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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35화 (256/857)

외전 35화

김고혁은 전투불능이 되었다.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이 잘렸는데 싸울 수는 없다. 그처럼 초인의 경지를 넘보는 인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그의 전력은 10분의 1이하로 뚝 떨어졌다.

종호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부하 사냥꾼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김고혁을 지혈해라.”

“예.”

칼을 뽑는다.

화산의 대표적인 검술인 매화검법. 물론 종호 또한 매화검법을 익혔다.

이십사二十四, 십사十四, 그리고 칠七. 세 개의 검법 숙련도에 대한 자신은 차고 넘친다. 당연한 일이다. 일평생을 바쳐 온 매화검법이다. 누군가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스스스—

종호의 칼이 일렁였다.

최초의 한 수. 어떤 검법이 가장 효과적일까. 의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왔다.

매화검법의 묘용 중 하나인 환검. 칼끝이 몽환적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칼날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루카스와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

다시 말해 환검의 범위 안.

스스스

일렁거림이 점차 거세졌다. 마치 사나운 강풍을 맞은 듯 크게 요동친다. 그 움직임에 맞춰 점점 검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칼날로 만든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루카스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혼란스럽게 만들어야만 했다.

주륵.

“…….”

종호의 주름진 얼굴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증식한 수십 개의 칼날. 그 칼날은 검기로 만들어진 잔상이므로 환검이되 환검이 아니다. 이 실체를 가진 환영은 실낱같은 빈틈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환검이 효과를 주었는지, 주지 않았는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상대방의 눈동자를 직시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몽롱하게 풀렸다면 종호는 그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완벽하게 들어갔다면 아예 최면에 빠진 것처럼 비틀거리기까지 한다.

그럼 루카스는 어떤가.

‘전혀 효과가 없다.’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겪었는데도 불신감이 드는 광경이다.

왕년의 차궁환 본부장, 인룡 이종학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루카스의 시선은 정직하게 칼끝을 향하고 있다.

이 남자는 환검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검법에 무지한 마법사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은 매화검법에 대한 식견이 없다. 그러니 칼끝을 주목한다. 처음 보는 검법의 움직임을 읽을 때 가장 정답에 가까운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검법을 처음 겪는 자는 필연적으로 환검의 늪에 빠진다.

위화감을 깨달아도 이미 현혹된 다음이다.

그런데 루카스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는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 칼끝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눈빛은 시릴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지금 루카스의 정신은 굳건하고,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바위나 호수에 기술을 쓴 것 같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종호는 빠르게 칼을 거두었다.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게 확실한 이상, 기의 소모가 심한 환검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다리를 박차는 동시에 종호의 칼에 섬광이 맺혔다.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劒, 4초.

매영난세梅影亂世.

콰앙!

“꺽!”

닿지 못했다. 종호는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마치 트럭에 치인 것 같은 충격에 일순 시야가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다.

하이퍼 볼트. 6성 마법 중에선 위력이 가장 약했지만, 급소에 직격한다면 얘기는 다르다. 무엇보다 종호는 마법이 접근하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헉……!”

“거, 검제님을 지켜라!”

사냥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종호를 지켰다.

그중 몇 명은 루카스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종호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아, 안 돼.’

너희들이 맞설 상대가 아니야.

종호는 그리 외치고 싶었지만 방금 전의 충격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휘오오!

뼛속까지 얼릴 지독한 한풍이 휘몰아쳤다. 루카스에게 달려들던 다섯의 사냥꾼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콰지직! 뒤이어 칼날바람이 그들의 몸을 산산이 박살 냈다.

“어……?”

“무, 무슨 일이.”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사냥꾼들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 그중엔 고위 귀족 토벌에 성공한 사냥꾼도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순간,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쩌면 자신의 죽음조차 깨닫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마, 말도 안 돼…….”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반응이야말로 방금 전 광경을 본 모든 이의 속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명만은 달랐다.

“묘한 사술을 쓰는군.”

여태 침묵하던 화랑단장이 등에 걸려 있던 엄청난 크기의 대도大刀를 뽑으며 중얼거리자 루카스가 되물었다.

“사술로 보이나?”

“그게 아니면 김고혁과 검제 어르신을 저리 빨리 제압할 수 없었겠지. 과연.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점점 네놈이 악마라는 쪽에 추가 실리는군.”

화랑단장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을 거다. 이 환두대도環頭大刀 앞에서 사술은 통하지 않으니까.”

콰앙!

화랑단장의 몸뚱이가 포탄처럼 루카스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맹한지 단단한 듀얼 룸의 바닥이 들썩일 정도였다. 그의 전신에서 투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가장 패도적인 사냥꾼.

사람들은 화랑단장을 일컬어 인간전차라고도 말한다. 자신의 몸통만 한 환두대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그가 지나간 길엔 피와 살점밖에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환두대도엔 마법을 비롯한 악마의 권능, 거기에 각종 이능의 힘에 대한 무효화 술식이 새겨져 있다.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추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보도寶刀인 것이다.

카앙!

“……!”

화랑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환두대도는 루카스와 한 뼘 정도의 간격을 남겨 둔 채 더 전진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환두대도를 밀어내고 있다. 거대한 철 금속을 후려친 것처럼 손목이 뻐근했다.

‘무슨 강도가…….’

