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3화 (284/857)

외전 63화

북아메리카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의 토론토(Toronto).

캐나다 최대 도시이자 경제 수도였던 장소는 지금 폐허가 되어 버렸다. 건물은 무너졌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뿌옇게 만들었다. 거리엔 뒤집어진 차량과 시체로 가득하다.

그건 여태껏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캐나다 주민들에게 낯설고 두려운 광경이었으나, 장미공작 로즈에겐 공기처럼 익숙했다.

그녀는 붉은빛을 띠는 위스키로 목을 축이며 느긋하게 폐허가 된 도시를 감상했다.

유리 너머로 펼쳐진 살육의 향연. 처음 이곳의 모습을 보다 뚜렷히 기억할수록, 이 파괴의 흔적은 보다 강한 자극이 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정말 바퀴벌레 같다니까. 안 그래?”

혼잣말이 아니었다.

슬쩍 뒤를 바라보자, 그곳엔 눈에 확 들어오는 외견의 소년이 온몸이 결박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리오 프리먼은 로즈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로즈는 새빨간 입술을 살짝 틀어 올리며 리오에게 걸어왔다. 굽 높은 하이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내 비유가 조금 올드 했나? 인간들은 끈질긴 놈들을 보고 바퀴벌레라고 표현한다 들었는데.”

별로 그렇진 않다. 아직까지도 쓰이고 있는 표현이니까.

다만 이 악마가 입에 담은 ‘바퀴벌레’는 도시 곳곳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인간들을 비유한 것이었다. 리오가 그딴 말에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었다.

“왜…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겁니까.”

리오는 그리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전신의 떨림이 멎을 생각이 없다. 그녀가 보여 줬던 학살극이 뇌리에 선명하게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이 여자, 돌연 토론토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공작은 출현과 동시에 일대를 쓸어 버렸다. 지면에서 치솟은 핏빛 덩굴은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인파를 잡아먹으며 혈무血霧를 피웠다.

피해자엔 리오의 스승이 될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동양의 이름 높은 무인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뛰어난 고수였으며, 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인재였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녀는 초월적인 권능으로 남자의 전신을 덩굴로 속박한 뒤 그대로 터뜨렸다.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사냥꾼은 1초도 버티지 못하고 핏물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오공작 중 하나일 것이다. 리오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에 대해선 단순히 소문으로만 들었다. 공작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대공大公이라고 불리는 존재. 실존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마주하는 순간 전신의 세포가 외쳐 댔다.

이 여자가 오공작이라고.

그녀는 뒤이어 캐나다 지부에 있는 사냥꾼들을 전멸시키고, 주변 일대를 완전히 쓸어 버렸다.

딱 한 명.

리오만을 남겨 둔 채.

‘한심하다.’

스승을 만나고, 민하린을 만나고, 제라르를 이겼다.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즈가 학살극을 시작할 때 리오는 무엇을 했나. 대부분 얼어붙어 있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몸뚱이를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로즈는 아무런 위압감도 발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리오는 조금이라도 정신을 헐겁게 했다간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고작해야 마수 앞에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던 리오 프리먼이었다. 반면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마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다.

사실 이 자리에서 졸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리오에겐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몇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리오가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로즈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난 얼마 안 죽였어. 기껏해야 여기 있는 사냥꾼 좀 손봐 준 게 다잖아.”

그 말에 리오는 말문을 잊고 말았다.

얼마 안 죽이다니?

리오가 본 것만 해도 족히 수백 명 이상의 민간인이 덩굴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가 보지 못한 곳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적어도 수천에 육박할 것이다.

토론토는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었고, 이곳 주민들은 긴급 상황에 대비한 대피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일생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낸 리오에겐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평화에 젖었다는 거겠지. 로즈라는 재앙을 마주한 이들의 눈동자엔 공포보다 불신의 빛이 더 짙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었다.

악마가 왜 여기에?

“그럼 왜 나는 죽이지 않는 겁니까.”

“물어볼 게 있으니까.”

“…그게 무슨.”

“너 말이야.”

로즈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반짝였다.

“무왕권武王拳은 어디서 배웠지?”

* * *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크란은 그리 말하며 굴라드를 쏘아봤다.

“여기냐? 네놈이 무덤으로 선택한 곳이.”

“하하하.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그 주둥이는 닥치지를 않는군. 혓바닥을 뽑으면 좀 조용해지려나.”

