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9화
저 말은 농담이 아니다.
루트비히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옳지 않은 행동임을 알면서도 니나를 곁눈질할 수밖에 없었다.
‘본부장님…….’
루카스. 들은 적 있는 이름이다. 이종학과 함께 온 금발 남자의 이름이 분명히 루카스였다. 독특한 이름은 아니다. 오히려 유럽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루트비히는 이들이 찾는 루카스는 그 금발 남자라고 확신했다.
그의 뚜렷한 정체는 모르지만, 본부장인 니나 레드니코바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루트비히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루카스는 약 한 달 동안 이 기지에 머물렀지만, 다른 사냥꾼과 접촉하지 않았다. 니나를 비롯하여 2~3명의 인물과만 교류했다고 들었다. 루트비히 첫 만남 이후로는 그와 다섯 마디 이상 나눠 본 적이 없다.
‘그 남자를 숨겨 주는 게 정말 올바른 판단인가?’
물론 김고혁의 무례한 태도에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은 게 본심이다. 어떤 요구를 하든 가래침을 내뱉으며 무시하고 싶다.
하지만 그리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상대는 아시아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세 마리 용 중 하나다.
‘제길.’
실감이 나지 않는다. 눈 깜박할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해 버렸다.
같은 인간끼리 싸우는 걸 염려할 순간이 오게 될 줄이야.
이따위 세상에서 그런 일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루카스란 남자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될 만한 가치가?
루트비히는 니나를 향해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으나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흐음.”
김고혁이 콧소리를 내며 니나를 직시했다. 그는 처음의 공격 이후에 더 이상 수를 쓰지 않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루트비히는 김고혁이란 남자의 본질이 어느 정도 보였다. 어쩌면 경박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쪽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한 수작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값싼 도발에 완벽하게 낚인 건 자신밖에 없었다.
니나는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했고, 니콜라스 또한 과격한 행동은 취하지는 않았다.
“김고혁, 너는 그 새 본부장이란 자의 말을 모두 믿는 거냐.”
“물론이지.”
“그가 어떤 증거를 들이밀었나? 내게 말해다오. 납득할 수 있다면… 루카스란 남자를 찾는 데 협력하겠다.”
“하하.”
김고혁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설프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겠다는 건가. 뭐, 어찌 되든 좋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상상해 봐. 눈앞에 왕좌가 있고, 거기에 정신 나간 폭군이 앉아 있는 광경을.”
“…뭐?”
뜬금없는 말에 니나의 표정에 의구심이 어렸다.
김고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주위엔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기사 수백 명이 있지. 그가 손 한 번만 휘저으면 내 목이 떨어지는 건 일도 아냐.”
“…….”
이 남자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니나를 비롯한 사냥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을 보냈다.
“그때 폭군이 귤을 꺼내면서 말하는 거야. [이 사과가 참으로 맛있어 보이지 않느냐?]”
김고혁은 왕의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려는 듯했으나, 표정도 발성도 형편없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삼류 광대보다도 못한 모습, 누군가 헛웃음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럼 나는 대답하겠지. [전하, 그건 사과가 아니라 귤입니다.] 다시 폭군이 말하고. [아니. 이건 사과니라.]”
“푸흡. 하하하! 아하하하!!”
김고혁은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정말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댔다. 니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아, 예. 거참 더럽게 맛있어 보이는 사과네요.] 하고.”
“…….”
“알겠나, 니나 본부장? 그 루카스란 놈이 노망 걸린 늙은이든 눈 돌아가게 예쁜 미녀든 갓 태어난 핏덩이든, 그딴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노디에소프 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단 거지. 재앙을 일으키는 게 루카스라고.”
“…….”
김고혁이 다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말해 주지 그래. 루카스가 어디 있는지. 협력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정중히 에스코트해 갈 거라니까?”
“…후우.”
니나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김고혁의 제안에 대해 아주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니나는 루카스에게 목숨과 그 이상의 것들을 빚졌다. 그에게 입은 하해와 같은 은혜는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여생을 모조리 바쳐도 갚지 못할 만큼 크다.
그러나 니나 레드니코바라는 인물은 유럽의 본부장이다.
