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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7화 (288/857)

외전 67화

“…….”

엘리저는 설명을 마친 뒤,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루카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징가에도 워프 기기가 있더군. 많이 낡았고 구식 모델이긴 하지만, 어떻게 운용은 될 것 같소. 곧바로 출발하겠다면 지금 바로 정비를 시작할 예정인데… 어쩌겠소?”

이미 미국의 허락도 떨어졌다. 그들은 아직까지 회색 태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협회장 지시로 워프 라인을 개설하는 것엔 반발을 표하지 않았다.

엘리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비록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미국과 연결점 하나가 생긴 셈이니까.

그놈들 행태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미국이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시해야 되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깟 자존심 따위 백 번이고 버릴 수 있다.

루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작 이 정도로 뭘. 아직 갚아야 될 빚이 산더미인데.”

엘리저는 싱겁게 웃고는 방을 나섰다.

“…….”

그가 떠나자 방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카스는 무언가 진지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조안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오라면 당신과 같이 있었던 그 소년이죠?”

“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안나도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서 침묵했다.

아니. 사실 그녀 또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캐나다 지부가 함락되다니.’

물론 함락된 건 캐나다 땅 전체가 아닌, 온타리오 주州의 토론토(Toronto)였다. 그럼에도 경악할 만한 일인 건 분명했다. 조안나는 그곳의 지부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르셀 모건.

절정무인이자 캐나다의 지부장. 그리고 실질적으로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평의원 중에서도 상당한 입김을 가진 사내다.

딱 한 번, 우연히 참가하게 된 미국 지부 회의에서 직접 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닐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닐 또한 그를 꺼린다는 것을 그때 회의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둘의 사이는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쉽게 죽을 남자는 아니란 거다.

…상대가 오공작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확신했을 텐데.

조안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찰나였지만 굴라드가 보여 준, 상식을 벗어난 힘을 몸으로 느꼈다.

그건 재앙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안나는 아직까지 그 괴물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기절해 있을 동안 악몽을 꿨다. 굴라드에게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빨려 미라처럼 죽어가는, 끔찍한 꿈이었다.

‘그래서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스스로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자각하게 되어 우울해졌다.

‘…오공작.’

여태껏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만 움직였던 최고위 악마들이, 최근 들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건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그녀는 다시 한 번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

겁에 질린 조안나와 달리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엘리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음에도 그랬다.

묘한 느낌을 주는 얼굴.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혹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루카스가 눈동자를 돌려 조안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조안나는 심장이 덜컥하는 느낌을 받으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의 그녀로선 감히 루카스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뭐?”

장미공작 로즈는 눈앞에 있는 흐릿한 형상의 남자를 보며 반문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이 부릅떠져 있었고, 커다란 경악을 함유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흐릿한 남자, 아자젤이 대답했다.

[굴라드가 죽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게 묻기 직전, 로즈는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자제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허언을 입에 담지 않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오공작의 죽음이다. 농담 삼을 만한 화젯거리가 아니다.

로즈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대체 누가?”

[루카스 트로우맨.]

그 이름에 로즈가 흠칫 굳었다. 그녀는 짙은 불신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아자젤을 보았다.

“뭐라고?”

[루카스 트로우맨이 굴라드를 죽였다. 로즈, 만약 그 남자의 소재를 파악하게 돼도 혼자서 건들지 마라. 우리가 상대할 자가 아니야.]

“…….”

로즈가 납득 못 한 얼굴로 침묵하자 아자젤이 덧붙였다.

[이건 왕께서 직접 내리신 엄명이다. 그 남자를 죽이는 건 왕의 업무야.]

그럼에도 로즈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루카스 트로우맨. 익숙한 이름이다.

알고 있지. 알고 있다마다.

그 남자는 로즈에게 있어 더없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왕이, 그 남자를 죽이려 하신다고?’

그 사실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으나, 그보다 앞서는 건 짙은 쾌감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만약 내가 그 남자를 죽인다면.

이 저열한 욕망을 채움과 동시에, 왕의 총애까지 독차지─

생각은 거기서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너는 옛날부터.]

아자젤의 스산한 목소리에 로즈가 흠칫 몸을 떨었다.

[종종 왕의 뜻에 따르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고개를 들자 가라앉았으나,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가 보였다.

[이번 건에 한해선 그런 태도를 개성이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 그저 불복不服이지. 알겠나. 왕께 있어 더없이 중요하고, 민감한 일이라고. 허튼짓거리는 하지 마라. 이건 네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로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믿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아자젤의 형상이 안개처럼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잠깐, 아자젤. 지금 폐하와 같이 있는 건가?”

[왕께선 지금 자리를 비우셨다.]

또?

