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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3화 (274/857)

외전 53화

엘리저는 크란이 온다는 소식을 두 이방인에게도 알렸다. 딱히 선행을 베푼 게 아닌, 지극히 계산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아직까지 조안나와 루카스의 목적이 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크란에 대한 정보를 원하고 있고, 최소한 그와 한 번이라도 접선하길 바란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크란의 행선지를 대해 말해 주는 것. 언뜻 무보수로 보이는 행동에도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있다.

첫 번째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가볍게 거드름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 당분간 이들의 발을 묶어 둘 수 있다.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서 장기간 붙잡으며 설득할 수 있는 시간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크메이지에겐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소식을 전하러 간 건 카이사였다. 그가 조안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크란은 상식을 넘어선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징가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진 이곳에 머물러도 됩니다.”

“고마워요.”

조안나가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카이사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선 방을 나섰다. 그러자 조안나가 확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엄청 좋은 소식이네요! 이집트까지 안 가도 된다니.”

“그렇군요.”

“아아. 정말 다행이야~”

조안나는 쇼파에 털썩 몸을 묻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은 소식은 맞다.

이 땅에 온 목적인 삼마엽 크란이 직접 이 도시까지 찾아온다. 이 사실만으로는 전혀 나쁠 게 없었다. 중요한 건 그에 뒤따르는 연쇄적인 반응들이다.

당장 방금 전에 떠난 카이사만 봐도 그렇다. 그의 태도가 처음과는 달리 정중해졌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아니면 엘리저에게 귀띔을 받았겠지.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다.

‘엘리저 키파토시.’

한 줄로 평하자면, 그는 까다로운 인간이다.

루카스는 그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진 않았다. 그러나 엘리저는 찰나지간 겪은 돌출된 행동만으로 루카스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통찰력이 범인의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했다는 뜻이었다.

‘회색 태양과의 협력.’

상황을 좀 더 봐야 되겠지만 무턱대고 거부할 일은 아니다.

루카스는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안나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 앞쪽엔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필요하신 거라도?”

“이종학은 어디 있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는 잠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더니 말했다.

“이 시간이라면 쉬고 있을 겁니다. 불러드립니까?”

“부탁합니다.”

루카스가 다시 돌아가자 조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물어보려구요?”

“여러 가지요.”

“아까 카이사인가 하는 남자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요? 그 남자는 회색 태양의 일원이잖아요. 이쪽 사정에 대해선 훨씬 빠삭할 텐데. 이종학은 우리와 같은 이방인이구요.”

타당한 의견이지만, 생각이 조금 얕았다. 루카스는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종학은 아마 이 기지에 있는 이들 중 가장 객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거죠.”

조안나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지만 그 이상 물어보진 않았다.

잠시 후 이종학이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절제된 태도를 겸비하고 있었는데, 조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그녀가 아니라 접니다.”

루카스의 말에 이종학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무엇이 궁금합니까?”

“당신이 도시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종학은 딱히 고민하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흡혈공작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리스크가 큰 행동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당신이라도 단신으로 공작과 싸울 순 없을 텐데.”

이종학은 분명 강해졌지만, 아직까지 공작과 혼자 맞설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공작과 단신으로 싸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오고 있다는 크란이라는 남자를 빼면 말이다.

그런 흡혈공작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그의 본거지에 직접 몸을 들이민다? 위험하고 실속 없는 임무다. 맹수의 영역에 알몸으로 진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흡혈공작의 위치는 이미 드러나 있었을 텐데요.”

거리 끝에 우뚝 솟아 있는 대저택.

불온한 기척이 느껴지는 그 저택에, 흡혈공작은 드라굴 피스파인더란 만들어 낸 신분으로 머물고 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난 흡혈공작과 단신으로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저택에 갔어도 전 죽거나 위험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그곳에 있는 건 진짜가 아닌 대역이니까.”

루카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역?”

“회색 태양이 오랜 시간에 걸쳐 파악한 비밀 중 하나죠. 때때로 드라굴이란 자가 거리로 모습을 드러냅니다만, 그는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 흡혈공작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아예 흡혈공작이 이 도시에 없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루카스는 그리 반문했지만, 이 도시에 공작급 악마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종학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럴 확률은 낮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드라굴의 대역이라면 흡혈공작의 위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게다가 흡혈공작이 없으면 이 도시를 접수하는 게 훨씬 쉬워질 테니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제야 이종학의 임무가 무엇인지 이해가 갔다.

“당신은 저택에 있는 대역을 생포해서 정보를 캐내려고 했군요.”

“그게 내 목적이었습니다.”

루카스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왜 당신을 꺼리는 기색을 보인 겁니까?”

“이 땅에 온 직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악마를 죽였습니다. 징가의 사냥꾼들은 악마와 완전히 공동체가 된 듯하니 애초부터 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죠.”

그 말은 조금 이상한 감이 있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냥꾼들은 표면상으로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 해도 그걸 대놓고 표출할 만큼 미련한 행동은…….

“조금 많이 죽였습니다. 세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저급한 마수까지 합한다면 수천 마리 정도는 되겠군요.”

옆에 있던 조안나가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수천 단위의 적을 단신으로 죽이는 것. 말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이다. 광역 마법을 가진 마법사도 아닌 일개 무인이라면 더욱.

“하지만 그들이 저를 증오하는 이유는 혼혈을 죽인 것에 있겠군요.”

“…혼혈?”

“그 도시에 있던 자들 중에선 하이브리드의 부모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이종학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은 악마와의 혼혈을 자식으로 여기는 듯하더군요. 역겹게도.”

