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73화 (294/857)

외전 73화

“사제, 몸은 좀 괜찮아?”

“네. 이제 괜찮아졌어요.”

“…….”

리오가 그렇게 말하고 옅게 웃었다. 힘없는 미소라는 게 확연하고 피골도 상접하다. 몇 날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럼에도 민하린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국에 있을 두 명의 동생이 떠올랐다. 비록 그들과 성향은 다르지만, 이렇게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될 순간에도 고집을 부리는 건 참 비슷했다.

이럴 때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건 오히려 역효과다.

‘이해도 되고.’

오공작에게 며칠간 붙잡혀 있었다.

아직 악마에 대한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지도 못했는데, 그들의 정점에 선 존재와 대면한 것이다. 뱀 앞의 개구리 이상으로 전신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캐나다 지부를 지키던 사냥꾼들은 대부분 죽고 말았다.

살아남은 건 리오뿐.

비슷한 사건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리오에겐 재앙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난 것이었다.

민하린은 하나뿐인 사제의 얼굴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밥 좀 잘 챙겨 먹어. 여기서 더 마르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우리요?”

“스승님도 많이 마르셨잖아. 빼빼 마른 인간들끼리만 뭉쳐 다닌다고 흉볼지도 몰라.”

“하하.”

리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요.”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육체를 관리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비중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무술이란 원래 육체를 갈고닦는 것에 그 근원을 둔다.

그럼에도 딱딱한 훈계 대신, 농 섞인 조언을 건네는 민하린의 배려가 고마웠다. 누나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스승님을 뵙고 왔죠?”

“응.”

“어땠나요? 일은 잘 마무리하신 것 같았나요?”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민하린이 말끝을 흐리자 리오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떠올리고 있는 건 조안나 골드버그였다.

첫 만남 때 잊을 수 없는 무례를 저지른 여자. 처음에 그 여자와 루카스가 같은 임무를 받고 아프리카로 향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물론 루카스가 걱정됐던 건 아니다. 민하린은 자신의 스승이 위기에 처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에게 무례를 저지를 조안나를 떠올리니 불쾌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의 모습에서 민하린은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른다. 다만 전에 없던 독특한 기류가 둘 사이에 형성됐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물론 아무런 확증도 없는 단순 추측일 뿐이다.

사실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일도 없었고, 민하린의 생각은 착각이나 오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민하린이 했던 생각은 죄다 망상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망상을 리오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민하린이 고개를 저은 순간이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민하린과 리오는 루카스가 돌아온 줄 알고 밝은 목소리로 입실을 허락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가 아니었다.

“…빈센트 씨?”

“잠깐 괜찮겠나?”

빈센트가 평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민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리오를 보며 말했다.

“상태는 괜찮아 보이는군.”

“네. …그런데 빈센트 씨는 회의가 있지 않으셨나요? 벌써 끝난 겁니까?”

“아니. 회의는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지.”

거기까지 말한 뒤, 빈센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한동안 침묵했다.

먼저 찾아왔음에도 이런 태도라니. 쉽게 입에 담지 못할 화제란 건가?

민하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먼저 입을 열어줬다.

“저기. 닐 협회장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좋지 않아. 당장 목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 말에 가장 표정이 어두워진 건 리오였다. 닐이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오는 그 사실에 강한 죄책감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빈센트의 시선이 민하린에게 향했다.

“…민하린, 너는 한동안 한국 지부에서 활동했었다고 들었다.”

“아. 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 전체가 그녀의 거점이었다. 물론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칠 곳은 한국이 맞다. 다른 어떤 땅보다 조국의 평화를 이룩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었으니.

사실 요즘 시대엔 드문 경우기도 했다. 근래처럼 국가 간 구분이 희미한 시대에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와서 사냥꾼에게 상대의 나라를 묻는다는 행위는, 출신지보단 어느 지부에 속했는지 알기 위한 의미가 더 컸다.

“급히 한국으로 가야 될 일이 생겼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나.”

“한국이요? 거기는 왜……?”

“그건…….”

빈센트는 눈을 깜박이는 민하린을 향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민하린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

마침내 모든 사정을 들은 민하린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구세의 성자.”

삼마엽 중 하나인 남자.

가톨릭의 쟁쟁한 추기경이나 교황을 넘어서는 신성력을 다룬다는 소문을 언뜻 들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여럿 있었으나, 그중 하나는 호주에서 세운 일대 업적 때문이다.

