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민하린은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역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으니 나중에. 적당한 장소를 확보한 이후에 가르쳐 주겠다.”
“저기…….”
민하린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갑자기? 아니, 그것보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 걸까?
의문이 꼬리를 달고 이어졌으나, 쉽게 대답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확인해야 될 것도 있었다.
“산드로 공작은 정말 죽은 건가요?”
“직접 봤지 않나.”
그 대답에 이번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떠듬떠듬 억지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악마 공작은 신에 준하는 힘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
그 말에 루카스는 민하린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움직였다.
저벅.
점점 다가온다. 민하린의 뇌리에 산드로의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스의 접근 속도가 훨씬 빨랐다.
파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민하린은 그게 자신의 자유를 옭아맸던 목줄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다. 급히 목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살결이 닿는 느낌이 들어 낯설었다.
알리다처럼 단순히 기능을 마비시킨 게 아니다. 아예 파괴한 거다. 그것도 이토록 간단하게.
“산드로 공작은 반신으로도 불리지 못할 존재다. 신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지.”
“……?”
민하린은 적절한 비유 상대가 떠오르지 않아 신을 언급한 것이었으나, 루카스의 말은 조금 묘했다.
그녀가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가도록 할까.”
“어디로요?”
“이종학이 있는 곳.”
루카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이 틀어졌어. 늦지 않아야 될 텐데.”
* * *
긴 하루였다.
루탄은 그리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다. 잠깐 눈을 감았다간 그대로 졸아 버릴 것 같았다.
아직은 안 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출품된 상품의 목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민하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민하린. 그녀는 마지막 날에 출품하는 게 가장 극적이었을 텐데. 물론 오늘 팔았다고 해서 커다란 손해가 난 건 아니다. 그녀는 나쁘지 않은 가격에 판매되었고, 이 정도 실적을 올린 것만으로 그의 상사는 충분히 만족할 테니까.
그럼에도 루탄은 자신의 선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충분히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인데 아마추어처럼 서둘러 버렸다.
더 이상한 건 당시를 회상해도 마치 꿈속의 일처럼 희미하다는 것이다.
“……요즘 잠을 많이 줄이기는 했지.”
피곤해서 그런 거다. 장부 정리가 끝나면 시간이 조금 난다. 쪽잠이라도 자 놔야 내일 일을 좀 더 원활히 진행할 수 있으리라. 루탄이 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항상 그렇듯 불청객은 난데없이 찾아온다.
벌컥.
“루, 루탄 님.”
노크도 없이 시할드가 들어왔다. 루탄은 순간적으로 열이 치솟아서 그를 죽일 뻔했으나, 곧 열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성격은 시할드가 더 잘 알고 있다.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딴 무례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
“사, 사냥꾼 노예들이 도망쳤습니다.”
“뭐라고?”
졸음기가 싹 달아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탄이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걸치며 물었다.
“자세히 말해라.”
“아, 아시다시피 한 시간마다 노예들이 있는 방을 확인합니다. 바로 방금 전, 그러니까 약 5분 전에 방에 들어갔는데…….”
시할드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노, 노예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습니다.”
“…….”
루탄은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나온 목소리도 격양되어 있지 않았다. 무척이나 낮고 음울했다.
“그걸 보고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그래. 당연히 죄송해야지. 이리 와라.”
“예?”
“내가 말을 어렵게 했나? 이리로, 내게 가까이 오란 말이다.”
침을 꿀꺽 삼킨 시할드가 한 발자국 거리를 좁히는데, 루탄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커, 억…….”
“스스로 잘못했다는 걸 안다면 벌을 받는 것도 납득하겠군. 응? 시할드.”
“죄, 죄송합…….”
“추격대는?”
“이미, 보냈습, 니다.”
“몇이나.”
“휘하에 있는, 3개조를…….”
“……쯧.”
루탄이 혀를 차며 시할드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시할드는 바닥에 쓰러진 채 한참이나 쿨럭거렸다.
저 얼간이를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손이 부족하다. 그리고 화풀이한다고 노예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예……?”
시할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나? 도망간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어차피 놈들에겐 갈 곳이 없고, 이 일대는 모두 우리의 땅이다. 문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새끼란 거지. 다시 생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고객님들께 이 추태를 숨기는 것이다.”
