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86화 (307/857)

외전 86화

“오공작 두 명이 부산으로 오고 있습니다.”

“…….”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영생교의 신도가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날밤을 꼬박 샜으니 잠이 덜 깬 건 아니겠고.’

그럼 귀라도 먹은 건가.

민하린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그리 생각했으나, 곧 현실도피라는 걸 깨닫고 세면대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촤악.

차가운 냉수가 얼굴을 두드리자 그제야 정신이 좀 각성하는 것 같았다.

오공작.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공작급 악마와 실제로 싸워 본 몇 안 되는 사냥꾼들 중 하나였으니까.

공작은 문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태풍이나 지진, 해일에 버금가는 재해인 것이다.

그런 공작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오공작인데, 하나도 아닌 둘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그런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이곳엔 다름 아닌 루카스가 있다. 민하린은 그녀의 위대한 스승이 이미 오공작 중 하나를 토벌한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놀랍게도 루카스는 별다른 상처 없이 그 어떤 이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세운 것이다.

‘게다가… 세디도 엄청나게 강하고.’

그녀 앞에선 결코 티 내지 않겠지만, 민하린은 세디의 초월적인 강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눈앞에서 미국 베테랑 사냥꾼들을 갖고 노는 걸 봤는데.

어쩌면 정말로 반로환동한 세기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 보이는 애 같은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 곧 고개를 저었지만.

거기에 삼마엽인 성자와 영생교의 주교, 사냥꾼 출신의 신도까지 대기하고 있다. 오공작 둘은 분명 두려운 적이겠지만, 토벌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민하린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끽—

수도꼭지를 잠갔다.

민하린은 거울을 보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눈 밑엔 기미, 입술은 메말랐고 피부는 푸석하다.

전반적응로 초췌한 얼굴. 그럴 수밖에. 어제도 거의 한숨도 못 잤으니까.

영생교.

뼈대만 남기고 자취를 감춘 한국 사냥꾼 협회.

영혼의 모습으로나마 다시 만난 부모님.

아무것도 모른 채 단련하고 있는 동생들.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다.

그런 상태에서 오공작까지 오다니.

아수라장도 이보다 정신 사납지는 않을 것이다.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털었다. 고민에 잠길 때가 아니다. 방금 전 소식을 알려 준 신도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긴급회의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자신 또한 참가 대상이라고.

내심 의아했으나, 곧 사냥꾼 출신 신도들만 호출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공작에 대한 일로 의견을 교류할 생각이 아닐까? 사냥꾼이야말로 악마에 대한 프로들이니까.

회의 장소는 일전의 지하 강당이었다. 그곳은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민하린이 강당에 발을 들였을 때,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익숙한 얼굴도 몇 있다.

아니. 몇 정도가 아니다.

‘사냥꾼 출신들만 모이라고 했었지.’

차림새가 완전 달라져서 깨닫는 게 늦었지만, 이곳 신도 대부분이 한국 출신의 사냥꾼들이었다.

무려 수년 만에 동향 사람들과의 재회.

원래라면 기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묵은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그러기 힘들었다. 지하 강당 전체가 그들이 발산하는 묘한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그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들떴다고 표현해도 좋다.

…아니. 기뻐하는 건가?

‘어째서?’

오공작이 들이닥친다는 사실 어디에 그들이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민하린은 잠시 망설이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

“하린이구나. 오랜만이야.”

그들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 이상으로 담백한 반응이었다. 수년 만의 재회가 아니라, 바로 어제 헤어지고 만났다 해도 믿을 정도다. 사실 그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

민하린 또한 무척이나 식은 가슴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었다. 아마 김민철 때문이겠지.

“너도 교에 귀의했다며?”

“하하. 훌륭해. 하린이 너라면 주교님과 성자님, 나아가 영생교 전체에 아주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한 자는 민하린이 알기로, 철저한 무신론자의 입장을 고수했던 남자였다.