그 말에 조안나는 오싹함을 느끼며 이종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있던 싸늘한 기색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 * *

이종학이 떠난 뒤,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루카스에게 조안나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그쪽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그러자 조안나가 뚱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얘기하네요.”

“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다구요.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대답하는 건 매너가 아닌데.”

“…….”

그랬었나? 딱히 자각하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루카스가 잠시 그에 대해 회상하려는데 조안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선은 정보를 모아야겠죠. 음. 일단 회색 태양의 거처에 당분간 머물게 됐으니까, 이 사람들이 도움을 요구하면 그것도 응해 줘야 될 거구요.”

거기까지 말하고, 조안나가 갑자기 흠칫했다.

“그런데 우리 트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

루카스도 뒤늦게 그들의 이동 수단이었던 군용 트럭에 대해 떠올렸다. 아마 징가 사람들이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부수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되찾으러 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으아. 이런 걸 까먹고 있었다니.”

조안나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망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가장 중요한 이동 수단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스스로의 둔함에 기가 질릴 정도다. 물론 데스틴에게 대여받은 것이니만큼 계속 쓰기엔 찝찝한 감도 있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집트에 있던 크란이 직접 이 땅까지 온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를 필요가 없어졌다. 즉 차량이 없다 해도 임무에 큰 차질이 빚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좀 잘까요. 피곤해 죽겠네.”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던 조안나가 퀭한 눈동자로 그리 말했다. 지하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이미 새벽에 가까운 시간일 것이다. 피곤할 만도 하다. 오늘 하루는 많은 일이 있었고, 조안나는 그제 축적된 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하루는 그리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조안나는 컨디션을 되찾는 데 집중했고, 실제로 사흘 전과 비교하면 거의 호전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수구 기지는 따분한 곳이었지만 휴식을 취하기엔 아주 적합했다.

가끔씩 카이사나 이종학이 찾아와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고 떠났다. 주로 카이사는 크란의 현재 위치에 대해, 이종학은 징가의 상황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루카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을 하면서 보냈다.

처음엔 단순히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 물론 지금 단계에선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었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 어떤 상황보다 우선시해야 되는 작업이기도 했다.

변화가 일어난 건 나흘째 아침이었다.

그날은 이종학과 조프레가 동시에 찾아왔다.

“그자가 오늘 거리에 나올 겁니다.”

“그자?”

“흡혈공작의 대역 말입니다.”

루카스의 눈도 살짝 빛났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십중팔구는요. 도시 전체에 흉흉한 기색이 감돌고 있으니, 감찰 목적으로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군요.”

감찰이 목적이라면 필연적으로 으슥한 곳도 거쳐 갈 수밖에 없다. 기습이나 납치에 적합한 장소, 자리만 잘 잡으면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대역을 생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도시엔 악마와 하이브리드가 돌아다니며 회색 태양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다수로 움직이면 들킬 위험이 크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소수로 움직입니다.”

이종학의 시선이 조안나에게 향했다.

“아크메이지인 조안나 님,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도와드리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럼 움직이는 건 저와 아크메이지인 조안나 님, 여기 있는 회색 태양의 간부 조프레 님, 마지막으로…….”

이종학이 천천히 말했다.

“이곳엔 없지만, 마찬가지로 간부인 카밀라 님입니다.”

그 발언에 조안나가 쌍심지를 켰다.

“네?”

“제 인선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프레이는 왜 데리고 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이종학의 시선이 루카스에게 향했다.

“실례지만 경지가 어떻게 됩니까?”

“제 몫을 할 정도는 됩니다.”

옛날에 한 번 들었던 말에 조안나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종학은 그와 대비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임무는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여차할 때 악마를 죽일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루카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

이종학의 눈가에 은은한 실망의 기색이 스쳤고 조안나는 멍한 얼굴로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조프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엘리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옆에 있던 프레이라는 남자는 되도록 자극하지 마라.’

‘네?’

‘그자는 위험해.’

그 말에 조프레는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엘리저 키파토시. 회색 태양의 빅보스.

여태껏 그가 ‘위험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인간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삼마엽 중 하나이며 최강의 사냥꾼인 크란.

설마 엘리저는 이 남자가 크란과 동격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가?

‘과한 생각이지.’

조프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엘리저의 충고지만, 확대해석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도 눈썰미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고, 분석에 따르면 이 남자에게선 아무런 내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마법사를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 조안나가 마나의 잔향을 물씬 풍기는 것에 반해 그에게선 바싹 마른 사막처럼 메마른 기색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이 퍼뜩 정신을 차린 조안나가 말했다.

“프레이는 꼭 데려가야 돼요!”

“이유는요?”

“그, 그건……. 어……. 프레이는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침착하고, 알람마법처럼 괴상한 마법도 많이 알구요. 또…….”

조안나가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는데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 이곳을 지키고 있도록 하죠.”

그 말에 조프레가 실소를 터뜨렸다. 지키기는 무슨.

“이, 이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조안나는 그리 말했지만 루카스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마침 홀로 움직일 시간이 필요했─

“……!”

그 순간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흠칫 놀란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하수구를 개조해서 만든 천장엔 살짝 물이 고여 있을 뿐, 바깥 풍경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뇨.”

조안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지만 루카스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방금 전 결코 착각할 수 없는 ‘특별한 기척’이 그의 기감에 잡혔다.

루카스가 복잡한 얼굴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세디.’

북아일랜드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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