그의 힘이라면 설령 강철 덩어리도 반으로 쪼개 버릴 수 있다.

즉, 지금 루카스를 지키고 있는 벽의 강도는 강철 이상이라는 얘기다.

루카스의 무심한 시선이 맞닿았다.

“큭.”

화랑단장이 굴욕감에 침음을 내뱉었다.

그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흐읍!”

다시 한 번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이번엔 연격이다.

비록 보이진 않아도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효과가 있을 터.

카앙! 카앙! 카앙!

…얼마나.

얼마나 내려쳤지? 화랑단장은 자문했다. 아마 수십 번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히 굳건하다. 효과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물러서요, 화랑단장.”

아미의 신녀, 금려화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새하얀 백광이 나오고 있었다.

신안神眼. 그녀가 신녀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묘한 통찰력으로 루카스를 관찰했다.

‘…악마?’

저 남자는 정말로 악마인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다. 그에게선 악마 특유의 악기가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구체화될 정도로 농밀한 마나와…….

‘노디에소프 님과 같은…….’

금려화는 본능의 경고로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한 번 깨문 다음 말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건 사술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마법.”

“뭐?”

금려화가 말을 이었다.

“단순한 배리어 마법입니다.”

“헛소리!”

화랑단장이 불신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배리어라면 기껏해야 4성의 마법이다.

자신과, 자신의 환두대도가 그딴 마법 하나 뚫지 못했다고?

“아니, 금려화의 말이 맞네.”

종호가 억지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지는 모르지만, 이 남자는 마법사가 맞다.

김고혁은 마법사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종호는 김고혁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았으나, 그 또한 마법사를 대단히 여기진 않았다. 일정 경지에 접어든 무인일수록 그 생각은 짙어질 것이다.

마법사는 쉽게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인재며, 현 인류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전력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직접 전투에는 취약하며, 고위 귀족 토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악마들이 다루는 권능은 애초에 마법의 상위 호환 격이다. 그들은 큰 소모값이나 대가 없이 마법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통계, 역사, 그리고 종호의 경험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가 보이는 모습은 그가 여태껏 가지고 있던 관념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직접 전투에 적합하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어? 악마의 권능보다 못한 힘이라고? 저 모습을 보고도 그딴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종호는 루카스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죽음에 대한 압박 또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설령 공작을 눈앞에 두었다 한들, 지금보다 암담한 심정은 아닐 것이다.

‘큭……!’

종호가 혀를 콱 씹었다. 꺾일 것 같았던 마음을 억지로 이어 붙였다.

그때였다.

“우, 움직이지 마!”

겁먹은 목소리로 외친 건 검제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 또한 화산 출신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제자의 모습을 본 순간 종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었다.

공포에 찬 듯한 그 손에 붙들려 있는 건 기절한 유럽의 사냥꾼이었다.

“움직이면 이자를 죽이겠다!”

종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 살갗이 까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유럽 본부에 오고 나서 줄곧 참았다. 니나와 싸울 때도, 같은 인간들을 죽일 때도, 김고혁이 학살을 자행하는 것도 모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저건 마지막 남은 도리마저 저버린 채 쓰레기가 되는 행위였다.

“무슨 짓거리냐—!”

종호의 목소리가 포효처럼 터져 나왔다.

“스, 스승님?”

그는 멍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제자에게 성큼 다가가, 칼자루로 그의 뒤통수를 찍어 기절시켰다. 제자는 설마 스승이 자신에게 손을 쓸 줄 몰랐는지 그 자리에 기절했다.

“후욱……. 후욱……!”

루카스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종호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당신을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이쪽에도 사정이 있소. 여기서 물러설 수 없는 점 양해해 주길 바라오.”

종호는 거기까지 말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 가면 죽어.’

궁신 나종철. 종호의 오랜 벗 중 하나인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연이은 고문으로 심신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그리 충고했다. 나종철은 루카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종철이 악마에게 현혹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보고, 두 눈으로 판단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직접 마주하니 알겠다. 루카스는 악마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도 아니다.

“포기하는 건 이릅니다, 검제 어르신. 우리 모두가 합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화랑단장은 종호의 목소리에서 자포자기를 읽었는지, 굳센 목소리로 말하며 환두대도를 고쳐 세웠다. 그 태도가 잘못된 건 아니지만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젊은 혈기로 극복할 수 있는 상대가 있고, 극복할 수 없는 상대가 있다.

루카스는 명백한 후자였다. 이유는 하나다. 힘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니까.

그래서 의아했다.

‘왜 아직까지 우리를 살려 두고 있는 거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인간들 따위는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텐데.

“널 죽일 생각은 없다.”

종호가 움찔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마치 루카스가 자신의 속내를 읽고 대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검을 집어넣고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왜 놓아주겠다는 것이오?”

“거래를 했으니까.”

“거래라면…….”

종호의 표정이 뒤틀렸다.

“…우리 본부장과 말이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종호는 순간적으로 짙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들의 역할을 깨달은 것이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의 싸움에 휘말린 한낱 벌레, 이들의 까닥거리는 손가락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판 위의 바둑돌.

그게 바로 자신들이었다.

비참했다.

루카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떠는 종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거래 때문만이 아니야.”

“…무슨 말이오?”

뒤이어 종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니나를 살려 주었으니까. 그 답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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