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루카스가 떠나자 그제야 장내의 분위기가 가벼워진 느낌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자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자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력을 가지고 있다. 루탄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힘. 사람들이 그 사실에 안심보다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불청객이라.’
누구일까? 드리사는 내심 그게 신경 쓰였으나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루카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
“후우.”
그때 사냥꾼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던 이종학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리사, 그 남자에겐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
“무슨 뜻이지?”
“루카스가 어떤 존재고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도 있지.”
드리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강하다는 거군.”
이종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루탄이 어떻게 죽었는지 추측이라도 가나?”
“…….”
갈 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가장 눈썰미가 좋은 이종학조차 흔적을 놓쳤는데.
드리사는 침묵했고 다른 사냥꾼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수십 년을 이 바닥에서 굴렀지. 실력은 여전히 애송이지만 견문은 많이 넓힐 수 있었다. 웬만큼 비밀스러운 사술을 부려도 두 눈으로 보면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있더군. 하지만… 루카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그가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이었으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만약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들이 사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절망을 받아들여야 되니까.
“글쎄. 내가 알기로 동족상잔의 목적은 영혼수정을 빼앗기 위해서라던데…….”
이종학이 루탄의 영혼수정을 꺼냈다.
“그 남자는 내게 이걸 주었다. 악마라면 그러지 않았겠지.”
“언제든지 다시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확대해석이군. 악마는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는다.”
“넌 속단을 하고 있네. 이봐, 이건 우리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백번 주의해도 부족할 문제란 말이야.”
잠시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슬슬 공기가 무거워지려던 찰나, 드리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뭐, 우리끼리 상의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지.”
“그렇겠군.”
그러는 사이 부상자들의 응급 처치가 어느 정도 끝이 났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아서는 아니다. 애초에 루탄이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한 덕분이다.
“그런데 민하린, 너 목줄은 어떻게 풀었어?”
“어. 이건…….”
민하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루카스 씨가 풀어 줬어요.”
“풀어 줬다니? 어떻게?”
손이 닿으니 모래처럼 바스스 부서졌다… 고 말하면 미친년 취급받겠지. 다행히 민하린에겐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그럼 어떻게 둘러대지?
내심 침음하는데 슬슬 시선이 따가워진다.
“뭔데 뜸 들여?”
드리사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심쩍은 기색이 감돌았다.
민하린은 과감히 선택했다.
그냥 시치미를 떼기로.
“글쎄요. 저도 어떻게 했는지는 잘.”
“…너도냐? 쳇,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구만.”
드리사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비엔 냉장고가 있었다. 슬쩍 열어 보니 안엔 전투식량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거 괜찮네. 간만에 사람다운 음식 좀 먹어 보겠어.”
희희낙락하며 말하는데 어떤 사냥꾼이 말했다.
“유통기한은 어때?”
“어. 지금 몇 월이더라?”
“5월일 거다.”
“그럼… 1개월 정도 지났군. 이 정도면 먹어도 죽지는 않겠어.”
“년도를 봐야 되지 않겠나? 이 아지트는 수십 년 전부터 있었을 텐데.”
이종학의 물음에 드리사가 아차 하더니 유통기한을 보았다.
“…13년 정도 지났네.”
“다시 넣어 둬.”
드리사는 미련이 남는지 진지한 얼굴로 전투식량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말이야. 만약 먹으면…….”
“설사나 배탈로는 안 끝나겠지.”
“그렇겠지. 젠장할.”
이런 급박한 상황에 설사로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드리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투식량을 냉장고에 쑤셔 박았다.
저벅.
그때 루카스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비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는다.
‘말 걸지 마.’
그의 표정과 기색, 자세가 맞물려 완벽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끄응.”
드리사가 침음했다. 그래도 뭐 하고 왔는지 정도는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갈등이 점점 심화될 무렵, 알리다가 로비로 돌아왔다. 사라졌을 때와 달리 밝아 보이는 표정이다.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냥꾼들이 긴장된 얼굴로 알리다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포탈은 작동하는 것 같아.”
