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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27화 (248/857)

외전 27화

“나중에 얘기하지. 해야 될 일이 있다.”

“해야 될 일?”

“나도 사람을 찾아야 된다.”

이종학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고혁의 고개가 기우뚱거린다.

“그게 누군데?”

“도시에 있는 민간인들.”

“찾는 게 아니라 구출이겠지. 그것보다 진심이냐? 저길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김고혁의 말에 동의하듯 5층짜리 건물이 불에 먹혀 붕괴하는 게 보였다. 아무리 이종학이라고 해도 불에 완전히 뒤덮인 도시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하물며 악마까지 도사리고 있단 걸 가정하면 자살이나 다를 바 없다.

이종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고혁은 그의 마음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넌 정말 여전하군.”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바꾼다.

“이종학, 신을 믿나?”

“잡담은 나중에 하지. 지금 내겐 시간이 없어.”

“잡담 같은 게 아냐. 중요한 거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종학은 평소 김고혁의 경박한 언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神.

신을 믿냐고?

“안 믿어.”

그딴 걸 믿을 리가 없지 않나. 이종학의 목소리에 분노와 증오가 뒤섞였다.

김고혁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오늘부턴 믿게 될 거다.”

“뭐?”

“나는… 아니. 우리는 신을 보았다. 이종학, 너도 앞으로 그분을 따라라.”

“무슨 소리를…….”

그때였다.

김고혁은 갑자기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그만이 아니다. 여태껏 그의 옆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동아시아의 사냥꾼들도 그 동작을 따라 했다.

“노디에소프시여! 도시에 있는 자들을 구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어린양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시옵소서!”

“부디!”

“…….”

이종학의 시선이 아연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헛짓거리란 말인가?

“어, 천룡 김고혁. 정신병동이라도 털어 오셨나? 아니면 사이비에 맛들린 거냐?”

드리사가 검지로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김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자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분명 드리사의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태도에 변함이 없다.

이제는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태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

드리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거 묘한데.’

공기가 오싹하게 차갑다. 사냥꾼들의 웅얼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스멀스멀, 발끝을 핥으며 기어 올라오는 광기狂氣의 감촉.

“이만 가겠다.”

이종학은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이종학을 제지했다.

“자, 잠깐만. 멈춰 봐.”

김고혁이 아니라 드리사의 목소리였다. 그가 떠듬떠듬 말했다.

“하, 하늘을 봐라…….”

넋이 나간 목소리에, 이종학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입이 툭 벌어졌다. 새까만 밤하늘에 거대한 물방울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아?”

기이한 걸 넘어선 광경이었다. 이종학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탈력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인지를 벗어난 현상. 다시 말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공포로 떨게 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으하하! 신께서 응답해 주셨다!”

김고혁이 환희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냥꾼들이 모두 환희를 터뜨렸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보라! 신의 힘을!”

파앙!

그 순간 하늘에 있는 물방울이 터지더니, 거센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

아니. 폭우가 아니다. 빗물은 창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불길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을 꿰뚫었다. 불길이 꺼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건물 자체가 붕괴한다.

“무슨 짓을……!”

이종학이 이를 갈았다. 저 정도 파괴력이면 악마도 위험하다. 그보다 연약한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끄아아—

“……!”

비명 소리가 들린 순간, 이종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검을 뽑아 들며 즉시 도시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이다.

김고혁이 그 앞을 막았다.

“비켜라.”

“사람들은 무사해.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

“좀 침착해. 귀를 기울여 보라고. 이게 인간의 비명으로 들려?”

키에에엑—

뒤이어 들리는 마수의 괴성에 이종학의 몸이 멈칫거렸다.

“냉정해지라고.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겠어?”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마법? 하하하!”

김고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딴 시시한 게 아냐. 이봐, 이종학! 아직 모르겠나? 네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한 일이라고.”

김고혁은 마을을 보았다. 저곳에 있는, 모든 악의 종자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쏟아진 빗줄기는 그야말로 숭고한 신의 철퇴였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상처를 보듬는 자애로운 손길이었다.

김고혁이 황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해 기적奇蹟이 일어난 거지.”

“…기적?”

과거 그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것.

이종학이 멍한 시선으로 도시를 보았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화염이 모두 사그라들었다. 탄내, 흐릿한 연기가 치솟는 가운데 도시 중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상처는 없다.

민간인들 모두가 살아남았다.

“…….”

이종학이 주먹을 꾹 쥐었다.

신의 기적.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되새기는 순간,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 * *

“리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리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빙긋 웃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건 제라르였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 바쁜가 봐?”

“조금.”

“그렇구나.”

제라르가 리오에게 다가갔다. 나란히 서자 자연스레 내려다보게 되었다. 남자치고는 건장한 제라르와, 아직까지 성장을 덜 마친 리오는 생각보다 체격 차이가 많이 났다.

“요즘 제12트레이닝 룸을 자주 들락거리던데.”

“그래.”

“거기 있는 사람, 루카스라고 했나? 니나 본부장님의 중요한 지인이라며?”

루카스는 지금 유럽 본부 내에서 유명인 아닌 유명인이었다.

“…….”

리오는 잠시 침묵했다. 그와 사승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를 숨겨야 될지, 드러내야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제라르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라르가 픽 웃었다.

