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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7화 (278/857)

외전 57화

조안나는 이종학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폭발적인 속도로 굴라드와 거리를 좁혔다. 칼날에 솟구친 검기, 강철조차 두부처럼 베어 버릴 것 같은 힘이 내재되어 있다.

그 같은 사내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 원래라면 천 명의 사냥꾼과 함께하는 것 이상으로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랬을 텐데.

지금의 조안나에겐 이종학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롭게 비춰졌다.

그는 전음으로 말했다. 기회를 만들 테니 도망치라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굴라드에게서 ‘빈틈’이 나타났다.

조안나도 그걸 보았다. 그런데도 이종학처럼 신속히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빈틈, 어쩌면 굴라드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정말로 저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면?

‘모르겠어.’

평소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조안나가 이종학의 입장이었다면 끝내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이종학은 주춤거리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포착한 즉시 칼을 뽑고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찌 보면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방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크윽!”

조프레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종학의 말을 순순히 따른 것이다.

조안나는 그 움직임에 동참하려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게 최선의 선택인가?

이종학에게 모든 걸 맡기고 도망치는 게?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건 도망은 아니다. 이건 퇴각에 가까운 선택이다. 조프레의 생각은 짐작이 간다. 아마 도시 곳곳에 있는 회색 태양의 일원과 접선 후 증원 요청을 할 생각이겠지. 어쩌면 엘리저 키파토시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온다고 전황이 바뀔까?

저 흡혈공작이 고작 엘리저를 비롯한 회색 태양 수십 명이 합세했다고 궁지에 몰리게 될까?

조안나는 부정했다. 그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제길.’

조안나가 콱 입술을 깨물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상황엔 정답이 없다. 정답을 맞힐 수 있었던 순간은 지났다. 굳이 말하자면 이 작전에 동참하지 않는 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끄아악!”

그 순간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조프레의 목소리다. 조안나가 급히 그곳을 돌아봤다. 조프레는 바닥에 쓰러진 채, 두 명의 남자에게 전신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저들은…….’

굴라드의 양옆에 서 있었던 남자들, 아니. 악마들이다. 분명 처음에 굴라드와 함께 걷는 걸 봤는데 왜 여태까지 잊고 있었지?

‘뻔하지……!’

굴라드가 내뿜는 존재감 때문이다. 그 하나만으로 거리 전체가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어, 저 둘이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조안나의 머리가 확 식었다.

저 악마들은 애초에 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을 거다. 주변에 달리 숨어 있는 사냥꾼은 없는지 수색하고, 도망치는 자들을 죽이는 역할을 부여받았겠지.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다.

만약 조프레와 같이 도망쳤다면 그녀도 저렇게 죽었을지 모른다.

카앙!

그사이 이종학은 교전을 시작한 듯하다. 그는 마치 영혼을 연료로 움직이는 것처럼 전신의 기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조안나조차 그가 필사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굴라드는 웃음을 터뜨린 채, 허깨비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검술을 피하고 있었다.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사로잡을 생각일지도 모른다.

고위 악마일수록 강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데 집착한다.

조안나는 다시 뒤를 보았다. 악마들은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래. 도망치는 놈만 죽이라고 명령받았다 이거지.

까드득.

조안나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이토록, 얕보다니……!’

예전의 그녀였다면 공포에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조안나에겐 굴욕이 더 크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도화신의 간택을 받은 존재니까.

그런 자신을 무시한다는 건 그분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해 주겠어.”

설령 목숨을 버리게 되더라도, 저 낯짝의 웃음기는 지워야겠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무섭지만, 이 지경까지 왔는데 살아남을 생각은 버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차피 죽는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하겠다.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떠올리자 힘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짧은 여행이 되어 버렸다. 이제야 좀 친해지려던 참인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 남자는 이곳에 오지 않아서. 적어도 개죽음당하는 사람이 한 명이나 줄지 않았는가.

‘당신이 해석해 준 마법, 잘 쓰겠어.’

그녀의 포켓북에 적혀 있었던 마법. 마도수식은 아주 오래전 발견되었지만, 누구도 해석하지 못한 마법. 때문에 이 세계에서 한 번도 발현하지 못했던 마법.

