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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9화 (260/857)

외전 39화

기자 회견.

그건 민하린의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생소한 무언가였다.

“하아…….”

한숨이 푹 나왔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튀는 카메라 플래시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때문에 혼이 쏙 빠졌다. 중간부터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루카스가 없었다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놨을지도 모른다.

‘피곤해.’

악마를 사냥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피로다. 새하얗게 불태운 느낌이랄까. 슬쩍 보니 리오도 티를 내진 않지만 지친 표정이다.

‘딱 5분만 쉬고 싶다.’

그리고 물.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뭐 하는 거예요? 느긋하게 있을 시간 없다니까.”

그러나 저 마녀는 쉬게 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조안나는 고작 이 정도로 지쳤냐는 듯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차로 움직일 거니까 이동하면서 쉬세요.”

“차요?”

차량을 말하는 건가? 그 순간 광장에 검은색 리무진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민하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조안나가 훗 하고 웃으며 우아하게 리무진에 탑승한 다음 말한다.

“타세요.”

“아… 네.”

루카스와 민하린, 그리고 리오가 리무진에 탑승했다.

엉덩이에 쿠션이 닿는 순간 그대로 푹 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푹신했다. 과장 좀 하면 몸이 쿠션과 하나가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주로 활동했던 아시아 지역에도 차량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물자를 넉넉히 실을 수 있는 군용 차량이나 트럭이었다. 폐차 직전의 승용차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몇 번 봤지만, 이토록 말끔한 외관의 리무진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아.’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고, 탑승감도 편안했다. 심지어 안에는 소형 냉장고까지 있었다. 조안나가 그곳에서 캔 음료 몇 개를 꺼내서 건넸다.

“받아요.”

“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얄미운 여자지만 입 싹 닫고 받기엔 양심이 찔린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캔을 받았다. 생전 처음 보는 브랜드의 콜라였다. 살짝 마셔 보니 입안에 달짝지근한 맛과 함께 탄산이 톡톡 튄다. …맛있다.

리오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뺏기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영국, 이후에도 유럽을 벗어난 적이 없는 리오에게 있어 창밖에 펼쳐진 고층 빌딩의 향연은 문자 그대로 신세계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민하린이 물었다.

“본부에 가요.”

“포탈이 광장에 있어서 본부도 근처일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미국은 다른 지역과 많은 점이 달라요.”

“…아.”

민하린은 그리 중얼거리고 다시 캔 콜라를 마셨다.

조안나는 싱거운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유럽에서 온 사냥꾼. 유럽이면 하루가 멀게 악마와 칼을 맞대는 최전선 중의 최전선이 아닌가. 덕분에 그곳에 있는 사냥꾼들은 철저한 실전파임과 동시에 실력파라고 들었다.

물론 최고의 커리큘럼과 협회의 막대한 지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미국 사냥꾼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역전의 용사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심지어 이번에 온 사냥꾼은 협회장 닐 플란드의 손님이라고 들었기에 그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런데 직접 보니 이게 뭐란 말인가.

여자 하나와 꼬맹이 하나, 그리고 자칭 마법사 하나라니.

그나마 민하린이란 사냥꾼은 아시아권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루키라고 한다. 물론 이상한 점도 있었다.

‘화이트 플라워는 검사라고 들었는데, 왜 마나의 잔향이 느껴지는 거지?’

민하린에겐 마법사의 냄새가 났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이 여자는 최소 3성의 마법사다. 최소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아크메이지인 조안나의 눈에는 마뜩잖게 보일 뿐이다.

애초에 그녀는 바쁜 스케줄까지 스킵하고 그들을 안내하러 온 거다. 협회장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서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때문에 여기 오기 전부터 심사가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빼가며 왔더니 이런 애송이 셋이 손님이라니.

‘협회장님은 예의를 갖추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불성설이다. 이런 급 낮은 사냥꾼들에게 차릴 예의는 없다.

