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8화
통신실.
민하린은 조안나와 마주선 채로 통신기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거창한 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기밀 통신 라인의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그 응답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한국에 마지막으로 있던 게 언제예요?”
조안나가 기기를 조작하는 민하린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3년 정도 전?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됐네요.”
“네. 한국의 피해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실적이 오를수록 중국 쪽에 파견되는 일이 잦아졌죠. 나중엔 아예 거점을 그쪽으로 옮겼구요.”
“흐음.”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가족은요?”
“한국에 동생이 두 명 있어요.”
“사냥꾼은 아닌가 보네요.”
“네.”
조안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가족이 있다는 건.”
“…조안나 씨는?”
“조안나면 돼요.”
미국인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개방적이다.
민하린은 그리 생각하며 고쳐 말했다.
“조안나의 가족은…….”
“없어요. 고아였거든요.”
“아.”
이건 좀 의외였다.
틀림없이 부잣집 같은, 잘나가는 집안에서 나고 자란 줄 알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선 형용할 수 없는 귀티가 흘러넘쳤다. 속된 말로 ‘있는 집 자식’, 혹은 ‘포스’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조안나는 그런 반응이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 협회장님이 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요. 어린 저를 거두시고, 나아가야 될 길에 대해 알려 주셨으니까.”
그리 말하는 조안나의 눈동자엔 애틋한 빛이 감돌았다.
민하린은 그 감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마 지금 그녀가 루카스에게 품고 있는 존경과 흠모 비슷한 것을, 그녀는 닐 플란드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가 간절한 눈으로 민하린을 보았다.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협회장님을 구해 주세요.”
“…네.”
민하린이 새삼스럽게 결심을 마친 순간이었다.
화면에서 드디어 반응이 들어왔다.
“통신이 연결된 것 같아요.”
“네. 잠시만요.”
핏—
그 순간 화면에 확 하고 불이 들어왔다.
“…….”
민하린은 두 눈을 깜박였다.
화면 속에 있는 인물,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니. 사실 두 눈으로 직시하고 있는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입술을 우물거리다 억지로 물었다.
“…민철이 아저씨?”
[역시 하린이였구나.]
모니터 너머의 남자가 생긋 웃었다. 민하린은 말문을 잃은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
“왜 아저씨가……. 성현이 오빠는요?”
[죽었어.]
“…네?”
민하린이 큼지막하게 눈을 떴다.
[많은 일이 있었단다. 너와 얘기하고 싶은 게 참 많은데… 이 통신 라인으로 연락했다는 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뜻이겠지? 언제쯤 돌아오겠니?]
그 말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민하린이었다.
확실히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었고, 실제로 그럴 자신도 있었지만, 설득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김민철의 태도는 너무나도 스스럼없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민하린이 한시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걸로 느껴지지 않는가.
* * *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주억거렸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육체에는 이상이 없다고. 그게 사실이라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후읍.”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켠 다음 마음의 준비를 한다. 눈을 감고, 최대한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윽고 한 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다.
비현실적인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던 존재.
오공작 로즈.
덜덜덜.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전신이 떨려 왔다. 병석에 누워 있지 않았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옛날처럼 악마가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었다.
만약 처음으로 마주친 악마가 하필 오공작이 아니었다면…….
고개를 저었다. 이딴 생각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
모든 건 결국 자신의 나약함에서 온 것이다.
극복하고 싶었다. 나아가고 싶었다. 여태까지 한심했던 자신과 작별을 고하고, 당당하게 악마와 맞서 싸우고 싶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렸던 미래가 아니던가.
조금만 더 하면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다다를 것 같았던 목표가 다시 한 번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니. 달아난 건 리오였다.
결국 이 자리에 있는 건 트라우마를 극복한 남자가 아니다.
여전히 나약한, 악마 공포증에 걸린 어린 영국인 소년이었다.
“빌어먹을……!”
콰직!
리오 프리먼은 분개를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이토록 감정적인 행동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자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한심함이 더 확실하게 느껴져 부정적인 감정도 커져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콱 씹은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자해는 그만둬라.”
“……!”
리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느새 병실 앞에 루카스가 서 있었다.
“스승님…….”
그는 말없이 걸어와 휴지를 건넸다. 리오는 그것을 받아들며 입가의 피를 닦았다. 새하얀 휴지가 빨갛게 물들어갔다.
그는 잠시 리오를 내려다보다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그때까지도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못 잡을 기회가 왔다는 걸 알고 있는데. 이번엔 정말 잘해 보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
콱 하고 목소리가 잠겼다. 더 입을 열었다간 오열이 섞일 것 같았다. 이미 한심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런 꼴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꺼낸 말은 끝마쳐야 된다.
