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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5화 (266/857)

외전 45화

루카스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걸어 다녔다. 차츰 푸르스름해지는 하늘. 흙먼지가 엉킨 도시엔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해 죽은 자들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바로 방금 전에 있었던 미국 맨해튼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광경이다. 그 도시와 이 도시. 무슨 차이가 있을까. 둘 모두 사람이 사는 장소일진대.

“일찍 일어났군.”

데스틴이다.

루카스는 한숨도 자지 않았으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일찍 떠지더군요.”

“흠. 방에 없어서 찾아다녔소. 곤히 자고 있을 숙녀의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런 예의를 갖춘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다.

자세히 보니 데스틴의 안구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몸엔 담배 냄새가 질펀하게 배어 있다. 아마 날밤을 샌 것 같다.

그가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는 모두 끝내 뒀으니 해가 완전히 밝으면 출발하시오. 여기 지도도 있소. 옛날 거라 불확실한 것도 좀 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요”

데스틴이 건넨 지도를 펼치자, 이집트까지 가는 루트와 위험 구역, 그리고 잠시 쉬고 갈 만한 장소들이 제법 상세히 적혀 있었다. 기존에 있던 지도에 그가 직접 추가 정보를 기입한 것 같다.

루카스는 내심 놀랐다. 데스틴은 첫인상과 달리 주어진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남자였다.

“가급적 해가 떠 있을 때 움직이는 편이 좋을 거요. 요즘 세상에 안 그런 곳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프리카의 밤은 특히 위험하니까.”

악마와 마수를 염두에 둔 말이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당신은 저 조안나라는 여자의 수행인이오?”

“예?”

“아니면 매니저라든가…….”

루카스가 침묵하자, 데스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헛짚은 것 같군. 실례했소. 미국 사냥꾼들은 바쁜 일정 때문에 그런 이들을 달고 다닌다고 들었거든.”

그러고 보니 조안나의 옆에 붙어 있던 정장 남자가 떠올랐다. 물론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거기에 당신은 미국 사냥꾼도 아닌 것 같았고.”

“유럽 사냥꾼입니다.”

“흠. 그랬군. 그래서 이 도시를 보고도 담담할 수 있던 거였어.”

데스틴의 목소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관계는 돈독한 편이다. 악마 침공에 최대 피해를 입은 지역들 간의 동병상련 같은 감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지역은 서로 위급한 상황에 처할 경우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곤 했다.

“그럼 걱정은 좀 덜해도 되겠군. 악마에 대해서 딱히 경고해 줄 필요도 없겠고.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 *

완전히 날이 밝았을 때쯤 조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퀭한 얼굴에 볼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헝클어진 머리. 그녀는 좀비처럼 어기적거렸다. 밤새 많이 뒤척인 모습이다.

어제 데스틴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그리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겠지. 고작 하룻밤 만에 매듭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네. 당신은?”

“저도요. 하음.”

조안나가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이집트까지의 거리는 약 3,000km지만 그건 단순히 직선거리다. 중간에 있는 산악 지대나 위험 지대, 강, 날씨. 그리고 아마도 틀림없이 겪게 될 예측 밖의 상황을 가정하면 최소 몇 주일은 소요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애용하게 될 군용 트럭은 생각 이상으로 컸고,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타이어는 거친 황야도 거뜬히 지날 만큼 단단했고, 튜닝한 것으로 보이는 트레일러는 식량과 가솔린, 생필품을 싣고도 자리가 넉넉히 남았다. 그 여분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작은 침실까지 구비되어 있다.

이 정도면 군용 트럭이 아니라 개조를 거친 캠핑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장기 임무를 나가는 사냥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오. 일반 차량보다 훨씬 강한 내구도를 가졌지만, 너무 험하게 굴리진 마시오.”

“고마워요.”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의 스펙에 만족한 듯한 모습이다.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특유의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운전 부탁할게요.”

“운전할 줄 모릅니다.”

막 벨트를 채우려던 조안나가 멈칫했다.

“…뭐라구요?”

“전 차량 운전 경험이 없습니다.”

“…거짓말.”

“진짜로.”

“마, 말도 안 돼…….”

“당신도 몰 줄 모릅니까?”

“그건 아니지만…….”

조안나가 울상을 지으며 차량을 올려다보았다. 대형 차량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1톤 트럭보다 크다. 2종 보통 면허 소유자인 그녀에게 적합한 사이즈는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힐끗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진짜 운전 못 해요? 그냥 몰기 싫어서 하는 말 아니에요?”

“유럽에선 차를 몰 일이 거의 없소. 애초에 차량 자체가 거의 없지. 여기도 마찬가지고.”

루카스 대신 대답한 건 데스틴이었다. 그는 약간 한심한 눈으로 조안나를 보았다.

“이 트럭도 우리 지부에 3대밖에 없는 차량 중 하나요. 애초에 운전수 역할까지 고려해서 당신이 파견된 것 아니오?”

데스틴의 말에 조안나는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럴 수도 있었다. 콩고에서 이집트까지 마법을 써서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차량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닐의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면 거기까지 고려했을 건 당연지사. 그리고 이 남자가 무면허라는 걸 닐이 알고 있었다면…….

‘협회장님 설마 날 기사(技士) 역으로 보낸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의 얼굴엔 황망함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빠르게 체념한 뒤, 축 처진 어깨로 운전석으로 향했다.

까라면 까야 되는 게 아랫사람의 숙명이었다.

루카스도 조수석에 타려는데 데스틴이 말했다.

“당신이 저 여자보다 더 강한 것 같군.”

그는 고개만 돌려 데스틴을 바라보았다. 지금 루카스는 아무런 힘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상태의 루카스에게 이런 말을 한 자는 거의 없다.

