 중 하나라더군. 투기장 규모로만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소속 투사들의 수준 역시 상당하다던데. 혹시 그녀가 잘못 알고 있던 거였나?”
“아니오. 모두 정확합니다.”
“그럼 왜?”
“…….”
바르간의 얼굴이 열기로 번들거렸다.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실제로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모든 집중력을,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참는 데 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루카스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리루아엔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
“예. 그들은 가장 해선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해선 안 될 일이란 게 뭐지?”
바르간의 얼굴에 짙은 혐오와 경멸이 떠올랐다. 그는 입에 담기조차 치욕스럽다는 듯 눈을 꾹 감으며, 마치 벌레를 씹어뱉듯 말했다.
“승부조작.”
“뭐?”
“리루아의 투기장엔 승부조작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승부조작……. 즉 투기장의 승패를 조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자잘한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결정적인 건 돈이겠죠. 리루아에 있는 투기장 규모라면, 커다란 매치가 성사됐을 때 움직이는 돈이 천문학적이니까.”
“…과연. 승부에 배팅할 수 있다는 거군.”
“예.”
바르간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카스는 납득 가지 않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부정부패를 단속하는 자들은 없나? 그렇게 거대한 규모라면 없을 리가 없는데.”
“확실히 감사자들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유명무실한 자들이죠. 그들은 금력과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리루아의 주인에겐 감히 이빨을 드러낼 용기조차 없는 쓰레기들이니까.”
어쩌면 바르간이 가장 혐오하는 자들은 ‘감사자’들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눈동자엔 불구대천의 원수를 회상하는 듯한 격렬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으니.
“너는 그것들을 어떻게 아는 거지?”
“…….”
바르간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리루아의 투사였습니다.”
* * *
사정은 전부 들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리루아’로 향하는 것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여럿 있었다.
‘목소리’가 했던 말, 리루아에 도사리는 ‘어둠’, 그 자신의 호기심 등.
바르간은 루카스의 결정에 약간의 불만을 가진 듯했지만, 그 이상 막아서지는 않았다. 루카스도 그의 과거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충성도가 조금 더 올라간다면 물어볼 요량이었다.
리루아는 헤루이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육로를 통한다면 최소 두 달은 걸린다는 것 같다.
‘챔피언십의 개최까지도 두 달.’
걸어서 갈 상황이 아니다. 다른 이동 수단을 구해야 된다.
바르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늘마차’를 타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하늘마차?”
“예.”
바르간이 설명하기로, 하늘마차란 비룡飛龍을 이용한 이동 수단이라고 한다. 듣자하니 용이 이끄는 것 같은데 마차馬車라 불리는 게 묘하기는 했지만, 용차는 확실히 어감이 이상하기는 했다.
“물론 문제점도 있습니다.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거든요.”
“얼마나 하길래.”
“헤루이에서라면 편도로 가는 데도 5,000에루는 들겠군요.”
그리 말해도 루카스는 엄청 비싸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천상계의 화폐 단위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불할 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민하린이 그에게 1만 에루 정도를 여비로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자에게 돈을 탄다는 것 자체가 스승 입장에선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나, 민하린이 뭔가 뿌듯해하는 얼굴로 생글거리는 걸 보니 안 받기도 그랬다.
아무튼 민하린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쓰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 바르간이 말했다.
“금액이 많이 부담스럽다면 다른 수단도 있습니다. 다만 이 방법엔 몇 가지 단점이 더 추가되긴 합니다만…….”
“괜찮으니까 말해다오.”
“토벌단의 왕복 운행을 이용하는 겁니다.”
“…토벌단의, 왕복 운행?”
생소한 두 단어에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르간은 당연히 그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투쟁의 섬에는 용인들 이외에 수많은 아룡이 존재합니다.”
아룡亞龍.
천상계에 머무는 몬스터의 총칭이다.
이 부유섬에 존재하는 괴물들 대부분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리 부르는 듯하다.
“도시 근처에선 보기 힘들지만,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지대에선 심심찮게 접할 수 있습니다.”