“…오공작이 오고 있다는 얘긴 들었어요?”

“이상한 얘기를 하네.”

“그 때문에 우리가 모였는데 모를까 봐.”

그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니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그들을 상대할 대책에 대해서 들은 게 있군요?”

“…….”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끼익.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슬레이 교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하린은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광휘가 조금 더 강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 또한 신자들과 비슷한,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한쪽 손에 지팡이 같은 걸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슬레이는 독서대에 섰다. 긴급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태도다. 느긋한 시선으로 좌중을 한 번 훑어본다.

그러던 도중 민하린과 눈이 마주쳤다. 슬레이의 눈가가 살짝 휘었다.

민하린은 저 노인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었다. 그가 말한 교리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만한 숙원이 아닌가.

그러나 시선이 맞닿은 이 순간만큼은,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송충이가 등골을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모두 모인 모양이군. 흠. 우선 이른 아침에도 모여 준 것에 대해 짧게 감사를 전하겠네. 그럼, 시간도 없으니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탁.

슬레이가 지팡이로 바닥을 살짝 찍었다. 사소한 동작이었으나, 분위기를 일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오공작 둘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 하나 그들은 경로 상에 있는 도시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 부산이라고 그런 파괴적인 태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군.”

민하린은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슬레이 교주, 그리고 영생교의 신자들 모두가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를.

“자네들이 그들을 막아 줬으면 하네.”

“…….”

뒤에 이어지는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레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푸근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민하린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체하며, 시선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만약.

만약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들에게 오공작 두 명을 막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라면, 그건 자살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따르겠습니다!”

“영원한 삶을, 사랑하는 이들과!”

“영생교 만세!”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온도가 몇 도는 오른 것 같다.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민하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자들의 감돌고 있는 기이한 열기…….

오싹 소름이 끼쳤다. 이제야 그 열기의 정체를 알겠다.

왜곡된 신앙. 광신도나 가질 법한, 잘못된 신념이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민하린이 입술을 깨물며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이들에게 죽음을 명령하는 것이오?”

덜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자는 민하린이 이 기지에 온 직후부터 계속 찾고 있던 이였다.

슬레이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정호민 지부장.”

“슬레이 교주, 모든 사냥꾼을 불렀으면서, 왜 나는 부르지 않은 거지?”

단출한 인상의 중년인.

사냥꾼 협회 한국 지부의 지부장인 정호민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민하린은 그를 알아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너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여유롭고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비록 성별을 다르지만,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고 수염은 정돈되지 않고 듬성듬성 나있다. 원래 풍채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그는 늙고 힘없는 노인처럼 왜소해 보였다.

“당신을 부른 적은 없는데.”

“…이곳은 사냥꾼 협회 한국 지부고, 나는 지부장이오. 이곳에서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소.”

“아직도 과거에서 허우적대는군. 이제 그만 받아들이시오. 여긴 영생교 한국 지부요.”

“개소리.”

으득.

그가 거칠게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정신 차려라. 언제까지 저 미치광이의 말에 휩쓸릴 거냐?”

“…….”

정호민의 목소리에선 필사적임이 묻어났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제야 민하린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한국 지부의 사냥꾼이 아닌, 영생교의 신자들뿐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과거 이곳의 책임자였던 정호민은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이를 이승으로 다시 부르는 것이다! 마치 면회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게 정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냐?”

“끌어내라.”

슬레이가 짧게 말했다.

그러자 영생교 신자 몇몇이 나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라!”

정호민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민하린이 기억하던 강인한 지부장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양팔을 허우적댔다.

그러자 신자 하나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그가 말아 쥔 주먹으로 정호민의 복부를 찔렀다.

“허억…….”

정호민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민하린은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관뒀다.

탓.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

대지를 박차고 튀어나간 민하린은 정호민의 양팔을 포박한 신자 둘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하나는 후두부를, 다른 하나는 복부를.