그녀의 어깨에 유럽 수십 만 사냥꾼의 명운이 달려 있다.
…만약 여기서 루카스의 위치를 밝히고, 그와 무관계함을 주장한다면.
루카스는 아마, 아니. 확실하게 니나의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다. 원망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
김고혁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니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니나가 눈을 떴다. 눈동자를 보니 알겠다.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계산은 끝내셨나.”
“그래.”
“대답은?”
김고혁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순간, 니나가 말했다.
“모른다.”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김고혁이 박수를 쳤다.
“이기적인 여자로군. 방금 그 선택으로 유럽 사냥꾼 전부가 저승길 확정이야.”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애초에 네놈은 이 러시아 지부를 집어삼킬 목적으로 왔지 않나.”
“호오. 왜 그리 생각하지?”
“방금 전부터 통제실과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니나가 자신의 인이어를 가리키며 말하자 김고혁이 히죽 웃었다.
“역시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가 봐. 늙은이 특유의 통찰력이 있어.”
그 순간 내색하진 않았으나, 기회가 되면 김고혁의 얼굴을 피떡이 될 때까지 후려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맞아. 다른 지부는 몰라도 여기는 모조리 없애라는 지시가 있었다.”
변태 같은 놈.
어차피 몰살시킬 생각이었으면서 선택권을 주는 척 이쪽을 농락하다니.
니나가 루카스의 존재를 끝까지 숨긴 건 별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저 김고혁이란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판단한 것일 뿐이다.
“덧붙여서 루카스란 남자는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보았어.”
김고혁이 문 바깥을 가리켰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마주쳤지 뭐야. 딱히 잘난 건 없어 보이더라. 그래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생김새를 들어서 한눈에 알아봤지.”
“그런데 왜─”
“왜 그냥 지나쳤냐고?”
김고혁이 니나의 말을 가로챘다.
“당연히 떡밥을 깔아 뒀지.”
* * *
한동안 오오츠루를 내려다보던 루카스가 천천히 말했다.
“나종철은 융통성이 없는 아이였다.”
“…예? 아. 네. 그렇습니까.”
오오츠루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종학은 나를 싫어하지.”
도무지 화제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오츠루는 이럴 시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순간적인 감정에 먹혀 은원을 도외시할 인물은 아니야. 그 또한 미련할 정도로 올곧은 남자니까.”
“…….”
오오츠루의 얼굴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루카스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종학은 결코 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어색한 연기는 집어치워라, 오오츠루.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다. 나종철은 살아 있나?”
“…….”
그 순간 오오츠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라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후.”
낮은 호흡 소리와 함께,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살아는 있지. 빼낼 정보가 아직 남았으니까.”
이제야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오오츠루는 루카스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그것보다… 내가 연기가 어색하다니.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솔직한 감상이다.
오오츠루는 스스로의 연기력이 어설프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직업상 첩보나 정보 수집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와 같은 임무를 수행할 때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군중에 섞여야 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킨 적이 없었다.
뜻밖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오오츠루는 느긋했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노디에소프 님께서 주의하라 말씀하셨으니 날고뛰는 사냥꾼조차 당해 낼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겠지.”
“그걸 아는 것치고는 당당한 태도군.”
“크크.”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이미 이곳의 통제실은 우리 통제하에 놓였다. 지금쯤이면 포탈의 제어권 또한 우리에게 넘어왔겠지.”
그 말에 루카스가 멈칫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항이 거세더군. 사로잡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도 없었고 말이지.”
“민간인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뭐? 그들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뭘 모르는 것 같은데, 협회에서 일하는 자들이라면 다들 죽을 각오는 마쳤어.”
그래. 각오는 했겠지.
다만 악마에게 죽을 각오를 한 것일 터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
루카스의 눈이 점점 가라앉았다.
이 남자는 루카스의 힘을 알고 있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태도가 여유로웠다. 절대적인 방어막에 보호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당당했다.
루카스가 아무리 고심해도 그 이유에 대해선 뚜렷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콰악!
“…꺽!?”
오오츠루의 목이 루카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이, 무슨…….”
