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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15화 (236/857)

외전 15화

“이제부터 어쩌실 셈입니까?”

“당분간은 여기 머물 생각이다.”

“당분간…….”

니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민하린은 내색하진 않았으나, 루카스의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그녀의 태도가 낯설어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소문의 개차반 니나 레드니코바는 어디로 간 건지.

민하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니나가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루카스가 한 장소에 한 달씩이나 머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경애해 마지않는 스승과 한 달이나 얼굴을 맞댈 수 있다는 건 니나의 의욕을 크게 북돋아 주었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의 업무에 집중해라.”

“하지만…….”

“산드로 공작이 죽었다. 다른 귀족도 아닌 공작이. 악마들의 움직임도 분명 바뀔 테고, 그 변화는 체스터 상회가 주둔하고 있는 유럽에서부터 일어날 거다. 그 기류를 읽어 내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니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루트비히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본부에 있는 모든 시설은 물론이고, 출입에도 제한이 걸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고맙다.”

“…….”

“더 할 말이 있나?”

“…다름이 아니오라.”

니나가 약간 긴장된 기색으로 말했다.

“꼭 한번 봐주셨으면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봐줬으면 하는 아이?”

“예.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그 아이를 직접 보시고, 혹 마음에 드신다면 제자로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루카스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아이는 지금 유럽 본부에 있나?”

“아니오.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2주일 뒤에 귀환하겠지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루카스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면 말해다오.”

“가,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밝은 얼굴로 대답하는 니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었다.

* * *

제11트레이닝 룸은 마법사 전용 수련 공간이었다. 이곳에 체력 단련을 위한 기구는 없었고, 다른 트레이닝 룸에 비하면 공간도 좁은 편이다.

그러나 가장 이질적인 건 분위기였다. 벽면 전체가 고동색이었고 조명도 흐릿하다. 거기에 은은한 숯 향기가 났는데, 가만히 맡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민하린이 그곳을 찾았을 때 루카스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찔끔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10분이나 일찍 왔는데, 늦은 건 아니지.”

루카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민하린이 흘끗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래도 스승님보다 늦었지 않습니까?”

“나는 어제 이곳에서 지냈다.”

“아…….”

민하린이 납득했다. 그런데 지냈다니. 여기서 잤다는 걸까? 방에 가구는 보이지 않는다. 침구는커녕 쇼파나 의자도 없는 텅 빈 곳. 그나마 눈에 띄는 건 루카스 옆에 있는 대야와 마른 수건, 물이 든 페트병이 전부다.

‘아니. 지냈다고 하셨지.’

잔 게 아니라, 그냥 지낸 것.

어쩌면 잠을 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침은?”

“먹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이리 와서 내게 등을 보이고 앉거라.”

민하린은 루카스의 말대로 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느끼도록 해라.”

곧 등에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도 루카스의 손바닥일 것이다.

‘차가워.’

그렇다고 거북한 건 아니다. 오히려 한여름의 나무그늘처럼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너는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었으니 우선은 감각을 일깨우는 게 순서겠지. 집중하고, 느껴라. 이것이… 마나다.”

쿠웅!

“……!”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기분 좋았던 서늘함이 순식간에 냉수가 되어 민하린의 체내로 침투했다.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루카스가 다른 손으로 민하린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가만히 있어라. 몸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마나는 의지에 따라 속성을 변환시키는 게 가능하다. 지금 이건 수속성의 마나지. 가장 느끼기 쉽고, 섞여 들기 용이하며, 위험하지도 않아. 네가 과하게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

민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몸을 헤집던 마나는 어느 순간부터 혈관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혈액의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좋은 기분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청량감과 시원함이 느껴졌지만, 그보다는 몸을 멋대로 헤집는 이물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나룸(Mana room). 마나를 쌓을 수 있는 신체 기관이라고 생각해라.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며, 물론 네게도 있다. 이제부터 너는 그 기관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해야 된다.”

그 순간 민하린의 몸을 사납게 훑던 마나가 확 모이더니 배꼽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 이곳은.’

단전(丹田)이 위치한 곳이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순간이다.

