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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99화 (320/857)

외전 99화

루카스는 하늘에서 천천히 낙하하더니, 세디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헐떡이는 세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 살아남아 줘서.”

“…하. 다음부턴 조금만 더 빨리 와 주면 고맙겠어.”

세디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루카스의 등장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일까. 몸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고 눈꺼풀도 너무 무거웠다.

그녀의 피로를 눈치채고,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쉬어도 돼.”

“…그래, 그럼 조금만 잘까.”

세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기절해 버렸다.

상처가 많이 심하지만, 그녀라면 당장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역시 인간적이군.”

조소하는 듯한 목소리는 노디에소프의 것이었다. 그는 루카스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멀쩡하다고는 볼 수 없는 꼴이다. 당연히 그럴 테지. 카사진과 어느 정도 공방을 주고받았을 테니.

‘그런데도 놈이 이 자리에 왔다는 건…….’

설마 악마왕을 쓰러뜨렸다는 건가?

아니.

만에 하나라도 그럴 확률은 없다.

그는 카사진의 강함을 알고 있었고, 루카스가 이 우주에서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 루카스가 악마왕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쿠웅—

노디에소프의 추론을 긍정하듯, 반대쪽 하늘에서 카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전신에선 모든 생명체를 질식시킬 듯한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카사진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상으로 낙하했다. 이윽고 그가 선 위치는, 공교롭게도 노디에소프의 배후였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와 카사진이 마치 노디에소프를 포위하는 듯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싸우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걸 보니 손이라도 잡은 거냐?”

노디에소프는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을 입에 담았으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만약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위태로워지는 건 다름 아닌 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루카스도, 카사진도 아닌 제삼자에게서 돌아왔다.

“그건 아니지.”

꽈르릉!

새하얀 뇌전이 내려쳤고, 그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디에소프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이 우주에 진입한 마지막 절대자인 레티프였다.

“네가 왜 이곳에?”

“나 빼고 다 모였길래 뭐 하나 싶어서 와 봤지. 따돌림 당하는 건 외롭거든.”

“…….”

“농담이니까 표정 펴.”

레티프가 경박하게 킬킬 웃었다.

그 태도에 노디에소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카스의 편을 들러 온 거군.”

“틀린 말이 아니긴 해. 절대자 둘이서 루카스를 죽이려 든다면, 중립을 지향하는 내 입장상 약자의 편을 들 수밖에 없거든.”

“하.”

노디에소프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그의 시선이 카사진에게 향했다.

“악마왕, 루카스를 죽이는 게 네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변심한 이유가 뭐지?”

[내 목적엔 변함이 없다. 다만 시기를 늦췄을 뿐이지. 나는 전력을 다한 루카스를 죽일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노디에소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레티프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마왕이 그걸 바랐기 때문이라고 해 두지.]

“뭐?”

마왕.

검은 가시의 마왕을 말하는 거다.

레티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노디에소프. 네가 따르는 그분 또한, 이 자리에선 내 말을 따르는 걸 원하고 있다.”

“…그분께서도.”

거짓말이 아니다.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군림자를 들먹이며 거짓을 입에 담다니? 머리에 개념이란 게 박힌 절대자라면, 결코 상상조차 하지 않을 일이다.

루카스 같은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렇겠지.

“대체 무엇 때문에?”

[이제부터 레티프가 설명할 것이다.]

레티프가 들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으나 노디에소프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무엇이?”

“너와 나, 그리고 악마왕……. 우리 셋은 모두 다른 군림자를 따르고 있고, 그분들 모두가 저 정신 나간 미치광이의 죽음을 원한다.”

정말 드물게도 군림자들 간의 생각이 일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게 꼭 서로 간의 협력을 강요하지는 못한다. 목적이 동일하다고 반드시 손을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내 주인님이 네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명하셨다면, 물론 나는 따를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입에 담을 얘기를 저놈 또한 들어야 하나?”

노디에소프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저놈을 죽이고, 우리끼리 그 얘기를 들어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아니.”

레티프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지만 루카스야말로 우리가 들을 얘기의 핵심이다. 그가 없으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아.”

“…….”

노디에소프는 완전히 납득 못 한 듯했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절대자가 동의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카사진의 반응이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한 우군인 그가 침묵하고 있으니, 노디에소프도 이 이상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레티프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각양각색의 절대자 셋이 드디어 납득한 모양이다.

“그럼… 우선 도구를 꺼내 볼까.”

레티프가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고, 다시 꺼냈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건 한 명의 인간이었다.

축 늘어진 채로, 정신을 잃은 백발의 인간.

그건 루카스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리드……?”

“그런 이름을 가졌었지.”

레티프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카스의 눈에 불쾌함이 넘실거렸다.

“그를 어쩔 셈이냐?”

“‘사용’해야지.”

“뭐?”

이해되지 않는 발언에 루카스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절대자 레티프.

