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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97화 (318/857)

외전 97화

폐허가 된 도시, 새까만 하늘과 때때로 번쩍이는 빛, 알 수 없는 괴성과 지면에서 느껴지는 진동.

멸망 직전의 세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들이 보았던 영혼은 그대들의 가족이 아닙니다.]

영생교의 신자들이 멍한 얼굴로 아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리드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슬레이와 레이카는 그에 대해 철저하게 숨겼으니까.

그럼에도 신자들은 아리드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름 아닌 광휘光輝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리드는 사과했다.

진심을 담아 사죄를 입에 담았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함이 사태를 이토록 악화시켰다.

자기희생적 위선이 아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자책과 후회를 삼키며, 아리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대들이 만난 영혼은 악령과 잡령을 강제로 사로잡아 정화의식을 마친 다음, 사후세계에 있는 인격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친지들과 다른 게 없지만, 진짜 그들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우리 영생교는 그대들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격을 복제해? 우리를 기만했다고?”

처음으로 신자들이 술렁였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리드를 바라보았다.

그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가 무서웠다.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당할 것 같았다.

아리드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숨기며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뗐다.

[알고 있습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요. 그대들이 받은 상처의 깊이를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아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지 못합니다.]

감히 헤아려야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모든 죄를 짊어지겠습니다.]

그때였다.

가장 앞에 있던 한 중년 여자가 비척거리며 아리드에게 다가왔다.

“다, 당신이 진짜 성자님이라구요?”

“네. 맞아요.”

“…짓말.”

“네?”

“거짓말하지 마!”

중년 여인이 악귀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들어, 그대로 아리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커, 헉.”

“네, 네, 네가 뭔데 성자님을 사칭하는 것이냐? 우, 우우, 우리를 속이고 기만했다고? 교, 교주님이이 그럴 리 없어……!”

숨을 못 쉬겠다.

아리드는 질식에 잠겨, 중년 여인의 눈에 넘실거리는 광적인 신앙을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들이 얼마나 깊은 어둠에 빠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도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드의 눈빛, 손짓, 그리고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광휘의 정체를, 그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도저히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겠지.

“이, 이, 이교도 놈! 신성모독이다!”

중년 여자가 그리 외치며 아리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콰악!

“허윽.”

뒤이어 발로 짓밟는다. 얼굴이 밟혔다. 광대뼈가 아릿하다.

대부분의 광휘를 소진한 상태라,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그의 하얀 피부에 새빨간 핏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신자들에게 광기의 바람이 불었다.

집단 폭주의 무서움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 전부가 이미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악마의 속삭임이다!”

“모두 흔들리지 마십시오!”

“오, 오오. 주교님, 성자님.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전신이 짓밟히기 시작했다.

곧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드는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의 아릿함을 더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새하얀 눈동자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할아버지.

당신은 너무나도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 * *

신자들을 아리드에게 맡기고, 민하린은 슬레이의 추격에 나섰다.

다행히 그의 모습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건물 잔해에 깔려 있었다.

“아, 으아, 아…….”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때마침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그걸 피하지 못한 건가? 모른다. 크게 관심도 없다.

다만 민하린은 그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치미는 역겨움을 느꼈다.

건물 잔해에 몸 절반이 깔렸다. 아마도 하체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핏물이 새까만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슬레이의 목숨을 끊기엔 신통치 않은 듯하다. 잘린 팔마저 재생시키는, 괴물 같은 생명력을 가진 노인은 아직까지 명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모습을 보고, 민하린이 역겹다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니다.

그녀를 진정 몸서리치게 만든 건 다른 이들은 모두 죽음으로 내몬 주제에, 그 자신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그때 슬레이의 눈이 민하린에게 향했다. 그의 눈에 반색이 어렸다.

“나, 나 좀 도와주게.”

이건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민하린은 화조차 나지 않았다.

“직접 치우면 되잖아요.”

“지, 지금의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야. 사, 사냥꾼이라면 이 정도 잔해를 치우는 건 일도 아니겠지?”

“…….”

민하린이 대답하지 않자, 슬레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부, 부탁함세. 허, 허억. 허억. 나, 나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별수 없었어.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빠드득.

눈물을 흘리는 늙은 노인을 보면서도, 민하린의 마음엔 조금의 측은지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치솟았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레이가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를 하고, 거짓을 입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민하린은 차라리 눈앞의 노인이 악마였으면 싶었다. 그랬다면 망설임 없이 이자의 목을 자를 수 있을 테니까.

아니. 하지만, 그렇다면.

‘악마와 인간의 차이는 대체 무엇이지?’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민하린이 있는 곳은 가파른 언덕이었다. 그녀는 발길을 옮겨 소란의 근원지를 바라보았고, 뒤이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후 그녀는 말없이 슬레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슬레이는 민하린의 차가운 얼굴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 내가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애송이에게 겁을 먹었단 말인가?’