한때 검을 다뤘던 그녀에겐 단전이 존재했고, 그곳에는 기가 쌓여 있다.

이대로라면 마나와 기가…….

쿠웅!

“끅…….”

역시나.

두 개의 에너지가 세차게 충돌했다. 민하린이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루카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너의 단전을 마나룸으로 바꾸겠다.”

“……!”

바꾼다고? 그럼 단전에 쌓아 둔 기(氣)는 모두 사라지는 건가?

‘그야 마도학에 매진할 것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민하린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버텼다. 고통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중압감이 심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전신이 알 수 없는 압력에 짓눌릴 것 같았다.

콰직… 콰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름 아닌 단전이다. 단전에 금이 가고 있다.

뒤이어.

콰직!

단전이 부서졌다. 아니, 부서진 게 아니다. 자세한 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구성요소가 낱낱이 바뀌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살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아…….’

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검사가 된 날부터 차근차근 쌓았던, 10년간 쏟아부은 피와 땀의 집합체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민하린이 극도의 상실감을 느낄 무렵, 그 자리를 다른 에너지가 채우기 시작했다.

마나(Mana).

우웅─

단전이 마나룸으로 바뀌었고, 그곳을 마나가 채웠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민하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일이 자신의 체내에서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쯤 루카스가 말했다.

“1단계는 끝났으니 긴장을 풀어도 좋다.”

“푸하아…….”

민하린이 그제야 크게 심호흡을 했다. 루카스는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기가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에 일시적인 탈진 상태가 되었을 거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지?”

“네.”

“그 이외의 문제는 없을 테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고맙습니다.”

루카스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의 몸 전체를 둘러보았다. 혈맥이 아주 깨끗하더구나. 네가 얼마나 진지하게 검술에 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민하린은 괜히 쑥스러워져 이미 닦은 부위를 한 번 더 문질렀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그래. 아직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그 정도라면 별문제 없을 것 같군. 10분 휴식한 뒤에 2단계를 시작하겠다.”

“2단계……?”

“혈맥과 내장, 근골에 쌓인 불순물을 게워 내는 작업이지. 마나를 운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신속함을 끌어올려 줄 것이다.”

노폐물.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민하린은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전력으로 휴식했다.

─약 10분이 흐르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등을 보인 채 앉았다.

루카스는 미리 준비한 대야를 그녀 앞에 놔둔 뒤 말했다.

“조금 아플 거다.”

“네? …흡!”

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고통이 척추를 질주했다.

“─!!”

민하린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런데도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전류가 정수리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바늘이 꾹꾹 찌르는 것 같기도 하다. 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실 아픈 것보다 놀란 게 훨씬 컸다.

“우, 윽…….”

민하린의 입에 무언가 고였다.

무언가 울컥울컥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우웩!”

참지 못하고 뱉어낸다.

그리고 검은색 덩어리가 철퍽 대야로 떨어졌다.

역겨운 냄새.

루카스는 그걸 내려다보며 말했다.

“냄새가 고약한 걸 보니… 대부분의 불순물은 뱉어낸 것 같구나. 양도 얼마 안 되고. 역시 체내가 깨끗한 편이야.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군.”

민하린이 불신에 찬 얼굴로 대야에 있는 검은색 덩어리를 보았다.

너무 역겨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이게… 제 몸에서 나온 건가요?”

“직접 뱉었으면서 왜 묻는 거냐?”

그때 루카스가 민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앞니가 까맣군. 보기 좋지 않으니 헹구도록 해라.”

“……!!”

민하린이 깜짝 놀라서, 루카스가 내민 페트병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빠르게 입을 헹군 다음, 처음으로 루카스를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스승님께선 배려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나요?”

“셀 수 없이 들었지만, 납득할 수 없는 말이지. 설마 너도 그리 생각하는 거냐?”

“…….”

짐짓 놀랐다는 어조로 말하다니. 설마 자각이 없는 건가?

민하린은 말문을 잊고 말았다.

루카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원래라면 불순물이 몸 전체에서 나왔을 거다. 입만이 아니라 눈이나 귀, 코, 땀구멍까지. 하지만 나는 그걸 입으로만 뱉을 수 있도록 조절해 주었다. 이렇게 대야랑 물까지 미리 준비해 뒀고. 이 정도면 충분히 배려해 줬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닌데요.