“후작 다섯을 죽이고, 죽은 이들을 살려냈다던데…….”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목격자들의 증언이 끊이질 않아.”

사실 후작 토벌보다 더 충격적인 건 죽은 사람을 되살려 냈다는 사실이다.

부활復活.

그가 성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물론 빈센트나 민하린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냥꾼이 그 소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다른 소문. 예를 들어 같은 삼마엽인 크란이 단신으로 공작을 토벌했다는 것보다 훨씬 신빙성이 없었다.

“…그를 찾는다는 건, 미국에선 성자의 진가眞價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삼마엽에 대해선 우리도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빈센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솔직한 발언이었다.

그나마 위치가 노출되어 있고, 단독으로 움직이며, 평소엔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크란과 달리, 나머지 둘은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데 신경 썼다.

한 번도 외부적으로 모습을 노출시킨 적이 없는 흑마녀, 혹은 목격담은 이어지지만 생김새에 대한 증언에 일관성이 없는 성자.

거기에 둘 모두 그들을 뒷받침하는 세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흑마녀는 <밤의 장막>

성자는 <영생교>

두 세력 모두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두 명의 삼마엽에게 광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다.

“…….”

민하린은 빈센트의 중얼거림에서 반쯤 자포자기적인 체념이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는 리오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한국과 이어지는 통신 라인은 알고 있어요.”

“정말인가?”

민하린은 크게 반응하는 빈센트의 시선을 부담스러운 듯 피하며 말을 이었다.

“네. 하지만… 그들은 제가 아닌 다른 외부인에겐 워프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동행인 형식으로 말을 맞춘다고 해도 둘, 아니. 셋 정도가 한계일 테구요.”

“그런가…….”

반색하던 빈센트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결심을 굳힌 듯 민하린을 보았다.

그리고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 빈센트 씨?”

“염치없는 행동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밖에 남은 수단이 없어. 부탁한다. 협회장님을 살려다오.”

쿠웅.

빈센트의 이마가 바닥을 찧었다.

“제발 부탁한다.”

민하린은 한동안 말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루카스가 리오의 병실을 찾았을 때, 방 내부엔 무거운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아, 스승님.”

“오셨군요.”

그럼에도 루카스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을 바꾸고,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선 리오에게 말했다.

“리오, 용태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리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카스는 잠시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네.”

“알겠다.”

루카스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이번엔 시선을 돌려 민하린을 보았다.

“전보다 훨씬 기도가 안정되어 있구나. 아까 보았던 빈센트란 남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지?”

“아, 네. 많은 참고가 됐어요.”

한눈에 그 사실을 깨닫다니. 역시 스승님이다. 민하린이 그리 생각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무슨 일 있었나?”

그 갑작스런 말에 민하린은 순간적으로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에 적혀 있어서.”

민하린이 슬며시 얼굴을 매만지자, 루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이다.”

“…….”

그리 말하는 루카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민하린은 루카스의 태도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스승님이야말로,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민하린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결정적인 건, 그녀에게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민하린에게 너무나도 큰 존재였으니까. 그런 스승이 안고 있는 고민은 또 얼마나 클까. 그리고 그걸 들었을 때 민하린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려무나.”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투였다.

민하린은 치밀어 오르는 위화감을 꾹 참으며, 빈센트에게 들었던 얘기를 간추려서 말했다.

“…….”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카스는 한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스승님께 상담하고 싶어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도와주고 싶어요.”

민하린은 그리 말한 다음 살짝 리오 쪽을 곁눈질했다.

“사제를 구해 줬으니까요. …그리고 협회장은, 아직 죽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건 루카스도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닐은 아직 죽어선 안 된다. 물론 그가 가진 편향적인 시각엔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아직 인류에겐 닐 플란드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나도 성자에겐 볼일이 있으니까.”

“스승님도요?”

“그래. 니나의 치료를 부탁해 볼 생각이다.”

“아……!”

민하린이 반색했다.

니나 레드니코바.

아시아 사냥꾼들과의 싸움에서 심각한 중상을 입은 그녀는, 특히 안구에 심각한 저주를 받고 말았다. 진단 결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성자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분명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저를 포함해서 4명까지 한국으로 갈 수 있어요! 저랑 스승님, 그리고 아마 빈센트 씨도 같이 가려고 할 테죠. 나머지 한 명은…….”

그녀의 시선이 리오에게 향했다. 루카스의 눈동자도 그를 따랐다.

리오는 분명 그들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

“저는.”

쥐어짜듯 나온 목소리엔 깊은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리오의 담담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번에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