당연하지만 연습조차 해 본 적 없다.

수식만큼은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조안나는 수식을 떠올리며 주문을 입에 담았다.

“음울함을 휘감은 덩굴이.”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주문은 자기최면의 일종이며, 그렇기에 정해진 형식이 없다. 어떻게 외우든 시전자의 마음이다. 중요한 건 수식을 해석하는 연산력과 마나의 운용이다.

“뱀의 혓바닥처럼 꿈틀거리며.”

그래서 조안나의 주문엔 허세가 많았다. 그녀에게 있어선 주문을 외우는 것도 엔터테인먼트적 퍼포먼스 중 하나였다.

“독니보다 지독한 가시로 적을 옭아맬지니.”

마나가 휘몰아친다.

이 마법은 공격용이 아니다. 방어용도 아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마법. 굳이 말하자면 포획, 혹은 속박 마법이다.

조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마법명을 입에 담았다.

“구속하라. 메두사(Medusa).”

* * *

약 10년 전만 해도 사냥꾼 간의 술자리에서 가장 빈번히 오르내리던 화젯거리가 있었다.

사내라면.

아니, 악마 사냥에 몸을 담는 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화젯거리였다.

‘누가 최강의 사냥꾼인가?’

안줏거리로 시작된 가벼운 이야기였으나, 주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토론이었다.

수많은 이름이 대두되었고, 날마다 새로운 자들이 추가되었다.

은퇴했으나 여전히 뛰어난 기량으로 아시아 사냥꾼들을 이끌던 차궁환.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동아시아의 삼룡三龍.

미국의 닐 플란드 협회장과 마도학회의 마도사들.

오세아니아의 챔피언(Champion)과 캡틴.

유럽에서 철혈의 본부장으로 맹위를 떨친 니나 레드니코바…….

대외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들만 나열해도 수십 명은 될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졌거나, 아예 유명하지 않은 실력자들까지 합하면 밤을 꼴딱 새워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확실한 결론이 나오기 힘든 주제였다.

사냥꾼의 특성상 직접 싸워 힘을 겨룰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목숨을 건 결투나 대련이 성사되기도 하지만 극히 드물었고,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각 직종의 특성이 천차만별인 사냥꾼들이기에 제한된 공간에서 싸우는 건 형편성에 어긋나기도 했다.

그때 미국 브루클린의 칼럼니스트인 잭 브루베이커는, 이 논쟁거리에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사냥꾼의 역할을 떠올렸다.

그들이 본질은 사냥에 있었고, 그들의 적은 같은 인간이 아닌 악마다.

그러니 오직 실적으로만 따져 보자.

지위도, 명예도, 소문도, 실제 강함까지 모두 제하고, 오로지 사냥 실적으로만.

그러자 생각보다 김새는 결과가 나왔다.

최상위권에 위치한 사냥꾼들의 실적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최강의 사냥꾼이란 칭호는 그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유명 사냥꾼들을 한자리에 모아 목숨을 건 투기장이라도 개최하지 않는 이상 최강의 사냥꾼은 가릴 수 없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몇 년 후, 삼마엽이란 존재들이 나타났다.

다른 사냥꾼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인 실적, 혹은 위업을 세운 세 명의 사냥꾼.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불린 사냥꾼이 크란이었다. 그러나 각 단체에 속한 정보원들은 그를 ‘최강의 사냥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흑마녀, 구국의 성자의 실적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혹자는 크란이 홀로 활동하기 때문에 이룬 업적에 비해 과대평가받은 거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 목소리가 얼마 전을 기점으로 싹 사라졌다.

크란이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업적을 세워 버린 것이다.

* * *

상공을 비행하던 루카스가 사막 한가운데 낙하한 직후, 가장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카앙!

아마 안구를 노린 공격일 것이다. 단검은 상시적으로 주변에 둘러 뒀던 배리어에 튕겨져 나갔다.

단검을 던진 남자는 가볍게 도약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 단검을 다시 낚아챘다. 그런 뒤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칼을 꺼내들어 번개 같은 동작으로 휘둘렀다.