민하린은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를 꾹 참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네요. 스승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새 스승의 성향에 대해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페트병을 입가로 옮겼다.

* * *

레드 마피아.

러시아계 범죄 조직을 일컫는 명칭이다.

문명이 쇠락하고, 인구는 10억 이하로 뚝 떨어지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영토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범죄 조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에 유례가 없는 번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레드 마피아에게 있어 2000년대는 악몽의 시절이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소탕 정책으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 전역의 조직이 괴멸 직전까지 갔고, 겨우 목숨만을 건진 잔존 세력들은 해외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비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순간이었으나, 어떻게든 명맥은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지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 지금.

러시아의 암흑가는 화려하게 부활을 맞이했다.

레드 마피아는 순식간에 세력을 불렸고, 전성기 시절보다 몇 배는 크고 무서운 집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주요 도시의 주택가에서 대놓고 암상인 짓을 해도 이렇다 할 견제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있는 사냥꾼 협회. 그들의 주적은 마피아가 아니라 악마였고, 놈들은 항상 인력난에 시달렸다. 도무지 조직의 왕성한 활동에 제지를 가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젊은 보스, 바체스 본다렌코는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겠지?”

바체스는 다시 한 번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의심에 찬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한 번이라도 거래로 장난친 적이 있던가?”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바체스가 히죽 웃고 말았다.

“…물론 없었지. 이거 참, 어젯밤엔 불에 타 죽는 악몽을 꿨는데 이제 보니 그게 길몽이었나.”

“보통 꿈은 반대라고 하더군.”

“킬킬. 그렇지.”

바체스는 낮게 웃었다.

“받아들이지. 남자 하나 납치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고맙군. 값은 저번의 2배로 하지.”

바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번의 2배면 1,000만 달러인데…….”

“왜. 적나?”

“그럴 리가.”

바체스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 이상 욕심은 사치다.

“이미 입 밖에 낸 이상 한 푼도 안 깎아 줄 테니까 나중에 딴소리 마.”

“물론.”

달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본연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 화폐였다.

바다 너머에 있는 미대륙. 낙원이라고 불리는 그곳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삶이 펼쳐져 있다.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평화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면 바로 그곳일 것이다.

그 때문에 달러는 지금 시점에서 세계 공용 화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 화폐 같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시대가 시대다 보니 물가가 폭등하였고 화폐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1,000만 달러는 큰돈이었다.

정장 남자가 떠나가자 부하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바체스에게 다가왔다.

“대박 건수군요. 사람 하나 납치하고 1,000만이라니.”

“방심하지 마라. 정보가 거의 없으니까 생각 외로 거물일 수도 있어.”

바체스는 그리 말하더니 픽 웃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지만.”

“크크. 놈은 지금 어디 있답니까?”

“사냥꾼 협회의 유럽 본부. 다시 말해 이 도시 지하다.”

지하에 유럽 본부가 있다는 건 도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바체스의 말에 부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냥꾼입니까?”

“아니라는데.”

“음. 그럼 다행이지만… 저 남자는 타깃이 유럽 본부에 있단 걸 어떻게 알았답니까?”

부하의 말에 바체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거 아냐. 저자도 유럽 본부에 속한 사냥꾼이니까.”

“아……!”

“아무튼 정보는 확실하니까 이놈 얼굴이나 잘 외워 둬.”

조직원들이 탁자 위에 있는 흐릿한 사진을 보았다. CCTV에 찍힌 동영상을 잘라온 건지, 조금 뭉개진 느낌이다. 그래도 이목구비와 대략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이름은 루카스라더군. 녀석이 도시로 올라오면 연락을 받기로 했으니까 항시 준비하도록.”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하 하나가 픽 웃었다.

“최대한 늦게 올라오는 게 이놈한텐 행운이겠군요.”

“정중히 모셔야지. 1,000만 달러짜리 몸뚱인데. 말만 잘 들으면 상처 하나 없이 끝날 거야.”

바체스가 웃으면서 담뱃불을 붙였다.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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