“큰 위협이 되겠군.”
“예. 그래서 토벌단이란 게 존재합니다. 그들은 왕실에서 돈을 받고 일정 주기마다 섬 전역을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목격담이나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야생지대에 서식하는 아룡을 토벌하지요.”
섬 전역을 돌아다닌다.
루카스는 바르간이 하려는 말에 대해 어렴풋이 감이 왔다.
“토벌단과 함께 움직인다는 건가?”
“예. 금전에 여유가 없는 이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좀 더 걸리고, 약간의 위험도 부담해야 되지만요.”
그런 다음 토벌단을 이용했을 때 걸리는 시간은 2주 정도라고 덧붙였다.
약 2배의 시간이 소요되는 셈이다.
“소모 금액은?”
“500에루. 다만 식비는 별도입니다.”
단숨에 10분의 1의 가격. 파격적일 정도로 저렴하다.
루카스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챔피언십이 열리기까지 두 달 정도의 여유가 있다. 혹여 차질이 생기더라도, 챔피언 자리를 꿰차는 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을 소요할 생각은 없다.
‘그보단 힘을 해금하는 게 우선.’
리루아 정도의 대도시라면, 7성 마법만으로는 맞설 수 없는 강자들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들과 싸워 챔피언 자리를 따내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된다.
‘…특별한 아이템.’
그러한 것들은 사람이 득실거리는 대도시보단 야생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민하린도 야생의 섬에서 얻은 수많은 아이템으로, 5년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바르간의 설명을 귀에 담았다.
사실 토벌단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정찰대에 더 가까운 듯하다. 아룡과 마주치는 경우는 적고, 만약 마주친다고 해도 합승객이 할 일은 없다고 한다.
듣기로 이러한 시스템은 토벌단을 굴리는 데 들어가는 돈이 상당히 부담됐기 때문에 고안되었다고 한다. 하늘마차에 비하면 안전성은 떨어지지만, 용인들은 성품상 이러한 위험이나 스릴, 미지의 모험을 오히려 반가이 여겨 이용객도 제법 된다고.
물론 돈이 궁해서 이용하는 자도 많다.
루카스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하자.”
“네. 그럼… 토벌단에겐 제가 미리 말을 해 두겠습니다. 주인님은 내일 아침, 도시 북서쪽에 있는 ‘헤루이의 불꽃’으로 와 주십시오.”
각 도시마다 토벌단의 기지가 존재했고, 헤루이에도 있는 듯하다.
헤루이의 불꽃.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의 짧은 여행이 되겠지만, 그래도 준비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고서점이었다. 민하린에게 미리 위치를 들어 둬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책을 펼쳐 글자를 훑어보았다.
‘영어라.’
이건 선별 인원 대부분이 지구 출신이란 걸 배려했기 때문일까.
루카스에게도 다행인 일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생전 처음 접하는 언어라면 터득하는 데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서점에서 책 몇 권을 골랐다. 천상계의 문화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모르는 게 있다면 바르간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최소한의 교양은 쌓고 질문하는 게 피차간 덜 피곤할 테지.
다음엔 무기점으로 갔다. 혹시 지팡이 계열의 장비도 있을까 싶어서다.
결론만 말하면 허탕이었다.
지팡이는커녕 마도구도 없었다.
진열장을 채운 번쩍번쩍한 무기들은 모두 베거나 찌르거나, 후려치는 역할은 완벽히 수행할 듯 보였지만 특별한 능력이 깃든 건 없었다.
‘바르간은 내 마법을 사술이라고 했지.’
아마 용인 사이에선 육체가 아닌 이능력을 사용해 싸우는 자들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루카스의 마법 같은 힘을 그리 낯설게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민하린도 마법과 검술 모두를 사용하여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 않나.
이러한 개념은 투쟁의 섬에 살아가는 용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천상계 전부일까.
루카스는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는 오늘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헤루이에 하루 더 머물게 되어 버렸다. 민하린이 머무는 대저택에 가면 공짜로 묵을 수 있겠지만 이미 서로 작별을 마쳤는데 다시 얼굴을 마주하긴 껄끄러웠다.