그는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대치하고 있던 루카스와 카사진 사이에 돌연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루카스는 레티프의 출현이 반가웠다. 그는 카사진을 적대하고 있었다. 그가 이 싸움에 참전한 것만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킬 조커 카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둘의 대립을 중재했고, 루카스는 세디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의도는 아직까지 불분명했다.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레티프는 적이 아닐 뿐이지, 동료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딱—

레티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번개처럼 나타난 새하얀 전류의 창이 아리드를 꿰뚫었다.

“아아아아—!”

아리드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었다.

저 벼락은 평범한 벼락이 아니다. 레티프의 외력이 어느 정도 담겨 있어, 웬만한 필멸자는 스치는 즉시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바스러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드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무려 레티프의 외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한다.’

저대로 놔두면 아리드는 죽을지도 모른다.

루카스가 레티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만둬.”

레티프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왜?”

“그러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모르지. 넌 인간에 대한 믿음이 크다고 들었는데, 고작 이 정도 고통도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인간성애자란 이명이 울겠군.”

“믿음이란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마라.”

“큭큭.”

레티프는 여전히 전류의 창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럼 직접 막아 보시든가. 네 옆에 선 두 친구가 그 꼴을 두고 볼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이어진 행동은 레티프도 예측하지 못했다.

루카스가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레티프에게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미친놈이었군.”

레티프는 루카스의 또 다른 이명을 떠올리며 마법들을 피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인간 하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척을 질 줄은 몰랐는데.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가 절대자가 된 이유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함이니, 이러한 광경을 방관하는 건 절대자로서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확실히 그분께서 탐을 낼 만큼 강한 독립성이야.’

레티프가 고개를 저었다.

“야, 그만해. 그냥 농담 좀 한 거라고. 소통자가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별로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봐, 벌써 끝났잖아.”

그 말에 루카스가 공격을 멈췄다.

“아, 으, 아…….”

눈을 까뒤집은 아리드가 새하얀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하얀 숨이 곧 뭉치더니, 이윽고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門을 형성했다.

그 문을 보며 레티프가 감탄했다.

“하하. 역시 대단하군. 여태까지 수많은 소통자를 봤지만, 이놈의 힘은 그중에서도 최고야!”

“…뭘 한 거냐?”

“우주와 우주를 연결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다른 차원의 우주는 아니고 임시적으로 만든 차원이지만.”

“임시적으로 만든 차원?”

“그래. 서두르도록 할까. 감히 그분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그 순간, 노디에소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홱 고개를 돌려 차원문을 바라보았다.

“…설마 저 너머에 계시는 분들은.”

“그래.”

그 순간, 루카스 또한 레티프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림자들이다.”

* * *

거대한 옥좌였다.

아니,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건 그 어떤 지적 생명체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행성行星만큼이나 거대한 옥좌.

그런 옥좌 네 개가 우주宇宙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광경.

옥좌엔 언뜻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루카스를 비롯한 절대자들은 그게 아님을 안다.

저곳엔 군림자들이 앉아 있었다.

물론 그들의 본체가 온 건 아니다.

무한에 가깝게 존재하는 것이 우주였으나, 군림자 모두를 품을 만한 허용량을 가진 우주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곳에 있는 건 그들의 의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있는 절대자를 압박할 만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둥우레의 뇌존.

검은 가시의 마왕.

태양거인.

그리고…….

“…….”

루카스는 순간 이상한 점을 느꼈다.

네 개의 옥좌 중 단 하나, 빈 옥좌가 있었다.

[무릎을 꿇어라.]

묵직한 목소리였다.

레티프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노디에소프 또한 감격에 찬 얼굴로 넙죽 엎드렸다.

루카스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루카스만이 아니다.

카사진도 무릎을 꿇지 않고 있었다.

“…….”

저 옥좌엔 검은 가시의 마왕 또한 앉아 있다. 레티프의 말에 따르면 카사진은 그의 오른팔인 제패자다.

그럼에도 카사진은 마왕에게 복종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루카스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섣부른 추론은 지양해야 된다.

[주연들이 모두 모였군.]

묵직하지만 어딘가 가벼운, 모순적인 목소리.

이건 일전에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구면인 자도 있고, 초면인 자도 있지만… 피차 시간도 없으니 허례허식은 건너뛰고, 본론부터 꺼내지.]

천둥우레의 뇌존.

그는 황금색 옥좌에 앉아 있는 듯했다.

[이제부터 입에 담는 말은, 우리 군림자의 뜻이라고 여겨라.]

‘우리’ 군림자.

그 말이 루카스의 귀에 턱 걸렸다.

군림자 네 명이 서로 얼마나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반목했고, 서로 간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조율이나 타협을 선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게 군림자란 존재의 숙명이었다.

그들에게 타협은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그건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존재 근간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애초에 군림자라 칭송받으며 수많은 절대자 사이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다른 존재에게 영향 받지 않는 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군림자들의 생각이 모두 일치해, 하나 된 의견을 자신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

루카스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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