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4화
조프레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혼자 움직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남자는 제정신인 건가. 아니, 다른 진의가 있을지도.
조프레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물었다.
“그 말은 당신 혼자서 징가를 돌아다니고 싶다는 겁니까?”
“네.”
“안 됩니다.”
이건 깊게 생각할 가치도 없다. 조프레는 냉랭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루카스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이 아지트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적에게 생포당해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과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여긴 언제 버려도 상관없는 임시 아지트일 텐데요. 그렇게까지 신경 쓸 가치가 있습니까?”
“……!”
조프레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뗄 필요 없습니다.”
귓전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엔 미약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단순히 떠보는 게 아닌, 확신을 가진 목소리였다.
조프레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건 회색 태양의 일원이 아니라 이종학입니다. 따지고 보면 외부인이 외부인을 안내한 셈인데, 아무리 이종학이라도 비밀 집단의 주요 아지트를 멋대로 소개할 권리는 없겠죠.”
그런데도 카이사는 이종학의 무례를 크게 지적하지 않았다. 이곳이 그리 중요한 거점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첫날 이후 엘리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루카스는 나름의 조사를 통해 이틀째가 되기 전, 그가 이미 이 거점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징가는 제법 넓은 도시다. 아마 도시 곳곳엔 회색 태양의 거처가 숨겨져 있을 것이고, 엘리저는 아지트 곳곳을 누비며 지휘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 아지트는 기껏해야 임시입니다. 당장 발각당해도 큰 타격은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 혼자 돌아다니는 걸 허락할 순 없습니다. 설령 아크메이지라고 해도 이 도시에서 개별 행동하는 건 치명적일 만큼 위험하니까.”
루카스는 잠시 조프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말했다.
“엘리저 키파토시가 나에 대해 뭔가 남긴 말은 없습니까?”
“……!”
조프레가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남긴 말.
…있었다.
엘리저는 루카스가 무슨 말을 하든, 웬만하면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가능한 들어주라고 말했다.
“…후우.”
조프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보스는 가끔 무슨 생각으로 내리는지 모를 명령을 할 때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조프레가 엘리저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루카스는 단독으로 움직일 권리를 얻어 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나갈 수는 없었다. 이종학을 비롯한 이들이 임무를 수행할 시간과 맞추라는 조건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습격 장소에 대한 물색을 마쳤고, 해가 진 다음 바깥으로 나갈 모양이다. 해가 떠 있을 때 싸우는 편이 악마를 상대함에 있어선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역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이후에야 저택을 나설 예정인 듯하다.
햇빛을 꺼린다는 것.
어쩌면 대역도 제법 높은 위치의 악마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루카스도 직접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앞선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스트를 사용해 도시 곳곳을 누비는 것, 그걸 제일의 방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뜬금없이 세디가 이 도시에 왔다. 아마 루카스에게 볼일이 있을 확률이 높겠지.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악마는 죽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세디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아니면… 지난 도시에서 악마 둘의 정신을 망가뜨린 걸 눈치챈 건가?
확률은 낮지만, 그 편법 아닌 편법을 따지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으으…….”
그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가 옆쪽을 바라보자 조안나가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켓북을 보고 있었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져있다.
일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꺼내 보던 포켓북이다. 물론 루카스는 아직까지도 저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조안나는 한순간에 끙끙거리던 표정을 지우더니 특유의 오연한 얼굴이 되었다. 배우 뺨치는 이미지 관리다.
“왜요?”
“뭐 보나 싶어서요.”
“…….”
왠지 모르지만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조안나는 한참을 입을 닫고 있다 툭 대답했다.
“그냥 마법이랑, 계산식이에요.”
“계산식?”
“한번 볼래요?”
그리 말하더니 예고도 없이 포켓북을 던졌다.
허공에서 캐치한 다음 대충 한 번 훑어봤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 전체가 너덜너덜하고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나마 허름한 겉면에 비해 안쪽은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아마 조안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딱히 소중히 다룬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건 방금 전에 험하게 던진 행동이나, 충분히 교체할 수 있는 책 표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루카스는 파라락 페이지를 넘겼다.
뒤쪽으로 갈수록 그의 얼굴에 흥미가 피어났다.
“점점 어려워지는군요.”
“네.”
루카스는 포켓북을 훑어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곳에 있는 마도주문과 계산식은 제법 수준이 높았다.
아마 이 우주가 이룬 마도학 수준으로는 난해한 것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이 책은 어디서 난 겁니까?”
“…아는 사람에게 받았어요.”
왠지 불편한 듯한 목소리다. 그 이상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캐묻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마지막까지 책을 훑어본 다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런 다음 눈여겨봤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조안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 마법, 사용할 수 있다면 이번 임무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조안나가 쓰게 웃었다.
“뭐 그렇겠죠.”
“쓸 수 없습니까?”
“그야 당연하죠.”
조안나의 경지라면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마나가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루카스는 책을 슬쩍 본 다음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계산식 해석을 못 했군요.”
“네.”
조안나는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했다. 당당하기까지 한 태도, 오히려 그리 말한 루카스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다.
루카스는 페이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펜 있습니까?”
“있기는 한데. 왜요?”
“조언이나 해 줄까 해서요.”
“아하하.”
조안나는 드물게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이 펜을 건넸다.
“책에 빈 공간 있을 테니까 마음대로 써요.”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막힘없이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과 손은 책에 집중하면서, 그의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가 물었다.
“주로 사용하는 마법은 뭡니까?”