“아무튼 내일 임무가 있으니까 새벽까지 준비해 둬. 이번에 새로 조에 편입된 사냥꾼이 있으니까 6명분의 준비물을 갖춰 두고.”

“안 가.”

“…응?”

제라르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이제 너랑 임무를 나갈 일은 없을 거야.”

제라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살짝 굳은 얼굴로 리오를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심호흡하는 소리와 함께, 표정을 정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갑자기 얘기하면 어떡해? 당장 내일이 임무인데 너무 갑작스럽다.”

“딱히 규칙에 위배되는 건 없잖아.”

“…….”

서포터는 사냥꾼 조에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임무 수행으로 받는 보상이 낮은 편이었으나, 한 가지 장점도 있었다.

조장의 허락 없이도 조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제라르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서포터를 관둘 수 있다. 물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다.

당연히 제라르는 불쾌해할 것이다. 리오는 그걸 원했다.

“내가 없다고 전력 손실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너처럼 훌륭한 서포터를 찾는 게 얼마나 힘들다고.”

리오는 대놓고 픽 웃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왜 웃어?”

잠긴 목소리는 분명한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제라르의 가면이 드디어 깨진 것이다.

“서포터 활동은 이제 그만하려고.”

“…사냥꾼 흉내는 포기할 거야?”

“응. 흉내는 그만두고 진짜 사냥꾼이 되려고.”

제라르는 한바탕 웃어 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리오의 조용한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억지로 입가를 비틀었다.

“네가? 무리일걸.”

“직접 시험해 볼래?”

“뭐?”

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라르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의 진의를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린다.

“하, 하하……. 설마 나랑 붙자는 거야?”

“어.”

“…주제 파악 좀 하면 안 될까. 대인전이라면 나를 이길 수 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싫으면 됐어.”

그리 말하고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리자 제라르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래. 붙자. 언제 할까?”

그러자 리오가 고개만 돌리며 말했다.

“네 임무 끝나고 바로.”

“일주일 정도 뒤인가. 좋아.”

그리고 슬며시 웃으며 말한다.

“단, 조건이 있어. 결투는 실전 조항을 적용해서 하는 거야.”

실전 조항 적용.

협회에서 공인한 결투에서 한쪽이 불구가 되거나, 그보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도 서로에게 죄목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즉 살인이 허용된, 목숨을 건 결투를 펼치자는 것이다.

제라르는 이번에야말로 리오가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좋아.”

그러나 이 반응은 예상외였다.

“기대할게.”

리오는 슬며시 웃고 있었다.

* * *

민하린은 3성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녀는 3성 마법 대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마도학에 대한 이해력이나 마나 컨트롤 또한 수준급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어떤 조에 가더라도 훌륭히 제 몫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리오의 성장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는 무왕권의 기초적인 형形에 대해 모두 터득했으며, 벌써 자신의 무술과 어느 정도 섞기 시작했다.

“…….”

루카스는 그들의 재능을 폄하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변혁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둘의 성장 속도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스승의 입장에선 기뻐해야 될 상황이지만, 루카스는 의아함부터 느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3성 마법사가 되다니? 루카스가 과거에 보았던 그 어떤 천재도 불가능한 일이다.

리오는 또 어떤가. 각기 다른 두 개의 무술을 섞는 건 웬만한 달인도 힘겨워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 리오는 기본적인 형은 훌륭하게 융합시키고 있었다.

‘민하린과 리오만이 아냐.’

이 우주에 있는 인간의 성장력은 비정상적이다.

루카스의 고향 우주에서 마도학은 수천 년간 내려왔다. 그 긴 세월 동안 인간과 함께했으며, 발전했다. 분야가 아닌 문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내력이 깃들어 있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 또한 마나에 걸맞게 진화되었다.

반면 이 우주는 어떤가. 이능의 힘이 비밀리에 전승되었다곤 하나 희미하고, 마나의 존재가 대두되고는 수십 년밖에 안 됐다.

그런데도 벌써 아크메이지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여럿 나타났다.

노력, 재능, 가르침, 천운. 그런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것 같다.

마치…….

‘우주 자체가 그들의 성장을 북돋는 듯한…….’

루카스는 거기까지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리 단정 짓는 건 시기상조다.

아무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건 좋은 일이다.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들이 자만에 도취하는 것이나, 민하린과 리오에게는 인연이 없는 단어다.

‘그리고 오늘.’

리오와 제라르의 결투가 벌어진다.

오전 10시에 제2듀얼 룸에서 열린다고 들었다. 물론 루카스도 참관할 생각이고 민하린도 올 것이다.

‘아직도 리오는 제라르보다 약하다.’

많은 부분에서 제라르보다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리오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방을 나서야 늦지 않고 참관할 수 있을 테니까.

방을 나서고 복도를 걷는다. 제2듀얼 룸은 이곳에서 세 층 아래, 즉 지하 8층에 위치해 있다.

루카스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띵—

문이 열렸다. 안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게 아니다.

루카스가 주목한 건 그들의 외관이었다. 유럽 본부 소속 사냥꾼이 아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

그들 중 하나가 루카스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표정을 험악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다음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너, 이 자식!”

그 남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루카스의 멱살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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