가라앉은 침묵이 그에게 뒷말을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대련장에서의 영상을 봤습니다.”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사냥꾼들
그들과 맞선 건 고작해야 리오 또래거나, 그보다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발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
질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싸움이었다. 그건 리오가 평생을 걸고 추구해야 되는 경지가 분명했다. 그러나 재능과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나는 분명했다. 지금의 리오로선 10년이 지나도, 그 경지의 절반도 이뤄내지 못할 것이다.
이어질 말을 꺼내는 데 약간의 결심이 필요했다.
“저는…….”
“왜 사과하는 것이냐?”
루카스가 리오의 말을 끊었다.
“스승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린 것 같아서요.”
“내가 그런 말을 하거나, 혹은 태도를 비친 적이 있던가?”
“아뇨. 그렇지만…….”
“근데 왜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혼자 판단하는 것이냐?”
탓하는 말이었으나, 어조 자체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리오는 잠깐 말문을 잊은 채 침묵하고 말았다.
“그건…….”
“잘하고 있다.”
“…네?”
“넌 잘하고 있어.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
루카스의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마음속에 잠긴 먹구름을 모두 몰아내려는 듯, 환하게 빛나는 광휘가 너무나도 눈부셨다.
“말했잖아. 너는 언제나 공포를 마주보려 하고 있다고. 그건 쉽지 않은 일이야.”
“그저 생각하는 것 따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음엔 더 열심히 해야지. 내일은 오늘이랑 다를 거야. 그딴 안일한 생각은, 누구나가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서 숭고한 결심이라도 하듯 반복하죠. …예. 반복될 뿐이죠. 다음 날이 되면 다시금 결심은 희미해지고, 나태해진 자신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그 의지를 흐리게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리오는 그러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겐 시기가 있다.”
“시기……?”
“그래. 천명이나 운명이라고도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개화의 때’라고 부르고 있단다.”
“…개화의, 때.”
“그저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야. 늦게 피는 꽃이라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루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리오는 가슴이 턱 막혔다.
단지 웃는 모습에서, 느껴졌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그가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네가 피울 꽃이 그 어떤 꽃보다 찬란하리라 믿고 있다.”
주륵.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를 이토록 믿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해는 간다. 악마 앞에선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지도 못한다. 매 임무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냥꾼에게, 그런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어째서 저를 그렇게 믿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스승의 역할이니까.”
루카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를 믿고 있나?”
“…네.”
“그럼 나의 안목도 믿어다오. 내가 보고 판단한 리오 프리먼은, 결코 이 정도 좌절에 무릎 꿇을 남자가 아니야.”
“…스승님.”
“네가 피울 꽃을 기대하겠다.”
* * *
루카스가 병실에서 나오자, 바깥엔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녀가 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세디 글라스턴.
…아니. 이제 세디 트로우맨이라고 해야 되나. 그녀는 필멸자가 된 이후, 이상하게 루카스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시큰둥한 얼굴로 병실 안을 가리켰다.
“쟤도 아버지 제자야?”
“그래.”
“진짜 괴짜라니까.”
루카스는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
“세디, 넌 아버지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보다 크고 강해서, 나란 존재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그럼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내가 너보다 강하기 때문인 건가?”
“그래. 지금 이 우주에서 나보다 강한 건 네 명밖에 없으니까.”
절대자 넷을 말하는 것이다.
노디에소프, 레티프, 루카스. 그리고 카사진까지.
확실히 그들 중에서 그나마 세디에게 호의적인 건 루카스밖에 없었다.
아예 사이가 나빠 보이는 노디에소프와 그녀를 이 꼴로 만든 카사진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그나마 중립적인 레티프도 그녀에게 있어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기분 나쁜 자식일 뿐이니까.
“나는 딸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어.”
“알아. 한 번도 못 했다며.”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 너와 내가 일반적인 부녀 관계가 아니란 건 알겠다.”
“일반적인 부녀 관계?”
세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세디에게 그러한 동작에선 나이에 걸맞은 순진무구함이 느껴졌다.
“그게 어떤 건데?”
“나도 몰라.”
“…뭐야. 그게. 말장난하는 거?”
“아니. 말했잖아. 나도 딸을 가진 적이 없다고.”
친구나 스승, 부모 사이에 형성된 유대관계에 대해선 알고 있다.
최근 들어선 제자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루카스도 자식이란 존재를 가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감조차 낯선 관계였으나, 그는 한 번 형성된 이 유대를 허투루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그가 낳은 자식은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고찰하고, 서로에게 가장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
루카스는 그리 생각하며 세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생각하겠다.”
“뭐를?”
“아버지가 딸에게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이상적인 부녀관계란 어떤 것인지.”
“…….”
세디는 잠시 멍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이다.
방금 했던 루카스의 말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 깊숙이 닿았다. 상실된 무언가가 일시적으로 채워지는 느낌. 그건 세디에게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그러니 너도 진지하게 고심해 다오. 아버지란 존재에게,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이상하게 루카스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세디는 고개를 홱 돌린 채 말했다.
“그, 그러시든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디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발끝으로 애꿎은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