카가각

“……!”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 참격도 배리어에 가로막혔지만, 단검을 투척했을 때와는 무게가 다르다.

‘이건…….’

못 버티겠군.

그리 생각하는 순간 배리어가 유리창처럼 부서졌다. 뒤이어 남자는 낚아챘던 단검을 핑그르르 돌리더니, 역수로 움켜쥔 채 휘둘렀다.

휙.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했다. 망설임 없이 경동맥을 노렸다. 절제된 살기에 목울대가 찌릿하다.

그사이 어느새 지면에 바싹 엎드려 있던 남자가 발을 위쪽으로 차올렸다. 턱을 노렸다. 루카스는 양 손바닥으로 그 공격을 막았다.

뻐억!

완벽히 막았는데도 양손에 육중한 데미지가 느껴졌다. 루카스의 육체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무식할 정도의 공격력, 턱에 맞았다면 머리통째 뽑혀 축구공처럼 굴러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그사이 남자가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무기를 보며, 루카스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건 총이었다. 그것도 권총 같은 귀여운 사이즈가 아니다. 루카스는 총기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게 막강한 살상력을 가진 산탄총이란 사실은 깨달았다.

콰앙!

개조한 건가? 일반적인 산탄총에선 나지 않는,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심지어 연사까지 가능했다.

루카스는 허공에서 총탄을 피했다. 그만큼 플라이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전신이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웬만한 마법사, 가령 조안나 정도의 실력자라도 이 짧은 교전에서 최소 다섯 번은 죽었겠지. 그만큼 남자의 연속 공격은 위협적이었고, 다양했으며, 기상천외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진짜 실력은 아직 드러내지도 않은 듯하다.

“…….”

남자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기묘한 움직임으로 총탄을 회피하던 루카스의 모습이 돌연 허공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츠팟—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산탄총을 두 동강 냈다. 남자는 혀를 차며 총기를 내다 버렸다.

그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그곳에 루카스가 서 있었다.

“마법을 쓰는 악마는 만난 적이 없는데.”

남자, 삼마엽 크란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바탕 공격을 퍼붓고 나서야 대화.

‘게다가.’

크란을 보는 루카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묘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상상 이상으로 기이하고 혼돈混沌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내가 악마로 보이나?”

크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쳐다봤다. 이가 완전히 나가 버렸다. 루카스가 두른 배리어를 박살 낸 결과였다.

이 검은 어떤 남작이 사용하던 마검이었고, 강철보다 다섯 배는 단단한 경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한낱 배리어 좀 부쉈다고 이 꼴이 되어 버렸다.

“말했다시피 마법을 쓰는 악마는 만난 적이 없다.”

“그럼…….”

“하지만 그런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게다가 넌 내가 만나 본 어떤 마법사와도 다른 느낌이 드니까.”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악마가 아니다.”

“그럼 악마보다 더 수상한 존재겠군.”

차가운 목소리엔 명백한 적의가 실려 있었다.

루카스로선 한숨이 나올 상황이었다. 지금 그에겐 크란을 설득하거나 사정을 설명할 여유 따윈 없었으니까.

“징가로 향하고 있는 중이겠지. 흡혈공작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곳에 바로 당도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

“네가 뭔데.”

“나는…….”

루카스는 반쯤 열렸던 입을 닫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의심을 사지 않을까.

…아마 무슨 말을 해도 크란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로 말이 잘 통할 남자였다면 진작 다른 세력과 결탁했을 것이다.

물론 크란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한 루카스로선 그가 다른 세력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

대답을 늦추자 점점 시선이 따가워졌다.

어쩔 수 없지.

루카스는 그답지 않은 선택을 하기로 했다.

“일단 가라.”

“뭐?”

파앗!

직후 크란의 밑에 빛이 치솟았다.

요동치는 마나에 적의는 없었고, 너무나도 빨랐으며, 전조도 없었다.

그래서 크란이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빛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크란이 부릅뜬 눈으로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이 미친 새…….”

팟.

크란은 욕설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거리 워프 마법을 사용해서 그를 징가로 보내 버렸다. 아무런 사정도,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저급하지만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일단 보내고 생각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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