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9화
“괜찮아요?”
루카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가요?”
“거울이라도 있으면 보여 주고 싶네요. 그쪽이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보거든요?”
“…….”
“하도 무표정하길래 감정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요.”
지금 표정이 어떻길래. 루카스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는 사람이에요?”
“예?”
“저 남자가 말한 대장이란 사람이요. 그 사람 이름 듣고부터 표정 관리가 안 되던데.”
“아뇨. 모릅니다.”
그러자 조안나가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루카스는 드라굴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다른 것이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요?”
“피스파인더라는 성姓은 흔한 편입니까?”
“피스파인더?”
조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지로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한동안 트럭엔 덜커덩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 처음 듣네요. 그래도 사람 성씨 같진 않은데요? 꼭 자동차 브랜드 이름 같아.”
“…….”
그렇겠지.
루카스도 이 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성을 들어 본 적은 없으니까. 만약 있다고 해도 무척이나 희귀한 성씨일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굴이란 남자가 가진 피스파인더라는 성은 단순한 우연인가.
루카스는 전방을 질주하는 버기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세 대의 버기는 각각 군용 트럭의 옆과 뒤쪽에 위치해 있다.
“뭔가 호위받는 느낌이라 괜찮네요.”
조안나가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루카스는 이 진형이 호위보단 도주 방지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면 도주하고, 흔적까지 지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면 몇 배는 까다로워질 테지만.
그럼에도 루카스는 도시로 향했다.
‘이 세계에 이리스가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초월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를 쫓아온 건가? 내가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루카스는 내심 든 생각에 쓰게 웃었다.
‘나는 아직 이리스와 재회하는 걸 원하지 않는군.’
반가움보단 미안함, 그리고 죄책감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먼저 찾아왔다면, 필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탓하러 온 게 분명할 테니까.
* * *
트럭에서 내렸다.
가까이서 본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약간 정돈된 폐허’ 이상의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터전보다는 임시 거처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것이다.
도시 크기를 고려하면 사람이 머무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근처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겠지.
조안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놀랐다.
“여기 사람 좀 사나 봐요?”
“아마 만 명 정도는 될 거요.”
자신을 키건이라고 소개한 흑인 남자는 그리 말하며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손님이 많군. 귀찮은 일이야…….”
“……?”
“방으로 안내할 테니 거기서 좀 기다려 주쇼. 우리 대장이 좀 바쁜 편이라.”
키건은 그리 말하며 휘적휘적 어딘가로 걸어갔다.
“따라오시오. 머물 곳으로 안내하겠소.”
또 다른 사냥꾼이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뒤를 따라 어느 건물로 향했다.
3층짜리 건물이다. 창가엔 인공적인 불빛이 들어와 있다. 전력이 안전하게 공급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거리엔 어설프지만 가로등도 있었다.
1층에 들어서자 음식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딱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홀로 보이는 곳엔 사람이 많았다.
“1층은 식당이오. 너무 늦은 시간만 아니면 언제든 음식을 주문할 수 있지만, 웬만하면 식사 시간에 맞춰주시오. 저 끝엔 욕실도 있소. 이 시간이라면 온수도 나올 거요.”
“온수!”
조안나가 눈을 빛냈다. 오랜만에 샤워할 생각에 들뜬 듯하다. 사실 오랜만도 아니었다. 미국을 떠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2층과 3층엔 개인에게 할당될 방이 있었다.
“아마 한 시간 내로 키건이 돌아올 테니 편히 쉬고 있으시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고, 루카스는 배정받은 방을 살폈다. 방에서 풍기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심신을 안정시켜 주었다.
좁지만 혼자 머물기엔 부족함이 없는 방.
드륵.
창문을 열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거리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선 굶주림이 보이지 않았다. 냉정히 말해서 콩고 지부에 있는 사람들보다 낯빛이 좋아 보인다.
보기 좋은 광경임은 분명하지만,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도 들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전혀 좋은 위치가 아니다. 악마나 마수가 수시로 나타날 것은 분명하다.
식수와 식량을 어디서 조달받는지, 안정된 전력은 어떻게 공급받는지, 악마와 마수의 침입은 어떤 방식으로 막는지.
의아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루카스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시끌벅적하게 술잔을 부딪치는 자들은 대부분 사냥꾼으로 보였다. 맥주를 물처럼 들이켜며, 장내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린다.
루카스는 겨우 빈 테이블 하나를 찾아 앉았다. 중년 여자가 빙긋 웃으며 물 한 잔을 내려놓고 갔다. 음식을 주문할 거냐는 물음엔 고개를 저었다.
조안나는 보이지 않는다. 아까 본 태도를 떠올리면 욕실에서 씻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때 위층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그를 본 루카스가 눈가를 좁혔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그가 이곳에 와서 처음 본 동양인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안면이 있는 남자라는 점.
인룡 이종학.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루카스는 난처한 얼굴로 이종학을 보았다. 다행히 지금 루카스는 ‘프레이’의 얼굴이었다. 그가 스스로 마법을 풀지 않는 이상 이종학이 먼저 눈치챌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종학이 내려오자 시끌벅적하던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낄낄대던 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다.
그는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빈 테이블을 찾는 듯하다. 그러나 루카스가 앉은 테이블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난처해하던 그가 곧 루카스 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4인용 테이블은 그 혼자서 쓰기엔 과하게 넉넉해 보였다.
슬쩍 다가온 이종학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묻는다.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짧게 대꾸하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 보았던 중년 여자가 다시 다가왔다.