굴라드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는 날개까지 집어넣고 있었다.

“이딴 후줄근한 조각상 세워 놓고 감상하는 게 네 취미냐? 참으로 안쓰러운 놈이군.”

대충 던진 말이었으나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그 말 취소해라.”

굴라드의 얼굴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크란이 그만둘 리가 없었다. 그는 입가를 비틀어 최대한 신경에 거슬리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

조각상. 제법 저것에 홀린 듯한 얼굴이지 않나.

‘그리고 아마도 놈의 역린은…….’

크란은 권총을 뽑아 쐈다.

탕!

마탄은 그대로 조각상 하나에 꽂혔다. 가장 중간에 있는 조각상. 크란이 짙은 위화감을 느꼈던, 홀로 이질감을 주는 그 조각상이었다.

탄알에는 여유가 없다. 그러나 크란은 확신했다. 이 한 발을 쏜 건 절대로 아깝지 않은 선택이다.

“으, 아, 아……!”

정말로 머리끝까지 화가 뻗치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굴라드의 뒤틀린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이이……! 감히……! 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왕의 조각상을……!”

뒤틀린 얼굴은 서서히 인간의 형상을 벗어났다. 깔끔한 인상의 중년인은 사라지고, 인간과 박쥐를 합친 듯한 끔찍한 몰골로 변해 간다.

아니. 애초에 놈은 인간이 아니니 저것이야말로 본모습일 터.

“찢어 죽이겠다……! 네놈을 찢어 죽여서… 박쥐 먹이로 삼겠다……!”

“직접 먹겠다는 거냐, 배트맨?”

크란은 지옥에서 들끓는 목소리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굴라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괴성을 내지르며 크란에게 달려들었으나.

직후 그의 전신이 바닥에 처박혔다.

쿠직!

“……?!”

순식간에 지면에 반쯤 파묻힌 굴라드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몸뚱이를 뒤틀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마라.”

“…….”

크란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의 조각상 중 하나, 로브를 둘러싸고 있는 조각상의 어깨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루카스.

그 순간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저 회색 머리의 남자와 조각상. 전혀 다른 이목구비와 생김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흡사하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같은 사람인 듯한.

“크아아아!”

굴라드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을 옭아맨 속박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때 루카스가 밑으로 내려왔다.

크란의 눈에 의구심이 피었다.

뭐지? 이 남자는 지금 대체 무슨 힘을 쓰고 있는 거지?

마법이 아니다.

“너, 대체 저놈에게 무슨 짓을…….”

크란은 말을 하다 입을 닫았다. 루카스의 눈에서 생전 처음 보는 힘이 느껴졌다. 루카스는 그대로 크란을 지나쳐 굴라드의 등을 짓밟았다.

“크윽!”

“묻겠다. 중간에 있는 저 조각상, 저게 정말로 너희들의 왕인가.”

루카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크란은 그 모습을 약간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남자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 녀석을 만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당황하는 얼굴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지금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냉정해 보이지만,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지금 이성을 반쯤 잃었다.

그가 가리킨 조각상.

크란이 탄알로 쐈던 그 조각상 때문인가?

‘이곳에 단 하나 존재했던 [악마상].’

그렇다.

이곳에 존재하는 다섯의 거대 조각상 중,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고 있던 건 가장 중앙에 있던 악마상뿐이었다.

“끄, 끄으으……!”

“말해라.”

루카스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굴라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

“말해.”

보다 못한 크란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뽑아낼 정보가 있는 거 아닌가?”

“…….”

“그러다 죽는다.”

그 말에 루카스가 힘을 거뒀다.

고통에서 벗어난 굴라드가 멍한 얼굴로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이, 이 힘……. 역시… 난 널 이길 수 없었군. 그래. 넌… 루카스라고 했지. 설마 네가 정말로… ‘루카스 트로우맨’이냐?”

트로우맨.

이 세계에서, 루카스는 자신의 성을 단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마도사다.”

“……!”

그 말에 굴라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고, 크란 또한 슬그머니 눈가를 좁히며 루카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놈이 대마도사라고?’

링고링고에게 들은 적이 있다.

대마도사인지 마도화신인지 뭔지 하는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마법사들 사이에 도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설마 실존한 데다 바로 옆에 있었다니.