“……!”
시할드가 뒤늦게 깨달았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노예가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이제 와서 커다란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개 조씩이나 움직이는 건 오히려 고객들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크다.
“<밤이슬>의 지휘권을 네게 빌려주겠다. 그들을 이용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도록.”
“며, 명에 따르겠습니다. 루탄 님은 어쩌시겠습니까?”
“나도 그들을 찾아야겠지. 다만 개별적으로 움직이겠다.”
루탄은 비록 작위는 없으나, 지닌바 전투력은 하위 귀족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다. 설령 홀로 조우한다고 해도 약화된 사냥꾼 10명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다.
“지하실에서 탈출한 거라면 두 개의 길 중 하나로 도망갈 수밖에 없겠지. 분명 흔적이 남았을 거다. 샅샅이 뒤진 다음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라.”
“예.”
시할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루탄은 곧바로 지하실로 갔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노예들이 갇혀 있었던 지하실. 그 공간은 조금 서늘했다. 루탄은 우리를 보았다. 강철 우리가 억지로 휘어져 있었다.
“누군가 꺼내 준 게 아니군. 안에서 탈출한 거야. 순수한 근력만으로 강철 우리를 비튼 거지.”
애초에 이곳에 그들을 도와줄 협력자가 있다면 그건 악마뿐이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영혼수정이 빈곤한 데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귀족이라면 충분히 시할드의 눈을 피해 노예들을 털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만약 악마가 탈출을 도와줬다면 이토록 요란한 흔적은 남지 않았을 테니까.
“좀 더 스마트하게 일을 진행시켰겠지.”
루탄이 눈을 감았다.
“자력으로 탈출했다.”
어떻게?
만전이면 몰라도, 목줄이 채워진 채로 강철 우리를 비트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만약 목줄이 없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가능한 건 이종학 정도인가.”
다른 노예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종학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목줄은 채워져 있다.
목줄이 불량품일 확률? 희박하다. 노예들에게 목줄을 채운 건 다름 아닌 루탄이다. 제품의 하자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목줄은 아직 채워져 있을 것이다. 만약 부수고 갔다면 이곳에 그 잔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돼. 뒤처리를 모두 하고 갈 여유는 절대 없었을 테니까.”
이들이 서둘렀다는 것은 방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목줄엔 추적 기능도 달려 있다. 도망친 노예들은 인수인계가 되지 않았으니, 원래라면 루탄은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됐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루탄의 머리가 사납게 회전했다.
그는 이윽고 가장 신빙성 높은 결론에 도달했다.
“…목줄의 기능만을 마비시킨 거군.”
마법. 마법을 쓴 거다.
그는 인간들의 술수에 대해선 몇 가지 알고 있다.
마법만이 아니라 주술, 요술, 술법, 저주에 대해서도 제법 해박한 편이다. 하지만 사로잡은 노예 중에선 주술사도, 요술사도, 술법사도, 저주술사도 없었다.
마법사는 있었다. 그것도 네임드가.
알리다 그라비노.
“그래도 묘한 일이군. 목줄이 채워진 상태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더 이상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없다.
직접 만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이곳이 적지 한복판이란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탈출을 감행했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
루탄이 픽 웃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을지 예상이 갔다.
“어중간하게 머리 굴리는 것만큼 비참한 건 없지.”
* * *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어.”
드리사가 검은색 하늘을 보며 투덜거렸다. 악마가 점령한 땅은 이렇게 된다.
대지는 보라색으로 물들고 하늘은 새까맣게 탄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어떻게 탈출은 성공한 건가?”
“이제 시작이지.”
이종학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알리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장 어려운 관문을 넘기는 했어. 이제는 아지트로 가기만 하면 돼.”
“거리는 얼마나 되지?”
“우선은 성당으로 가야 돼.”
“성당?”
“저기.”
알리다가 가리킨 쪽엔 성당이 있었다. 도시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한눈에 찾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성당이다.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고, 번쩍이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두운 하늘 밑에서도 돋보인다.
“저 성당이 네가 말한 아지트인가?”
“그건 아닌데, 저 건물 지하에 도시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 거길 쭉 나아가면 아지트까진 코 닿을 거리에 나오게 되고.”
