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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76화 (297/857)

외전 76화

“세디 글라스턴, 너는 앞으로 어쩔 거냐?”

“어쩔 거냐니…….”

그렇게 물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악마왕과 다시 싸우고 싶어.”

“…….”

“그래서 뺏긴 걸 되찾고, 그놈이 갖고 있던 것까지 모조리 뺏고 싶어.”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세디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다 잃었어. 절대자의 외력은 사라졌고 마기도 뺏겼지. 소울 웨폰도 불러내질 못해. 이 꼴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전부 잃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네가, 대체 뭘 안다고.”

세디가 그리 말하며 루카스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즉시 후회했다. 루카스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걸 본 순간 자존심에 상처가 생긴 것이다.

“…날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눈동자로 보고 있으니까.”

“한심하게 여기진 않아.”

루카스의 목소리가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저 우습고, 처량하고, 가엾고, 비참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뭐라고?”

세디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으려던 순간이다.

“─팔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발도 있다. 눈이 있다. 귀도, 코도, 입도 있다. 너에게는 육체가 있다. 사고思考가 제한된 것도 아니지. 그런데 가진 게 없어? 전부 잃었다고? 비웃음조차 안 나오는군.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럼 이 연약한 몸뚱이로 절대자랑 맞서라는 거냐?”

“안 될 게 뭐가 있지?”

“자살행위야.”

“단정 짓지 마라. 그에 한없이 가까운 행위일 뿐이지, 자살은 아니야.”

“…너.”

세디가 복잡한 시선으로 루카스를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충고… 가 아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루카스가 걸어온 발자국이 보이는 듯했다. 그가 가진 처절한 기억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비록 실낱보다 희미할지라도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도 만약 혼자 싸우는 게 두렵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도와준다고? 어떻게.”

“너를 내 화신化身으로 삼겠다.”

“화신……!”

세디가 놀란 목소리로 그 단어를 내뱉었다.

절대자의 외력을 빌릴 수 있는 존재.

“…너, 이 우주에 제법 오래 머문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신을 구하지 않았던 거냐?”

“내 외력을 버틸 만큼 완성된 자는 없었으니까.”

그나마 최근에 만난 크란 정도가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에 걸칠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디 정도의 그릇이라면 충분하다. 자신의 외력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내 화신이 된다면 다시 절대자가 될 수 있게끔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겠다.”

“…힘든 길이 되겠군.”

“그래. 일전보다 몇 배는 더 고되겠지. 잘 생각해라. 내 화신이 된다는 건, 검은 가시의 마왕과도 완전히 반목反目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니까.”

마지막 말이 특히 세디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검은 가시의 마왕.

그녀가 진심으로 따랐던 군림자.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그를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마왕이 자신이 아닌 카사진을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바보처럼 그를 계속 따르고 싶었다.

그게 바로 군림자란 존재가 가진 존재감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만물의 꼭대기에 군림할 운명을 타고난, 우주적 존재.

하지만… 세디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 고고한 자존심은 한 번 자신을 내친 존재에게 다시 한 번 복종하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루카스를 보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런 군림자 전원과 적대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절대자였다.

미치광이.

확실히 그를 표현하는 데 그 이상으로 적합한 단어는 없겠지.

어쩌면 절대자들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투쟁을 이어 가고 있는 게 바로 루카스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군림자가 넷이 아닌 다섯이었고, 그중 하나가 루카스였다면…….

“하하하.”

세디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루카스란 존재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좋아. 너의 화신이 되겠다, 루카스 트로우맨. 대신… 한 가지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뭐지?”

“…….”

세디의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감돌았다.

그에 따라 루카스도 어느 정도 진지한 태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절대자였던 그녀가, 군림자도 아닌 루카스의 밑에 들어오는 것이다. 화신이니 뭐니,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그것이 진실이다. 세디로선 상당히 자존심에 흠집이 날 만한 선택이니, 지금 입에 담을 제안은 상당히 까다로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세디가 입에 담은 말은 루카스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아버지.”

“…뭐?”

“너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

루카스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에 개의치 않고 세디가 말을 이었다.

“네 딸이 되고 싶다고.”

솔직히 단순 충격 면에서 보자면, 방금 전에 한 말보다 지금 발언이 훨씬 더 컸다.

“…그게 무슨.”

루카스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에 반면 세디는 순진하기까지 한 무표정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녀가 악의나 장난으로 이 말을 꺼낸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장난이 목적이 아니라면, 설마 이 충격적인 발언이 그녀의 진심이란 말인가?

“내가 네 화신이 된다며. 따지고 보면 네 혈족血族이 된 셈인데, 그럼 딸이라고 할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런 경우는.”

루카스는 순간 말을 멈췄다.

불현듯 이 허무맹랑한 발언이 나온 배경에 대해 약간의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절대자들 중에선 자신이 따르는 군림자를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 부르는 자들이 더러 존재했다.

물론 지금의 세디는 절대자가 아니고, 자신 또한 아직까진 다른 절대자를 받아들일 만한 역량은 없었다.

루카스가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자, 세디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놀랍게도 그녀는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정 싫다면, 그냥 안 그러고.”

“…….”

그 시무룩해진 옆얼굴을 보자 세디의 심정이 살짝 이해가 갔다.

지금 그녀는 검은 가시의 마왕에게 버림받은 상태다.