“다시 수행을 시작하시기라도…….”

[그건 아니야.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아시아 쪽에 갔다는 것 빼고는. 무슨 일이지? 왕께 보고해야 될 게 있나?]

“…그.”

그 순간 로즈는 반쯤 떼졌던 입을 잠시 닫으며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

아자젤이 말없이 고적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어. 그 정도도 용납 못 하는 걸까, 우리 대공께서는?”

[그건 아니지. 너 또한 오공작. 알현할 권리는 지니고 있다.]

아마도 아자젤은 로즈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 않나.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라고. 이제부터 로즈가 내릴 선택에 대한 결과는 오직 그녀가 치러야 될 것이다.

스으으.

비로소 아자젤이 완전히 사라졌다.

로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덩굴에 둘러싸인 채 축 늘어진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흠.”

이 상황.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로즈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났다.

* * *

필스카이 타워엔 지하 시설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지하 공간이 아니다. 지상에서 무려 수 킬로미터나 밑에 존재하는 공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는 다섯 명조차 되지 않는다. 시설물을 세운 건축업자들도 일부러 여럿 고용했고, 작업이 끝난 다음엔 기억조차 지웠다.

물론 협회장인 닐 플란드는 당연히 인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심지어 지하 시설은 177층, 다시 말해 닐의 개인 공간과 직통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까지 존재했다.

그중 한 층.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희미한 조명과 함께 투박한 복도가 드러났다. 그의 목적지는 복도 끝에 있는 통신실이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이어가지 못하고 멈췄다. 복도 중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닐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좀 궁금해서. 여긴 왜 온 거냐?”

그리 말하며 레티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도 궁금한 게 있습니까? 무엇이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지全知는 함부로 입에 담을 개념이 아니란다, 필멸자여.”

“…….”

그는 씩 웃으며 통신실을 가리켰다.

“악마와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통신실]은 한동안 안 찾던 것 같던데 무슨 바람이 분 거냐?”

“대답해야 됩니까?”

“아니. 근데 내가 알기로, 넌 루카스한테 더 이상 악마와 거래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 같아서.”

“…….”

그 얘기는 레티프가 있는 곳에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닐은 크게 놀라지 않고, 오히려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엿들으셨군요.”

“딱히 훔쳐 들을 의도는 없었어.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에, 우연히 내가 있었을 뿐.”

“세간에선 그걸 두고 엿듣는 거라고 말하죠.”

“그런가.”

“그리고 당신이 신경 쓸 일도 아닙니다.”

닐의 목소리엔 싸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비켜 주지 않겠습니까? 좀 급해서. ”

“그러지.”

그 태도에도 레티프는 능글맞게 웃으며 길을 비켜 주더니, 훅하고 사라졌다.

어쩌면, 모르지. 아직까지 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그가 작심하고 스스로의 기척을 감춘다면, 닐 플란드는 결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아예 신경을 끄기로 했다.

레티프는 언제나 그랬듯 본인의 흥미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존재다. 속내를 읽으려고 해 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할 일을 수행하는 게 훨씬 낫다.

다행히도 여태껏 그는 닐이 무슨 짓을 하든 깊게 관여한 적이 없었다.

간단한 지문인식과 홍채인식,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문이 열렸다.

내부에는 조촐한 컴퓨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도태된 CRT 모니터, 흔히 브라운관이라고 불리는 종류였다.

달칵.

옆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누르자 본체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잠시 기다리자 곧 화면에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연락 보낸 지가 언젠데, 많이 늦었네.]

노이즈 섞인 목소리에 화질도 흐릿했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성적인 이목구비였다.

화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장미공작 로즈였다.

“상황은?”

[좀 죽이기는 했는데, 별로 많지는 않아.]

“…….”

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짤막하게, 언제나 그랬듯 본론으로 넘어갔다.

“원하는 걸 말해라.”

[이 꼬맹이, 보여?]

덩굴에 휩싸인 채 축 늘어져 있는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에게 무왕권을 가르친 사람을 찾아내서, 여기로 보내.]

닐은 무왕권이 뭔지 모른다.

다만 리오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안다.

“네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야.”

[누가 네놈에게 그딴 걸 물었나?]

로즈가 불쾌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넌 그냥 대답이나 하면 돼. 여태까지처럼. 어쩔 거야?]

잠시 생각하던 닐이 말했다.

“지금 그는 미국에 없어. 당장은 힘들지만, 최대한 빨리 보내도록 하지.”

[좋은 자세야, 닐 플란드.]

로즈가 빙긋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거래는 당분간 더 이어지겠군.]

“…….”

닐은 대답하지 않았고, 모니터가 암전됐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모든 건 미국을 위해서.”

결심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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