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만 명의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모두를 구하진 못해도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 않나요?”
민하린은 루카스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산드로 공작을 죽이는 걸 바로 옆에서 보았으니까. 그건 싸움조차 아니었다. 산드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 힘을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만 해도 악마의 형세는 크게 꺾일 것 같았다.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 줌밖에 되지 않아.”
“…그 정도 힘을 갖고 있어도요?”
“이 정도 힘을 갖고 있어도.”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목소리였다. 민하린은 이해가 가지 않아 침묵했다.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단 건 이종학이 증명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종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오직 내 도움 덕분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건 과장이야.”
그 말에 니나의 입술이 반쯤 떨어졌다 다시 닫혔다. 루카스가 스스로의 업적을 폄하하는 걸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부정하는 건 곧 스승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개인의 잣대로 구원받을 사람을 고른다는 것 또한 오만이지. 좀 더 나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게 맞으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너무나도 익숙해 지나치기 쉬운 그런 말들이야말로 우주의 진실에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루카스는 스스로가 우습게 여겨졌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그는 수많은 생명을 죽였고 앞으로도 죽이는 걸 멈추지 않을 테니까.
윤회(輪廻)의 법칙을 깨우치게 되어서? 죽음이 끝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사후 세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기에?
웃기는 소리.
그걸 안다고 해서 생명의 무게가 가벼워지는가. 아니다. 그럼에도 목숨은 하나뿐이다. 그딴 걸 핑계로 살육을 정당화하는 건 역겨운 자기위안이다.
다만 루카스는 생각했다.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건 다른 일이라고.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의 인격체인 이상 분명한 한계는 있다. 판단에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루카스조차 만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민하린이었다.
루카스는… 어느 정도 충동적으로 그녀를 구했다.
“자격이라고 하셨죠.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변혁력(變革力).”
대답은 니나에게서 들려왔다. 그녀는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힌 모양이다.
민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혁력이요?”
“어떤 단위든 수치화하는 순간 유치해지기는 하는데, 이건 어감이 제법 마음에 들더라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을 말하는 거지. 단 한 명의 존재가 역사를 바꾼 경우는 생각보다 많아. 그런 가능성을 보통 사람보다 수십, 수백 배 이상 지닌 자를 변혁자(變革者)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루카스 씨는…….”
“그래. 변혁자를 구하고 계신 거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변혁자만을’ 구한다. 니나는 그 점을 확실히 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왠지 모르지만 이종학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마도 스승님은 이종학을 구하러 간 것이겠지.”
이종학.
확실히 그에겐 영웅의 풍모가 있었다. 민하린은 변혁력과 변혁자라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인류에게 있어 꼭 필요한 영웅이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구하고 말았지만…….”
사실 니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루카스가 이토록 많은 인원을 한 번에 구한 적은 처음이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그렇다.
의문에 찬 눈동자로 루카스를 보았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하린이 다시 말했다.
“그럼 여태까지 구해 낸 그… 변혁자란 사람은 제법 많겠네요. 30년씩이나 돌아다녔으니.”
“별로 없어. 아마 열 명도 안 될걸.”
“네? 그것밖에……?”
“아마도.”
니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정확히 몇 명이나 구원받았는지는 몰라.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꼭 스승님을 은인으로 여기게 된 것도 아니고.”
민하린은 니나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방금 전에 그런 경우를 보았지 않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이 스승님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전원이 인류를 지탱하고 있는 핵심 인물이란 거지.”
그건 니나 레드니코바와 이종학만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냥꾼 중에서 그들보다 강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몇이나 될까?
니나의 직책은 유럽 본부장이다. 다시 말해 유럽에 있는 모든 사냥꾼이 그녀의 수하란 뜻이다. 유럽은 전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협회 산하 본부 중에선 비교적 세력과 영향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지만, 그럼에도 웬만한 사냥꾼들은 정중히 예의를 갖춰야 되는 가장 높은 위치 중 하나다.
이종학도 그렇다. 그는 동아시아 전역의 영웅이었다. 아시아를 수호하는 세 마리의 용 중 하나. 아시아권의 젊은 사냥꾼들 중에선 그에게 심취되지 않은 인물을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만약 니나 본부장과 비슷한 위치의 인물이 몇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루카스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충정을 보내고 있다면, 눈앞에 있는 금발 남자가 협회에서 행사할 수 있는 입김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것이다.
“스승님,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루카스는 니나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민하린에게 이 모든 사정을 설명해 준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생각이 간파당했지만, 니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루카스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나의 평정은 다음 순간 산산이 깨졌다.
“그녀를 나의 제자로 거둘 생각이다.”
“…….”
그러고 보니 마법을 가르쳐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민하린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근데 내가 그때 배우겠다고 대답했었나?’
그런 마음속 의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루카스가 말했다.
“물론 그녀가 받아들일 때의 얘기지만.”
민하린은 무언가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니나의 얼굴에 금이 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것 같다. 민하린은 괜히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왠지 모르지만 갑자기 긴장이 됐다. 무언가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을 헤집은 느낌이다.
“제자요?”
니나는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말한 다음 홱 고개를 돌려 민하린을 보았다.
그 눈동자에 실려 있는 감정을 본 순간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하지만…….”
시기, 그리고 질투. 그것도 오싹할 정도로 농밀했다.
니나가 입술을 깨물며,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더 오래…….”
잠시 몸을 떨던 니나가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땐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시군요.”
그럼에도 목소리가 옅게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가 부럽습니다.”