그 말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살았다…….”
“드, 드디어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노예로 잡힌 순간 삶을 포기했던 자들이 대부분이다. 탈출을 성공했다는 사실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포탈이 작동된다는 말을 듣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집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다른 사냥꾼과 달리, 이종학은 냉정했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하며 물었다.
“포탈은 어디로 이어져 있지?”
“유럽 지부지. 마나 잔량이 아슬아슬해. 한 번 쓰면 끝나겠더라.”
“유럽 지부라…….”
이종학이 침음했다.
악마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곳이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지역이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의 땅이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유럽 지부 어디? 본부인가?”
“그건…….”
알리다는 대답하지 않고 루카스를 흘끗 보았다. 드리사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정체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아지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언급은 피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회피할 수 없는 문제기도 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지부로 돌아가 목줄을 파괴해야 되는 것이다.
알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루카스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이제 당신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이번엔 루카스도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니나에게 데려다주면 그녀 앞에서 말하지.”
“……!”
그 말에 몇몇 사냥꾼의 안색이 흠칫 굳었다. 알리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곳에서 가장 놀란 게 그녀일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니나 레드니코바 본부장님은 아니겠죠?”
“유럽 본부장인 니나 레드니코바. 동명이인인 또 다른 본부장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 같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게 맞겠군.”
알리다의 표정이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본부장의 지인? 그 지랄 같은 본부장의?
알리다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니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가?
“…그 말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 자리에선 무리군.”
“그럼 우리도 당신을 믿기 힘듭니다.”
“알리다.”
이종학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알리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아. 내가 구해 준 은혜도 모르는 개년으로 보이는 거. 하지만… 만약 우리를 구하는 척하는 게 이자의 작전이라면? 사냥꾼 아지트의 위치를 파악하고, 본부장을 죽이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거라면? 우린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본부까지 데려다준 꼴이 된다고.”
알리다의 말에 이종학도 순간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당장 목숨을 살려 줬다고 해서 루카스를 맹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니에요.”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은 민하린이었다.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그는 산드로 공작을 죽였으니까요.”
“…….”
그 말에 다시 한 번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대부분 불신에 찬 얼굴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종학과 드리사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 말은 이미 한 번 들었다. 다름 아닌 루카스가 그리 말했다.
‘산드로는 죽었다. 너도 곧 그렇게 될 거고.’
그리고 루탄은 죽었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공작을 죽였다고? 저 남자 혼자서?”
“네. 자작도 남작도 아닌 공작의 악마를요. 역사상 인류가 단 두 번밖에 토벌하지 못한 공작을 죽였어요. 아무리 작전이라고 해도 고작 본부로 가는 길을 알아내기 위해 공작까지 죽이는 출혈을 감수할 것 같지는 않아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공작을 죽인 것 자체가 속임수일 수도 있어. 산드로가 죽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다행히 증명할 수단은 가지고 있었다. 민하린에겐 루카스에게 받은 영혼수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꺼낸 영혼수정은 기분 나쁜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
“…….”
알리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으로는 들었다.
등급이 높을수록 점점 붉고, 어두워지는 영혼수정.
‘저만큼 확연한 검붉은 빛이라니.’
알리다는 마법사라는 직업상 수도 없이 영혼수정을 보았고, 제조하거나, 변환시켰다. 그런 알리다도 저토록 불길한 영혼수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악마들은 이미 전 세계에 있는 사냥꾼 아지트의 위치를 대부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산드로 공작은 아시아 부산 지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말은…….”
“내통자가 없다면 알 수 없는 일이었죠.”
“…….”
알리다는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고 있다. 루카스가 악마일 확률은 희박하다는 걸. 애초에 그 악마적인 종족이 이토록 귀찮은 연기를 할 리가 없지 않나. 방해되는 건 정면에서 부수는 걸 미학으로 삼는 족속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유럽 지부의 사냥꾼으로서 쉽게 루카스를 신뢰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향할 곳은 조국을 잃은 그녀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의심을 거둬야 할 때다.