조안나의 시선이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에게 향했다. 표정 하나는 그럴 듯했다. 그래도 나이를 허투루 먹진 않았는지, 신문물에 정신 못 차리는 둘보다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 봤자 허세겠지.’

셋 중에서 가장 한심한 자를 꼽으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남자였다.

정체는 수수께끼지만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민하린, 척 보기에도 기초가 확실하게 잡혀 있는 리오와 달리 이 남자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게 불쾌했다. 마나조차 없어 보이는 주제에 마법사를 자칭하다니.

만만한 게 마법사란 거겠지. 이런 놈은 아예 마나룸을 작살내서 평생 주문 따위 못 외우게 만들어야 되는데.

“…….”

그때 재밌는 생각이 났다.

“이봐요, 프레이라고 했죠? 당신 몇 성이라고 했더라.”

“앞가림은 할 수 있습니다.”

아까 전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조안나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아. 그래요? 난 적어도 5성은 되어야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으로 3성의 마법사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1인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안나는 일부러 허들을 높였다. 사실 3성이든 5성이든 상관없었다. 마나의 기척이 쥐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다. 재능이 더럽게 없거나, 마나 감응도가 절망적인 1성이겠지.

“그리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

그 말에 조안나의 눈썹이 살짝 치켜떠졌다. 이 남자는 방금 자신이 5성 마법사 정도의 실력이라고 시인한 셈이다. 비웃음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아직 미국 본부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있다.

시간이나 죽여 볼까. 저 허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고.

“…….”

그때 루카스가 처음으로 조안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순간 조안나는 왠지 모르게 전신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치맛자락을 꽉 쥐고 말았다.

“함부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그건 중얼거림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낮았다. 그런데도 조안나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그 어떤 외침보다도 크게 들렸다.

루카스가 짧게 덧붙였다.

“두 번은 없어.”

흡. 형용하지 못할 압박감,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잡은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었다. 조안나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루카스를 보았으나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미국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 * *

미국 본부는 엄청난 높이의 마천루摩天樓였다. 고개를 90도로 젖혀도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조안나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미국 본부입니다. 필스카이 타워라고도 불리죠.”

그리 말하며 힐끗 루카스의 눈치를 본다. 조안나의 태도는 아까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민하린이 1층을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평화롭네요.”

마치 상가를 연상케 했다. 음식점부터 시작해 커피숍, 의류점, 심지어 오락실 같은 것도 보였다.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앉아 조잘거리고 있었는데 표정엔 위기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화를 인식하기는커녕, 당연하다고 느껴야만 나올 수 있는 얼굴이다.

“…꼭 사냥꾼이 아닌 것 같아.”

“잘 봤네요. 저 사람들, 사냥꾼 아니에요.”

민하린의 혼잣말을 듣고 조안나가 대답했다.

“아. 그럼 협회에 근무하는 민간인인가요?”

“아뇨. 그냥 일반인입니다.”

“일반인이 미국 본부에 어떻게 출입을……?”

“필스카이 타워는 미국 본부임과 동시에 맨해튼의 최고 관광지 중 하나예요. 50층 밑은 일반인들의 출입도 허가되어 있죠.”

“…….”

민하린이 툭 입을 벌렸다. 사냥꾼 본부가 관광지라니? 상식이 개벽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악마에게 공격받을 일이 없는 미국에선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안나는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였는데, 중간에 ID 카드를 스캔한 걸 보니 사냥꾼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인 듯하다.

그때, 경비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와 조안나에게 무선 인이어를 주었다.

“조안나 님,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인이어를 홱 낚아채 자신의 귀에 끼운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꾹.

길쭉한 손가락이 125층을 눌렀다. 높기도 높다.

조안나는 갑자기 침묵했다. 인이어에서 작은 소음이 들리는 걸 보니 무언가 보고를 듣는 듯했다.

60층쯤에 이르렀을 때쯤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밥은 먹었어요?”