“니나, 길을 헤맬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필요 없죠. 스승님의 가르침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끊어 죄송합니다.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민하린은 니나가 무척이나 서운해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루카스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민하린의 나이는 적은 편이 아닙니다.”
무언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민하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검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마법을 배우는 데 많은 노력과 고통이 뒤따를 테죠.”
아. 그런 말이었나?
그럼 그때 루카스가 했던 말은 딱히 자신을 노안으로 봤다는 건 아니다.
민하린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잠시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지. 네 말대로 고통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보다 물어보는 게 늦었구나.”
루카스가 고개를 돌려 민하린을 바라보았다.
“나의 제자가 되어서 마법을 배울 생각은 없나?”
마법.
예전에는 배우고 싶었다. 확실히. 마법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이후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럼 지금은?
“너는 검의 재능도 훌륭하다.”
“네?”
“이대로 그 길을 계속 걸어가도 5년 내에는 이종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 테지.”
“……!”
그 이종학을 뛰어넘는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
기껏해야 루키인 그녀와 달리 이종학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희망의 용이라고 칭송받는 존재였고, 수십에 달하는 귀족을 토벌한 경력이 있다.
민하린 또한 그에 대한 소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짧은 나날을 함께하며 그의 정의로운 풍모에 깊게 감탄했다.
그런 남자를 5년 내에 뛰어넘을 수 있다니?
민하린이 당황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1년 내에 그를 뛰어넘게 되겠지. 마법으로.”
“…….”
이번엔 오히려 머리가 차게 식었다. 마치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이다.
너무 현실성이 없는 말이라서 그런가?
‘1년 내에?’
불가능.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다.
민하린은 마법에 대해 완벽할 정도로 문외한이었고, 대기에 있는 마나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저는 마법에 재능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마나를 느끼지 못하니까요.”
그러자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마나 감응도가 떨어지는 것뿐이지.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너의 마음가짐이야.”
마음가짐이라는 말에 민하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민하린은 강해지고 싶었다.
“약자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어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악마에게 잡혔을 때 그걸 절감했습니다.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제겐 없었죠.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걸 원망했습니다. 수십 년 전의 삶을 동경했어요.”
반쯤 금이 간 전자기기로 드라마라는 걸 보았다.
아마 방영될 당시엔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던, 그저 그런 B급 드라마였을 것이다.
평범한 대학생인 주인공이 학업에 대한 고민, 취업에 대한 고민, 친구에 대한 고민, 남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그런 얘기.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따뜻한 삶이었다.
인류가 잃어버린 평화가 그곳에 있었다.
그곳엔 죽을 걱정도, 죽일 걱정도 없었다.
민하린이 동료의 구출에 한 발자국 늦어 오열할 때, 그들은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친 것에 분개했다.
민하린이 악마와 마수를 경계하며 불침번을 설 때, 그들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민하린이 들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 때, 그들은 귓전을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부럽다. 미치도록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워해서 뭐? 그때로 돌아갈 수 있나? 불가능하다. 적어도 악마가 있는 한은.
그러니 민하린은 강해지고 싶었다. 악마를 모두 몰아내, 그 드라마와 같은 삶을 되찾고 싶었다.
자신은 무리더라도, 동생들은 그런 삶을 구가했으면 싶었다.
“강해지고 싶나?”
“네.”
“얼마만큼?”
“그 누구에게도, 날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싶지 않아요.”
루카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너는 그걸 알고 있는 거냐?”
“예.”
“가시밭길을 걸어야 될 거다.”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먼저 포기할 일은 없어요. 절대로.”
민하린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의기에 찬 얼굴이 루카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오늘부터 나의 제자다, 민하린.”
“아… 고, 고맙습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민하린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말했다.
“…절이라도 해야 되나요?”
“아니.”
“…그렇군요.”
잠시 침묵.
민하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 스승님. 하린이라고 불러 주실 수 있나요?”
“어째서?”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요.”
“그러마.”
“…고맙습니다.”
그리 말하는 민하린의 뺨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살짝 붉어졌다. 그걸 포착한 니나의 기색이 불편해졌다.
“크흠, 큼!”
그녀는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그 아이가 첫 번째 제자군요.”
루카스는 그 말에 묘한 감상에 젖었다. 첫 번째 제자는 아니었다.
“본부장님도 스승님의 제자이지 않습니까?”
민하린이 의아한 듯이 묻자 니나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야.”
“네? 하지만 계속 스승님이라고 부르셨는데…….”
“큰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아무튼 스승님은 나의 스승님이지만, 나는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야.”
이상한 말이었다. 민하린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있자, 니나가 픽 웃었다.
“스승님은 이상한 고집이 있으시거든. 그러니까 영광으로 알고, 이분에게 누가 되지 않게 주의하렴.”
“네.”
“…그럼. 이제 네 명 남은 건가요? 제자는 총 다섯 명을 거둘 거라 말씀하셨으니까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하린이 다시 되물었다.
“왜 하필 다섯 명인가요?”
“경험상 세계를 변혁하는 데 가장 적절한 숫자더군.”
이번에 대답한 건 루카스였다.
물론 제자를 찾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대놓고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된다.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나, 단체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협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단체를.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조직이 되겠지.”
“조직 좋지요. 이름은 정하셨나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했다. 아주 오래전. 어쩌면 아주 최근에.
그의 시선이 잠시 민하린에게 머물더니 금방 떠났다.
“아르젠토 스펠(Argento Sp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