알리다는 곧바로 루카스에게 가서 고개를 숙였다.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진심이 담긴 사과였으나, 알리다는 어느 정도 비난을 받을 각오도 했다.
루카스 입장에선 괘씸하게 느끼는 게 당연했다. 실컷 목숨을 구해 줬더니 확실치도 않은 의심을 받게 된 상황에 처했으니.
그러나 그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타당한 의심이었다.”
“네?”
무뚝뚝한데 어딘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알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루카스를 보았다. 흠집 하나 없는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보았다.
“때로는 매순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되니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어. 네 판단을 이해한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옹호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뭘까. 이 기분은.’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
한 가지 분명한 건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 * *
“본부장님.”
묵직한 목소리에 니나는 눈을 떴다.
피곤하다. 피곤하고 너무 피곤해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 최근 일주일 동안 몇 시간 정도 잤더라.
‘망할 불면증.’
그녀가 까득 이를 갈자, 눈앞에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유럽의 본부장인 니나 레드니코바. 은회색 머리카락에 스무 살 중반 정도의 외관을 가진 이 여자가 나이는 불혹을 넘겼고, 개차반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건 러시아 출신 사냥꾼들은 모두 꿰뚫고 있다.
부본부장임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니나의 업무 대행자인 검은 정장의 남자, 루트비히는 말할 것도 없다.
“용무.”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는 본연의 임무를 떠올렸다.
“15번 워프 포탈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15번이라면… 밀라노(Milano)가 있는 데잖아. 그 동네 무너진 지가 언젠데 신호는 무슨 신호.”
“말씀하신 대로 악마에게 정복당한 지 10년도 넘은 곳이긴 합니다만…….”
“더미 신호겠지. 평소처럼 무시해.”
그녀는 제 할 말만 마치고 다시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루트비히가 다급히 부르기도 전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씁. 생각하니까 짜증 나네. 이딴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보고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냐? 내 다크서클 안 보여? 너, 진짜 이게 턱까지 내려오는 걸 바라는 거야?”
니나의 목소리는 피로와 불면증으로 무척이나 갈라져 있었고, 음도 낮았다.
그녀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 반복해서 신호가 와서 말입니다. 게다가 본부 출신 사냥꾼에게만 공개한 전문 암호도 알고 있었고요.”
그 말에 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악마일 가능성은?”
“반반일 거라 생각됩니다.”
“흐음…….”
확실히 유럽 지부 사냥꾼에게서 암호를 갈취해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니나는 하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잠깐. 밀라노라면… 이번에 체스터 상회가 이벤트를 연 장소잖아.”
대규모 귀족들이 하나의 도시에 모이는 건 그들 입장에선 행사겠지만 사냥꾼, 나아가 인류에겐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될 대사건이다.
밀라노에서 개최되는 체스터 상회의 이벤트. 이 사실은 유럽 출신 사냥꾼이라면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다. 악마들은 딱히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도 있습니까?”
“너도 들었겠지? 한 달 전 상해에서 벌어진 공작 사냥이 실패했다는 것쯤은.”
“인룡 이종학이 지휘했다는 대규모 토벌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 중에서 그 소식을 모르는 자는 없을 테니까. 그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생환한 사냥꾼은 기껏해야 300명가량. 이종학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죠. 막대한 손실이었습니다. 협회가 아닌, 인류 전체의.”
“…….”
니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루트비히, 포탈을 열어.”
“네? 하지만…….”
“왜? 싫어? 내가 직접 가서 열까?”
그녀의 미소 띤 얼굴에 섬뜩한 음영이 지는 것 같았다.
루트비히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부, 분부대로.”
니나는 홀로 방에 남았다. 방금 전까지 뒤죽박죽이었던 머리가 갑자기 안정되었다.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뺨은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은하수를 담은 보석함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