“아니오.”

“잘됐네요. 저도 식사는 아직이니 우선 밥부터 먹어요. 시간도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아깐 느긋하게 있을 시간 없다면서. 민하린이 속으로 불평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조안나가 먼저 내리며 말했다.

“125층은 사냥꾼들의 휴식 공간이에요. 음식점부터 시작해서 휴게실, 도서관, 노래방, 게임방……. 작지만 골프장이랑 영화관도 있어요.”

허. 놀람에 끝도 없다. 설마 이 정도까지 시설을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전 세계에서도 미국만이 가능한 기행일 것이다.

조안나는 힐끗힐끗 층을 둘러보는 민하린과 리오를 보며 말했다.

“각 지부에선 미국 사냥꾼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숨겨요. 왠지 알아요?”

“…글쎄요.”

“한 번 여기 머물면 돌아가기 싫어지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든요. 우리도 오는 사냥꾼들은 막지 않고. 어차피 땅덩어리는 넓고 사람은 부족한 세상이니까.”

사람이 곧 자원이다. 조안나는 은유적으로 그리 말한 것이다.

뒤이어 음식점이 보였다.

종류도 참 다양하다. 양식이나 중식, 일식. 심지어 한식까지 있었다. 살짝 흘러나오는 냄새만 맡아도 침이 고일 지경이다. 틀림없이 일류 셰프들로만 구비되어 있지 않을까.

테이블에 앉은 민하린과 리오가 먹을 걸 고르는데, 조안나가 잠깐 루카스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해요.”

“…….”

무슨 속셈일까. 루카스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조안나는 오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차량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듯하다.

그 일을 따지기 위해서? 아니. 지금 이 여자에겐 그 정도 배짱이 없다. 함정을 판 건가? 그건 더욱 가능성이 없다.

아마 정말로 개별적인 용무가 있는 거겠지.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먹고 있어.”

“아… 네.”

민하린과 리오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우선은 스승의 말을 따르려는 듯하다.

루카스와 조안나는 음식점과 조금 떨어진 라운지로 이동했다. 유리로 된 벽면 때문에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다.

의자는 많지만 조안나는 앉지 않았다. 금방 끝날 얘기인 듯하다.

“협회장님께서 불렀어요. 당신 혼자 오라더군요.”

조안나가 자신의 왼쪽 귀에 걸린 인이어를 톡톡 치며 말했다.

“나 혼자?”

“네.”

“…….”

닐이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다. 민하린과 리오를 동행시키지 않고 혼자만 부른 것엔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독대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177층으로 가면 돼요. 그럼 전 이만.”

그리고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떠나려고 한다.

“당신도 동행하지 않는 겁니까?”

그녀는 전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177층 전부가 협회장님의 개인 공간이에요.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출입할 수 없죠. 저도 예외는 아니고요.”

“…….”

“일행분들은 제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용무가 끝나면 여기로 오세요.”

루카스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런 다음 177층을 누른다.

닐 플란드의 개인 공간. 그곳을 향해 올라가는데,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159층. 그곳에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라이더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 남자였다.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었고, 구레나룻부터 턱선까지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남자를 보는 순간 루카스는 말문이 닫힐 수밖에 없었다.

─놀랐다.

경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음.”

남자는 힘없는 기색으로 하품한 다음 층을 누르려고 하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루카스는 빠르게 평정심을 찾았다. 그의 눈가가 살짝 좁혀졌다.

지금 눌린 층수는 177층뿐이다.

즉, 이 남자도 177층에 볼일이 있다는 것이다.

허락받지 않은 이는 출입할 수 없는 협회장의 개인 공간에.

…아니. 진짜 문제는 그딴 게 아니다.

루카스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봐.”

“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은?”

그제야 남자가 살짝 고개만 돌려 루카스를 보았다.

남자는 따분하다 주장하는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레티프.”

띵—

대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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