탁—
그녀는 냉랭한 태도로 냉수를 테이블에 꽂듯이 내려놓고 떠났다.
방금 전 행동으로 확신이 들었다. 이곳 주민들이 이종학을 꺼리고 있다는 것을.
루카스는 다시 이종학을 보았다. 마지막 만남 이후로 몇 개월 만의 재회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전보다 훨씬 헌앙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검술에 진전이 있었다는 증거다. 이미 이루어 낸 경지도 만만치 않은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또다시 성과를 거두다니.
역시 무서울 정도의 재능이다.
‘이 남자는 아시아 본부로 돌아간 건가.’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때는 독일에서 구호 활동 중이라고 들었다.
루카스는 궁금해졌다. 이종학은 유럽 본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고 있다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
“이곳 출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종학의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루카스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할 미세한 빈틈이다. 스스로도 인지했는지 냉수를 한 번 들이켰다.
“네. 유럽에서 왔습니다.”
“…….”
컵을 내려놓던 손이 멈칫거렸다. 이종학의 시선이 루카스에게 향했다. 눈동자에 복잡한 기색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 어떤 태도를 보일까.
현시점에서 유럽과 아시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이 되었다. 비록 타지에서 만났다 해도 상대가 유럽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빨을 드러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곳은…….”
그가 무언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다.
루카스의 시선 끝자락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조안나가 보였다. 확실히 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는 맞았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시선이 절로 가는 걸 보니. 주변에 있는 사냥꾼 몇몇도 입을 헤 벌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조안나에게선 발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경쾌한 움직임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루카스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앉은 다음 손부채질을 한다.
“아, 개운하다. 어? 당신은 안 씻었어요?”
“네.”
“윽. 불결하긴. 좀 떨어져요.”
의자를 슬금슬금 뒤로 빼다 이종학과 툭 부딪힌다. 그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죄송. …어라? 이쪽 신사분은, 어딘가 낯이 익은데…….”
조안나는 이마를 꾹 누르며 고심하더니, 약간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인룡?”
“예. 이종학입니다.”
“아아. 역시나.”
조안나가 방긋 웃었다.
“사진은 많이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조안나 골드버그예요.”
그 말에 이종학도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미국의 아크메이지셨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머나.”
그 정중한 태도에 조안나의 얼굴에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래. 이거지. 최근 돌덩이 같은 남자랑 붙어 다녀서 몰랐지만, 이게 그녀를 마주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태도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웅조차도 먼저 고개를 숙이는 클래스. 역시 대마도사의 선택을 받은 여자.
그녀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루카스를 보았다. 봐라. 내가 이 정도 여자다. 그렇게 표정으로 말했지만, 루카스는 다른 생각에 잠긴 채 이종학을 보고 있었다.
살짝 무안해진 조안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어, 그런데 미스터 리는 이곳에 무슨 일로?”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어떤 임무인지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같은 지부 출신이 아니라면 수행 중인 임무에 대해선 함구하는 게 원칙이다. 조안나도 그가 임무 수행으로 파견됐다는 걸 알았으므로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종학의 시선이 루카스에게 향했다.
“그쪽 분은?”
“유럽의 프레이 블레이크입니다. 조안나 씨와 같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루카스와 이종학은 모종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유럽과 미국의 공동 임무 수행. 양 지역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뀔 거란 가능성을 은근슬쩍 시사했다. 이 화제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이종학이 가진 생각을 알 수도 있겠지만…….
타이밍 안 좋게 문을 열고 키건이 돌아왔다.
그는 테이블에 있는 셋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마침 셋이 딱 모여 있네. 원래 안면 있던 사이였남?”
“방금 생겼어요.”
“넉살도 좋군.”
뭐, 귀찮게 안 돌아다녀서 좋네. 키건은 그리 말하며 픽 웃었다.
“두목이 준비됐다는군. 따라오쇼.”
* * *
오직 귀족의 정점에 선 악마만이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는다. 그러나 모든 공작이 동일한 힘을 가진 건 아니다.
공작 중에서도 악마왕의 최측근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는 다섯뿐이다. 그들은 오공작五公爵이라 불리며 같은 공작에게까지 경외를 받는다.
그 오공작 중에서도 악마왕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한 존재가 바로 이 남자였다.
아자젤.
잿빛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관자놀이에 솟은 뿔을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인간과 흡사한 외관을 가진 악마.
몇몇 오공작은 농과 진담을 반쯤 섞어 그를 대공大公이라 부르기도 했다. 어울리는 칭호였다. 실제로 부재중인 악마왕의 업무 대부분을 그가 수행했으니까.
아자젤은 프랑스에 있는 어느 숲을 거닐고 있었다.
평범한 숲은 아니다. 베르사유 궁전보다 짙은 악기가 숲 전체를 깊게 삼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 숲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악마왕의 거처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
아자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일대가 난장판이 되어 있다. 거대한 지렁이가 기어간 것처럼 대지가 파여 있었고, 그곳에 강력한 악기가 아지랑이처럼 남아 있다.
이 대지의 상흔 끝에 그 존재가 있었다.
아자젤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시여.”
그 말에 거대한 존재가 눈을 떴다. 어둠이 형상화한 듯한 시꺼먼 눈동자가 아자젤을 향했다.
[아자젤 트로우맨.]
“하명하십시오.”
[준비는 끝났다.]
“그 말씀은…….”
아자젤이 조용히 전율했다. 그의 눈에 환희와 기쁨이 흘러나왔다.
악마왕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제 내가 제일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