“화염 마법이요.”
“그다음은요? 능숙한 순서대로 쭉 말해 봐요.”
“지속성, 풍속성, 수속성이요.”
확실히 장족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아마 처음 만난 당시의 조안나였다면 루카스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니까. 사실상 지금도 고분고분 따르는 것보단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느낌이 강했지만.
루카스는 한 번도 펜을 멈추지 않고, 때때로 조안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무영창주문의 가능 유무나 한 번에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총 개수, 몇 성의 마법을 몇 개나 동시에 영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건 마법사의 세부적인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들이어서 조안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제법 꼼꼼하네.’
잠시 후 루카스가 포켓북을 건네며 말했다.
“해석, 그리고 주석을 좀 적어 놨습니다. 한번 읽어 보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지금 물어봐요. 임무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봐요. 이 책이 어떤 거냐면요.”
“……?”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스. 눈동자엔 아무런 흑심도 없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후우. 아니에요, 아무것도.”
가벼운 한숨과 함께 포켓북을 받았다.
그리고 눈으로 포켓북을 천천히 읽는다.
처음엔 무관심과 귀찮음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엔 약간의 흥미와 사색이 피어났다.
“…어?”
뒤이어 놀람이 찾아온다. 그녀는 약간 당황한 것처럼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모두 읽은 후, 갑자기 침묵했다.
“…아.”
조안나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가 왜 그러냐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조안나는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포켓북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훨씬 진중한 태도로 읽기 시작한다.
이번 변화는 아까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의심으로 시작한 표정은 강한 부정으로 이어지더니, 이윽고 경악이 되었다.
“마, 마, 마…….”
“…마?”
“말도 안 돼!!”
조안나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루카스에게 삿대질했다.
“다, 다, 당신 뭐야! 대체 정체가 뭐냐구!”
“갑자기 왜 그럽니까?”
조안나가 이 정도로 놀란 건 처음 본다. 그녀는 웬만하면 경어를 고수하며 품위를 유지하려 노력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예 그럴 여유가 없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러기는! 여, 여기 쓰여 있는 마법이 어떤 것들인지 몰라서 물어요!?”
“어떤 건데요?”
조안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한 번 휘청거리더니, 한순간에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루카스에게 성큼성큼 걸어와서 포켓북을 탁탁 쳤다.
“마도학 최대 난제들……!”
“네?”
조안나가 답답한 얼굴로 외쳤다.
“여기 있는 마법들 전부, 현대 마도학의 어떤 마법사도 해석하지 못한 최대 난제들뿐이라구요!!”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루카스가 짧게 중얼거렸다.
“…아.”
어쩐지 수준이 좀 높더라니.
* * *
드디어 해가 저물었다. 루카스는 방금 전까지 방에서 거칠게 항의하던 조안나를 떠올렸다.
‘역시 프레이를 데리고 가야 돼요! 안 데려가면 후회한다니까요! 정말로!’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조안나를, 바로 방금 전 이종학이 억지로 끌고 나갔다.
그들은 다른 통로로 나가는 듯했고, 루카스는 지난번에 사용한 천사 동상 쪽 출입구를 이용했다.
덜컥—
동상을 치우며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후우.”
살짝 심호흡을 한다. 이 근처가 폐허다 보니 상쾌한 공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수구보단 훨씬 나았다.
루카스는 기감을 세웠다. 세디 특유의 기척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진다. 역시 자신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 도착한 어두운 뒷골목.
세디는 쓰레기와 시체 사이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흑단처럼 늘어뜨린 그녀에게선 인간으론 생각되지 않는 고유한 퇴폐미가 풍겼다. 루카스는 세디의 모습에서 옛 동료를 떠올렸으나, 곧 고개를 살짝 털었다.
그의 시선이 세디 주변에 있는 시체에게 향했다.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악마다. 모두 죽였지.”
“어째서?”
“저번에 말했듯이, 주제 파악 못 하는 얼간이들은 죽어도 싸니까.”
“…날 만나러 온 거겠지?”
“맞아.”
그녀는 잠시간 루카스의 얼굴을 직시했다.
약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루카스는 세디가 선뜻 입을 열기 망설이고 있단 걸 깨달았다.
“레티프가 말하더라. 이 우주에…….”
그때였다.
하늘에서 수백 마리의 박쥐가 날아왔다. 불길한 핏빛 털과 몸통보다 몇 배는 거대한 날개, 무엇보다 혐오감이 들 정도로 커다란 송곳니를 가진 박쥐였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날아온 박쥐는 세디와 루카스의 중간에 자리를 잡더니, 저들끼리 뭉쳐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형상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외눈 안경에 중절모, 정장을 입고 있다. 그러나 중년인의 중절모 밑으로 언뜻 보이는 붉은 뿔이 그의 정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루카스는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흡혈공작 굴라드.
“묘한 기척이 느껴졌는데……. 갑자기 사라졌군. 흠.”
굴라드는 주변에 있는 악마들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이건 누가 한 거지?”
루카스와 세디, 둘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굴라드가 낮게 웃었다.
“대답하지 않으시겠다. 그것도 재밌겠지. 온몸의 혈액이 죄다 빨려 나가도 그 의지를 관철할 수─”
“야.”
굴라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디를 보았다.
“계집, 지금 나를 부른 건가?”
“어른들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세디가 귀찮은 듯이 턱짓했다.
“지금 기분 별로니까 저리 꺼져라. 죽기 싫으면.”
굴라드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