“……!”

그들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기절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다. 민하린은 평소 육체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빈센트와 치르며 쌓은 실전 경험에 감사했다.

“하, 하린아?”

정호민이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민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피부가 찌릿하다. 군중이 만든 무거운 침묵이, 칼날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슬레이가 그들을 대표해 입을 열었다.

민하린은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신도들이었다.

“악마 공작은 강해요. 당신들 전부가 덤벼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전부 죽을 텐데, 정말 명령을 따를 생각인가요?”

“물론이다.”

“어째서?”

“너도 교주님께 영생교의 교리에 대해 들었을 텐데?”

민하린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원한 삶을, 사랑하는 이들과.”

“육체는 굴레이며, 혼이야말로 근원이다.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비로소 해방되고 유토피아로 갈 자격을 얻는 거야.”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교주님. 그리고 나의 죽은 가족들이.”

“…그럴 리가. 그들이 진짜 가족이라면, 당신들의 죽음을 바랄 리가 없지.”

민하린이 비죽 웃었다.

“슬레이 교주, 당신도 그들과 함께 싸울 건가?”

그녀는 더 이상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슬레이는 민하린의 달라진 말투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난 아직 해야 될 일이 있다. 그래서 낙원으로 가는 걸 최대한 늦추고 있지.”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래. 처음엔 혹시 그런 생각도 했었다.

슬레이는 루카스와 세디가 가진 강함을 알고 있고, 그 힘에 기대 오공작을 토벌하는 것을 바란다……. 그는 첫 만남 때 루카스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아니었다.

눈앞의 노인은 사람들에게 자살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역시 사이비 교주였어.”

“감히 교주님께……!”

“그분의 기적을 직접 보았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대해주던 이들이, 이제는 죽일 듯한 시선으로 민하린을 보고 있다. 그 시선이 그녀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홧김에 저질렀다.

그녀가 한때 따르던 정호민, 그 믿음직하고 강인했던 한국의 지부장이 약해진 모습으로 폭행당하는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래. 뒷일 생각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이상하게 머리가 맑다.

여태까지 끼어 있던 안개가 일순간에 확 걷힌 것 같다.

“하하.”

민하린이 상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피곤하고, 컨디션도 좋지 않고, 상황도 최악이지만 의식만큼은 이토록 또렷하다.

그 이유를 알겠다. 간단한 일이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 옳다는 생각이 드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에 행동에 거리낌이 사라졌다.

진작 이랬어야 됐는데.

“…안타깝군. 넌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지? 둘이서 우리 전부와 싸우기라도 할 셈인가?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 네 스승을 믿고 있는 건가?”

민하린이 대답하지 않자 슬레이가 빙긋 웃었다.

“절대자. 거창한 이름에 비해서 별로 대단할 것도 없더군. 네 스승은 여기 오지 못한다.”

지금쯤 그는 성자, 레이카와 대면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소란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오려고 해도 레이카가 막겠지. 그녀를 억지로 뚫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소통에 치중한 자신과 달리, 레이카의 차력은 전투에 집중되어 있다.

슬레이가 확신을 담아 그렇게 말했고.

“재밌는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늙은이.”

그 말은 전前 절대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또렷한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그 무례한 말에 주변에 있던 신자들이 인상을 구겼다. 그들은 곧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작은 체격을 가진 흑발의 소녀였다.

“뭐야, 이 꼬맹이는?”

“뭐냐, 너는. 신도가 아니잖아.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닥쳐.”

콰직!

“꺽!”

“끕.”

두 남자가 순식간에 턱뼈가 부서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뒤늦게 찾아온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어?”

“뭐, 뭐야.”

신자들이 한차례 술렁였다.

슬레이의 얼굴도 굳었다. 방금 전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그 가운데 민하린만이 반가운 얼굴로 소녀를 보고 있었다.

세디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대단할 것도 없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