막 책을 읽으려는데 눈꺼풀이 조금 무거웠다.
‘피로?’
그 낯선 감각에 루카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위장도 허전했다.
그런가.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식사를 하고 잠도 자야 된다는 것인가.
“…후우.”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단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지만, 이 인간적인 생리 활동에 어느 정도 아련한 그리움은 느껴졌다.
루카스는 숙소 1층에 있는 주인에게 훈제고기 몇 조각과 식은 스프를 받은 다음 자신의 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고서점에서 사 온 책을 꺼내 읽어 나갔다.
약간 질기고 짭조름한 훈제고기를 씹으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린다.
‘뇌존은 이 세계가 흥미로운 공간일 것이라 말했다.’
루카스는 그 말에 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아주 오래된 문화와 역사, 자의식과 고등한 지성을 갖춘 종족들, 웬만한 행성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
그래. 문자 그대로 거대한 세계지만… 이곳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세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니. 가능성이 큰 정도가 아니다. 루카스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 넓고 방대한 세계가 실은, 군림자가 위대한 게임에 대비하여 만든 급조된 무대라는 것을.
팔락—
책장을 넘긴다.
루카스가 찾으려는 것은 군림자가 남겨 둔 ‘힌트’들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이 낡은 책 한 권에서도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신화神話와 관련된 서적이라면 더욱.
‘천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용족의 뿌리는 하나였다.’
‘일곱 섬은 태초부터 나뉘어 있었으며, 천상계 또한 하계下界에서 떨어져 나온 덩어리가 아니다. 그 증거로, 두 대지의 구성 성분은 세세하지만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카스의 흥미를 이끈 건 다른 지역에 관한 정보였다.
천상계, 벼락협곡, 검은 대지, 자이언트 필드, 그리고 중심에 있는 초대륙超大陸.
그것들을 지명地名이라 칭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 지역이 모두 하나의 세계라 지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 루카스가 살던 세계의 평계나 지옥처럼 완전히 구분되어 있는 건 아니다. 각각의 세계는 틀림없이 하나의 행성에 공존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무척 까다롭긴 하지만.’
하늘에 떠다니는 천상계는 비행 능력이 없으면 진입하지 못한다.
벼락협곡 주변은 한시도 끊이지 않는 천둥벼락이 밤낮 구분하지 않고 내려친다.
검은 대지는 내성이 없으면 1초도 버티지 못하는 사기死氣가 땅과 공기를 완전히 잠식했다.
그리고 자이언트 필드는 그 어떤 종족도, 최소한의 판단력이 있다면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루카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건 용인龍人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순간에 어느 정도 윤곽을 갖춘 추측이었다.
‘각 지역은 군림자와 연관이 있다.’
벼락협곡은 천둥우레의 뇌존, 검은 대지는 검은 가시의 마왕, 자이언트 필드는 태양거인, 마지막으로 천상계는 일곱 이빨의 용과 관련이 있다.
각 지역의 이름만 보아도 군림자의 특색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렇다면 각 군림자가 4개의 세계를 만든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곱 이빨의 용, 마지막 군림자인 그녀만큼은 ‘위대한 게임’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초대륙 가이아를 제외한 4개의 세계.’
단순하게 생각하면, 각 세계마다 하나의 조각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한 세계에 조각상이 편중되어 있는 건 밸런스가 맞지 않으니까.
루카스는 펜을 꺼내 서적에 필기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한동안 펜 소리만이 방에 고요히 흘렀다.
금방 날이 저물고 어둑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건 아니다. 애초에 그가 숙소에 들어왔을 때가 이미 오후의 끝자락이었다.
루카스는 탁자 위에 있는 촛불에 불을 붙였다. 고서엔 어느새 그가 적은 필기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
그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위 세계기 때문일까. 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한창 마법을 공부하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 아마 술이라도 한잔 곁들이며 그때를 회상하면,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숙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과거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