아마 데스틴은 이 남자에게서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안목만큼은 명인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야생동물보다 수십 배는 뛰어난 육감을 가졌다는 증거다.

“회색 태양을 조심하시오.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공작급 악마보다도 위험한 존재들이니.”

이 땅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사냥꾼의 뼈가 담긴 충고다. 당연히 한 귀로 듣고 흘려선 안 되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오. 건투를 빌겠소.”

* * *

황량한 대지를 트럭이 질주했다. 냉정히 말해서 승차감은 최악이었다. 고급 리무진에 완벽히 적응한 조안나에겐 특히 더 그랬다.

그나마 지금은 수십 년 전까지 쓰이던 길이 형상이나마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지만, 콩고를 벗어나 국경 부근에 진입하면 그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우둘투둘한 자연 그대로의 길을 달려야 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최대한 적응해야 되는데.’

조안나는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량 내부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운전하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불만과 커다란 트럭을 모는 중압감, 거기에 알 수 없는 오기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복합적인 감정들이 그녀에게 먼저 말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루카스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남자, 해가 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석상도 이것보단 낫겠네.’

조안나가 짜증 섞인 시선으로 루카스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미국 사냥꾼 중에서도 무척이나 유명한 편이다. 타고난 외모와 언변, 뛰어난 마법 실력… 무엇보다 조안나는 그 모든 장점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다.

미국 사냥꾼이 인지도를 높이려면 어느 정도 엔터테인먼트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 미대륙에서 사냥꾼은 단순히 악마를 사냥하는 존재가 아닌 연예인이자 스타다. 그들은 민중의 기대를 충족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냥꾼들 중에서도 조안나의 인기는 특히 드높았다.

웬만큼 콧대 높은 사냥꾼이라도 그녀 앞에선 빌빌 길 정도다. 그런 조안나에게 루카스의 태도는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말 좀 해라.’

그녀가 찌릿 하고 루카스를 쏘아보았다. 이번엔 곁눈질이 아니라 대놓고. 여기까지 오면 이제 자존심의 영역이다. 조안나는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으리라고, 홀로 엄숙한 맹세를 마쳤다.

그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을까.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쯤 루카스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도록 하죠.”

“…….”

물론 그녀가 원했던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루카스는 데스틴에게 받은 지도를 보고 있었다.

조안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도시다. 방치된 지 최소 10여 년은 지난 듯한 곳.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대지 한복판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끼익-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자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공기가 차갑다. 유령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여길 고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이 도시는 사냥꾼들의 중간 지점 같은 장소라는군요. 악마나 마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각 포인트에 있는 지하 벙커엔 식량과 생필품, 어느 정도의 무기까지 구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간 지점이라.”

흠.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주변엔 털끝만큼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전 해가 완전히 졌고, 도시는 완전히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이런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했던 조안나는 다시 한 번 위축되었다. 악마나 마수보다 도시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더 섬뜩했다.

“그럼 밥부터 먹을까요.”

“…그러죠.”

태평한 루카스의 말에 괜히 꿇리기 싫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 받은 식량 대부분은 보관과 조리가 간편한 전투식량이었다. 그 외에 열량이 높은 초콜릿 에너지바, 육포도 있었다.

절그럭-

캔을 뜯어 안에 있는 닭고기를 떠먹는다. 간이 제법 잘돼 있다. 입맛이 까다로운 조안나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들렸다.

식사가 모두 끝났을 때쯤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더니 거의 부서진 가로등이나 망가진 벤치, 무너진 건물을 손으로 훑기 시작한다.

“뭐 해요?”

“경보 마법을 설치할 장소를 찾고 있습니다.”

“경보 마법?”

조안나가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뭐예요?”

“주변에 누군가 접근하면 알려 주는 마법이오.”

마도학으로 구현된 센서 같은 건가?

“그런 마법도 있어요? 전 처음 듣는데.”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은 것처럼 살짝 요동쳤다. 마나가 희미하게 일렁이는 걸 보니 마법사가 맞긴 하나 보다.

“그거, 저도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이 부탁은 의외였다.

루카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자, 조안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둘이 같이 설치하면 부담도 줄 거 아녜요.”

“그러죠.”

“정말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언제 퉁명스러웠냐는 듯 눈을 반짝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과연. 첫인상과 달리 조안나는 그가 좋아할 만한 유형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수식을 말해 주려던 순간, 루카스는 다시 침묵했다.

“왜 그래요?”

“오래된 지도이므로 맹신하지는 말 것.”

“네?”

“지도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크륵, 크륵…….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걸까. 어둠에서 태어난 듯한 수십 마리의 마수가 이쪽을 보며 새빨간 눈동자를 깜박이고 있었다.

그제야 조안나의 표정도 바뀌었다.

“도시를 떠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수는 많지만 시답잖은 놈들인 것 같네요. 왼쪽은 당신이 맡으세요. 오른쪽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미안한데, 나는 악마나 마수를 죽일 수 없습니다.”

“농담할 때 아니거든요.”

“진담인데.”

“그게 무슨 헛소리…….”

루카스는 꾸물거리는 마수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여길 부탁합니다. 트럭은 꼭 보호해 주시고.”

“네, 네? 이봐요! 어디 가요?”

대답하지 않고 마수들을 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마법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신묘한 움직이었으나, 작은 패닉에 빠진 조안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나 혼자 두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이봐요! 대답 좀… 아 진짜.”

주변에 있던 수십 마리의 마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강한 놈들은 아니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다.

마수의 특성. 끈질기고, 집요하고, 하여간 귀찮은 족속들.

그런 놈들을 상대로 트럭을 지켜야 된다니? 그것도 혼자서!

조안나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붉어진 얼굴로 빽 외쳤다.

“이, 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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