찰나지간 벌어진 일이지만 오오츠루는 반응했다. 알 수 없는 인력引力을 느낀 순간,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회피기를 모두 사용한 것이다. 그중 두 가지는 그 어떤 위기에서도 오오츠루를 구한 절대적인 생존기였다.
그러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니 루카스가 자신의 목을 한 손으로 조르고 있었다.
“역시. 강하, 군.”
오오츠루가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크, 크흐흐. 하지, 만. 네놈은 인간, 을 죽이지 못할, 텐데……?”
“노디에소프가 그리 말하던가?”
“그렇, 다.”
“…….”
루카스가 손을 놓았다. 바닥에 털썩 떨어진 오오츠루가 콜록대며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괴로워 보였으나, 역시 생각대로라고 말하는 듯한 의기양양함도 엿보였다.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구나.”
“그래! 쿨럭, 그분께서 직접, 말해 주셨으니까!”
노디에소프.
강림하고 한 달도 채 경과하지 않았는데, 벌써 광기에 가까운 숭배를 받고 있다.
물론 이해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절대자가 발휘하는 카리스마는 저주나 세뇌에 가깝다. 오오츠루는 상당히 유명한 네임드 사냥꾼이며, 인간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 강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절대자의 목소리에 저항하기 위해 필요한 건 육체의 강함이 아닌 올곧은 정신력이다.
공포에 떨면서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상대라면 노디에소프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종철 같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겠지.
오오츠루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냥꾼 대부분은 노디에소프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적 진실로 여길 것이다. 설령 그들의 가족이 악마라는 말을 들어도 웃으면서 자식의 목을 조르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부터 근본이 썩어 있었으니까.”
“뭐?”
“너 같은 인간은 노디에소프에게 선동당한 게 아니야. 지금 이게 본모습에 가깝겠지. 오히려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오랫동안 숨겨 왔던 진짜 면모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죽일 필요가 없었던 자들까지 모조리 몰살시킨 것이다.
이런 자들이 있다.
루카스로 하여금 짙은 회의감을 들게 하는 자들.
인간이 혼돈의 종족임을 안다. 선악이 공존하기에 무엇보다 빛나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과 별개로, 이런 추악함을 직시하는 건 루카스에게 있어 긍정적인 일이 아니었다.
꿀렁꿀렁…….
마치 악의에 노출된 듯,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어둠이 그를 잠식한다. 여태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을 들게 한다.
흔들리는 건 아니다. 신념에 금이 간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 자체가 루카스의 기분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민하린과 리오를 가르칠 때 느꼈던 것과 정반대의 감정.
“흐하하! 너도 나에 대해 잘 아는구나!”
이 머저리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루카스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겨운 놈.
뿌직.
“…어?”
오오츠루는 멍청히 눈을 깜박이다가, 곧 어깨에 불을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끄윽……!”
왼쪽 어깨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언제, 어떻게? 오오츠루는 이해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루카스는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인간을 죽이지 못해? 노디에소프가 그리 말하던가? 놈이 내 행동을 강제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나?”
의아함은 불쾌함이, 불쾌함은 분노가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루카스의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목소리가 울렸다.
필멸자를 벗어난 이후 가장 경계했던, 절대자로서의 자아가 끊임없이 속삭인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볼 때마다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목소리는 루카스에게 은근히 제안한다. 더 이상 모순에 괴로워하지 않고, 법칙에 순응하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
그게 얼마나 강렬한 유혹인지 안다.
“어, 윽…….”
뒷걸음질 치던 오오츠루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빠악! 루카스가 그대로 턱을 발로 차 버렸다. 오오츠루는 끅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루카스는 상처가 난 그의 어깨를 지그시 밟았다.
“끄아아악!”
비명 소리마저 역겹다.
만약 노디에소프의 목적이 루카스를 화나게 만드는 거라면 그는 정말로 훌륭하게 작전을 성공한 것이다. 그 사실이 놈에게 있어 긍정적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네놈은 몇 가지 역겨운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끔찍한 건.”
“끄으으……! 이거 치워라……! 이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대답하지 않고 발에 힘을 더 주었다. 꾹 눌린 스펀지에서 물을 짜내는 것처럼, 오오츠루의 어깨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비명 소리가 울렸다.
“네놈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