절대자는 군림자를 따르는 것만으로 강한 충만함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어느 우주에서나 이방인이며, 고독과 평생을 함께해야 되는 절대자에게 더없이 달콤한 과실이다. 세디 또한 마왕을 따르며 그 달콤함을 원 없이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디는 절대자의 외력과 마기를 모두 빼앗긴 채 한낱 필멸자가 되었다. 당연히 군림자에게서 느낀 충만함과 소속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상태로 우주에 홀로 남은 듯한 고독만을 끌어안고 있겠지.

멀쩡하게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그녀는 의지할 보금자리, 혹은 자신을 지켜 줄 방벽 따위가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건가.’

그녀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어떤 건지 보이는 듯했다.

루카스는 침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어? 허락해 주는 거야?”

“네가 정 그걸 바란다면.”

세디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기를 뺏기고 음울함이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일까.

루카스는 세디에게서 일전과 전혀 다른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 거냐?”

“…….”

루카스는 도무지 입이 떼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러자 세디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확 밝아졌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한다, 아버지!”

루카스는 자식이 없었지만, 방금 게 아버지에게 쓸 말투가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살짝 세디를 내려다보자, 오히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리 벌레 씹은 표정이야?”

“…적응 안 되는 호칭이라서.”

“내숭은……. 아버지도 절대자면 적어도 수만 년은 살아왔을 거 아니야. 그동안 여자도 많이 만났을 거고, 씨도 인정사정없이 뿌려 댔겠지.”

“아니. 그런 적 없어.”

“그래도 자식 몇 명 정도는 낳았을 거 아니─”

“없다.”

루카스가 말을 끊고 단언하자 세디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진짜?”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하겠나.”

“…근데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해도, 자식이란 게 안 가지고 싶다고 안 생기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기적과 기적이 겹쳐서, 태어난 자식이 한 명쯤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일은 없어. 한 번도 안 했으니까.”

“…….”

그러자 이번엔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다.

세디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했다.

“미안.”

“사과 안 해도 된다.”

“아니. 그, 진짜 미안. 몰랐어.”

“…….”

* * *

“‘루시안’은 용병 출신이다. 그렇기에 실력만큼은 확실하지. 미국 본부에서도 그처럼 다재다능한 사냥꾼은 몇 없어. 루시안이 가진 폭넓은 경험과 침착함은 유사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레나’는 정령사인데, 불과 얼음의 정령을 다룰 수 있지. 그녀가 가진 정령은 특히나……. 민하린, 내 말 듣고 있나?”

“아, 네. 죄송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민하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한 번에 수십 명의 인적 사항을 비교하는 건 제법 피로도가 쌓이는 작업이니까. 요령이 없다면 더욱 그렇지. 많이 힘들다면 여기서 더 간추려서 명단을 주겠다.”

“아뇨. 괜찮아요.”

빈센트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지금 미국 본부에서 그보다 바쁜 사냥꾼은 없을 것이다. 해야 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이 이상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민하린은 리스트를 훑어보며 물어봤다.

“시간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나요?”

“추려 낸 사냥꾼을 호출하고 사정 설명하는 걸 고려하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새벽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시간은 막 오후 11시를 지나고 있다.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빠듯하다.

민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시간 내로 말씀드릴게요. 일 보셔도 돼요.”

“…괜찮겠나?”

“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실례하지.”

그리 말하고 빈센트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할 일이 산재해 있는 모양이다.

민하린은 홀로 남은 방에서 식은 커피를 후룩 마셨다. 리스트를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다른 생각 때문에 뒤죽박죽이다.

‘…아마도 저는요. 프레이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조안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잔뜩 분위기를 잡은 것치고, 뒤에 이어지는 말은 별 볼일 없었다.

프레이 블레이크, 즉 루카스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인 것 같다. 어쩌면 마도학회장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사 중 가장 강하다…….

당연한 말이다. 민하린의 스승은 마도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루카스보다 마법에 대해 깊게 알고 있지 못하다.

뒤이어 조안나는 루카스가 대마도사의 간택을 받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민하린 입장에선 헛웃음이 나왔다.

대마도사. 혹은 마도화신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존재. 그게 그녀의 스승임을 알고 있다. 선택을 받은 게 아닌, 스승이야말로 그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뒤척이게 만든 건 바로 다음 말이었다.

‘저처럼요.’

K22

‘…저처럼?’

조안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 저도 대마도사의 간택을 받았거든요.’

뒤이어 민하린은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짧게 들었다.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버렸을 때 문득 들린 목소리.

대마도사의 목소리.

그 얘기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조안나를 도와준 게 루카스라는 것을.

조안나는 그 목소리 덕분에 자신의 실력을 발전시켰고, 7성의 경지에서 한층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제야 민하린은 그녀의 달라진 태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루카스가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마도학만이 아닌, 인성까지도.

‘왜 나였을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물론 자신의 재능이 그리 부족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다.

당장 조안나만 봐도 그렇다.

달칵—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들어왔다. 민하린이 앗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용무는 끝나셨나요?”

루카스는 왠지 모르게 피곤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 서류는?”

“사냥꾼 인적 사항이에요. 이번에 한국으로 같이 갈 사람을 구하고 있거든요.”

“그건 더 이상 안 구해도 돼.”

“네?”

“조력자를 구해 왔으니까.”

그제야 루카스의 뒤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곳엔 뚱한 얼굴의 소녀가 서 있었다.

먹물보다 진한 검은색 머리카락, 그에 대비되는 새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예쁘장한 소녀.

“그 아이는 누구예요?”

“아이? 하.”

소녀가 냉소를 터뜨렸다.

루카스는 힐끗 소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나의…….”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나.

루카스가 고민하며 말끝을 흐리는 순간 소녀, 세디가 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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