육체가 약해져서? 광휘가 떨어졌기 때문에?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직시하는 민하린에게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슬레이는 공포를 떨치려는 듯,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 손자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어!”

“…….”

“자네도 아까 보았겠지? 아리드라는 아이야. 기, 기적과 함께 태어난 아이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아이에게 부탁하면 됨세. 그게 무엇이든, 그 아이는 이 할아비의 부탁이라면 뭐든…….”

“저 사람이 당신의 손자였군요.”

쿠르르…….

민하린은 그리 말하며 슬레이의 몸을 짓뭉갠 잔해들을 치워 주었다.

“어, 어어……?”

슬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정말로 들어줄 거란 생각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하린은 딱히 슬레이의 목숨을 구할 요량으로 잔해를 치운 게 아니었다.

콱!

민하린은 슬레이의 목덜미를 잡은 뒤,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이것 놔라……!”

다시 한 번 슬레이가 발버둥 쳤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언덕이었다. 설마 이 계집, 자신을 저기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건가?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몸 상태로는, 저 정도 높이에서의 추락에도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민하린은 슬레이를 집어던지지 않았다.

언덕 끝에 선 다음, 밑을 향해 턱짓했다.

“눈 크게 뜨고 봐요.”

“어디를……?”

“저쪽.”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슬레이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고, 그건 시력마저 흐릿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수 초간 눈을 깜박이며 집중한 이후에야 민하린이 가리키는 방향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다.

흙먼지가 휘몰아치는 곳에 열댓 명의 사람이 모여 있다.

그들이 흥분한 기색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발길질에는 조금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한 악의가 만든 폭력.

그러한 광경은 몇 번이고 보았다. 슬레이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고 있으니까. 특히 이런 극한상황이라면, 말 몇 마디와 약간의 손짓만으로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슬레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리드, 그의 손자였다.

“왜, 왜……?”

슬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맞고 있는 거지? 저, 저 아이의 힘이라면 저 정도 숫자의 신자들을 제압하는 것쯤은…….”

“당신의 손자는 저들을 설득했어. 오해를 풀고, 죗값을 치르고, 무엇보다 그들을 구하고 싶어 했지.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친 당신과 달리, 피해자들을 마주 보고 사과했다구.”

“……!”

사과했다고? 아리드가?

하지만, 저 아이는…….

“죄가 없지 않아?”

민하린이 차갑게 말했다.

“난 영생교에 대해 자세히 몰라. 하지만 당신이 저 사람을 이용했단 건 알겠어.”

그녀는 방금 전 아리드를 처음 보았으나, 그가 얼마나 청렴결백한 인물인지는 첫 대면에서 곧바로 깨달았다.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딱 아리드 같은 인물일 것이다.

저런 사람이 누군가를 속이고, 기만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라면 저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슬레이와 함께 도망쳤겠지.

“만약 저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당신이 저지른 것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정도겠지.”

슬레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딴 건 민하린이 아닌, 슬레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였다.

어둠으로 물든 세상에서,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자신보다 언제나 타인을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성인聖人이었다.

“당신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거지?”

민하린은 진정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여태 이용하기만 했던 손자가, 그 자신이 저지른 업보로 몰매 맞는 광경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대답을 들으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녀가 슬레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 * *

발길질에도 사람이 죽을 수가 있겠구나.

아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다. 여전히 신자들은 광기에 취한 눈동자로 그를 짓밟아대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일들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내 죽음으로 저들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그렇다면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정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 또한 어쭙잖은 희생으로 얻으려는 더러운 자기만족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겠어.’

배운 적이 없다.

스스로 궁리하고 결론을 내리기엔, 그가 여태껏 살아온 이십여 년의 삶은 너무나 의존적이기만 했다.

그런 아리드라도 하나는 알겠다.

이런 죽음이 단순한 도피라는 것은.

그를 옭아맨 모든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때였다.

시선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정답을 가르쳐 줄까?”

그 존재는 아리드의 마음속 의문에 대해 대답했다. 아리드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힘을 주자, 그제야 가죽 재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보였다.

꽈르릉!

그리고 번개가 내려쳤다.

여태까지 어두운 하늘을 밝힌 게 번개와 흡사한 무언가라면, 이번에 내려친 건 정말로 번개였다.

그것도 망막이 타 버릴 것 같은 하얀 번개. 영생교 신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아리드가 멍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파지직 파직…….

가죽 재킷을 입은 중년 남자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자못 흥미로운 일이야. 이 좁아터진 땅에 존재하는 모든 초월자가 모이다니.”

레티프가 아리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가가 즐겁게 휘었다.

“반갑다, 소통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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