“그럴… 수가…….”

“이제 설명해라. 저게 누구인지.”

이번에 그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왕이다.”

“헛소리. 그 녀석이 너희들의 왕일 리 없어.”

“크, 크크……. 죽음 직전에도 나를 모욕할 셈이냐.”

굴라드가 비죽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안광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왕. 저분이야말로 우리의 왕이다……. 만마의 군주이며 유일무이한 마계의 패자……. 겨룰 이가 사라져도 스스로의 단련을 포기하지 않는…….”

그 말에 루카스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며,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녀석은 죽었으니까.

하지만…….

비틀─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 우주에서 느꼈던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답을 내놓았다.

겨룰 이가 사라져도 스스로의 단련을 포기하지 않는 남자.

왕王이라는 단어를 누구보다 좋아했던 남자.

그렇기에 스스로를 무의 왕武王이라고 칭했고, 자신의 권법 또한 모든 무술의 으뜸이라 여겼던 남자.

‘이 우주에, 네 고향 출신의 존재가 하나 있다.’

루카스가 신의 말을 떠올리는 순간, 굴라드가 울컥 핏물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악마왕惡魔王 카사진 만세…….”

* * *

같은 시각.

북아일랜드로 돌아온 세디는 불온한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창백한 얼굴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디는 그가 악마이며, 불쾌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뭐냐, 네놈은.”

“이곳에 있는 악마와 마수를 죽였더군.”

“그래서?”

“너는 여기까지다.”

“날 죽이려고? 흐음. 너 혼자선 어려울 텐데.”

그러자 남자가 흐릿하게 웃었다.

“물론 나는 네 상대가 아니다. 이래 봬도 분수는 알고 있거든.”

그리고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어떤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니. 애초부터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저 ‘존재감’을 드러낸 것뿐이다. 바꿔 말하면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까지, 세디는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압도적인 거체, 그리고 흉악스러운 패기에 세디는 한순간 말문을 잊고 말았다.

“너는…….”

[세디 글라스턴.]

“어떻게 내 이름을……?”

[너는 오늘 죽는다.]

빠악!

‘커, 흑?!’

심장이 부서졌다.

우스운 일이다. 세디는 피를 흩뿌리며 날아간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

본신의 힘을 해방시켰다. 우주가 허용량을 버티지 못하고 삐걱댈 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루카스와의 약조? 중요하지만 그녀의 목숨만큼은 아니다.

세디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넌 죽는다, 세디 글라스턴.’

“빌어먹을.”

엿 같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레티프. 그 자식은 이 상황을 예견했단 말인가?

세디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소울 웨폰을 꺼내서, 거의 건물에 육박할 만큼 거대한 존재를 향해 겨눴다.

“악마왕.”

그래. 아마도 이놈이 악마왕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악마왕.

건방지게도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세디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마주하니 알겠군. 너도 ‘그분’의 수하 중 하나야.”

[…….]

그분, 검은 가시의 마왕.

세디의 주인인 군림자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디보다 격이 높다.

지배자? 아니… 그녀가 여태껏 만나 봤던 지배자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군림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 굴라드가 굴복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 애초부터 자신보다 ‘더 높은 격’에 복종한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자는 정말로 악마인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문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네놈 또한 그분의 수하인 주제에… 그런데도 감히 악마왕이란 이름을 자처하는 거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악마왕은 잠시 세디를 내려다보다 짤막하게 말했다.

[그게 네 유언인가?]

“하하하……!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 세디 글라스턴을?”

[그야 물론이다.]

악마왕 카사진이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우주에선 내가 제일 강하니까.]

* * *

“으하하하!”

레티프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힘’을 해방한 초월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노디에소프 또한 느끼고 있겠지.

“그래.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지.”

초월자 다수를 하나의 우주에 처박아 두고 힘을 쓰지 말라니?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좁은 우리에 길들일 수 없는 맹수 여러 마리를 욱여넣어도 이보다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루카스와 세디의 약조 따위는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뭐, 어차피 가엾고 연약한 세디는 오늘 밤 죽겠지만.

“기대되는군.”

진실을 깨달은 루카스가 어떻게 나올까.

그에 따른 노디에소프의 반응은?

악마왕은 어떻게 움직일 셈이지?

레티프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비로소, 비로소 시작된다……!”

위대한 게임, 그 전초전前哨戰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