“과연.”
사냥꾼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리엔 악마가 거의 없었다. 주의를 기울이며 나아간다면 성당까지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빙결 마법은 언제까지 지속되지?”
이종학이 얼어붙은 목줄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틀 정도. 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
“그럼 그전까지는 포탈을 작동시켜서 첨단 장비가 갖춰진 사냥꾼 지부에 도착해야겠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종학이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바로 출발한다. 내가 앞장서지.”
그리 말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에 뒤쫓아 오는 드리사가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당당히 가도 되는 거야?”
“그래. 아마도 지금은 아침인 것 같으니까.”
“엉……?”
“보통 악마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을 잘 거다.”
“어. 그렇긴 한데…….”
악마가 낮에 자고 밤에 깬다는 건 사냥꾼들 사이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낮인 건 어떻게 안 거야? 하늘도 저 모양이라 해랑 달은커녕 별도 보이지 않는데.”
“내 체내 시간은 비교적 정확해.”
“…….”
농담한 건가?
아니, 이 진지한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할 리가.
“체내 시간이라.”
드리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개소리로 치부했을 테지만, 이종학이 말하니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드리사를 비롯한 사냥꾼들은 말없이 이종학의 뒤를 따랐다.
알리다가 주변 풍경을 보았다.
그녀는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고 있다. 물론 직접 본 게 아니라 사진으로 접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탈리아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눈부신 도시가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었다. 만약 성당까지 무너졌다면 어떤 도시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 거리에 얼마나 많은 악마들이 있을까.’
인기척과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도시의 거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니 공연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좀비뿐인 도시를 거닐어도 이보다 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종학의 기감은 아주 뛰어났다. 그는 악마가 있을 것 같은 장소는 가까이 다가가지조차 않았고, 그러면서도 크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괜히 맥 빠지는걸. 너무 쉽잖아.”
드리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리다도 동감이었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마음 놓기엔 일러. 성당 내부에도 악마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 이쪽으로.”
알리다는 성당 안으로 들어간 다음 예배당으로 향했다.
“좀 도와줄래? 이 의자를 치워야 돼.”
사냥꾼들이 알리다가 말한 의자를 옆으로 치웠다.
드러난 바닥엔 손잡이가 있었다. 드리사가 손잡이를 당기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어둡잖아. 전등 같은 건 없나?”
“달아놨긴 한데 수명이 다된 것 같아. 아니면 전선이 잘려 나갔거나.”
알리다가 입구 근처에 있는 스위치를 달칵이며 말했다.
“젠장. 이런 데서 악마랑 맞닥뜨리면 그냥 뒈지겠군.”
“불만이면 다른 길로 가던가.”
“…음. 정중히 사양하지. 지하에서 죽으면 묫자리를 따로 팔 필요 없다는 장점이 떠올랐거든.”
드리사가 억지로 긍정적이게 말했고, 그들은 곧바로 지하통로를 나아갔다. 어둡고 축축하다. 시궁쥐들도 많았고, 썩은 내도 났다.
음산한 분위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에 사냥꾼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드리사의 불안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지하통로엔 악마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통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 살았다.”
“우리가 해낸 건가?”
“여기까지 오면 이제 안심이군……!”
“…….”
그런데 드리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알리다가 물었다.
“왜 똥 씹은 표정이야?”
“방금 저 녀석이 한 말 있잖아.”
“이제 안심이란 말? 그게 왜?”
“뭐라고 할까. 해선 안 될 말을 꺼낸 듯한 기분이야. 그 있잖아. 해치웠나? 같은 거.”
“뭔 개소리야.”
“넌 만화도 안 보냐?”
그 말에 알리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됐으니까 발이나 움직이지? 포탈 상태도 분명 개판일 테니까, 그거 손 볼 거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빠듯하다고.”
아마 알리다가 드리사의 예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어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아지트는 작은 산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고, 바위를 이용해 입구를 가렸다고 했다. 바위는 웬만한 주택만큼이나 거대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저 바위군.”
“빨리 가자.”
“멈춰라.”
이종학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냥꾼들도 반문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여기로 올 줄 알았지.”
체스터 상회의 진행인이자 그들에게 손수 목줄을 씌운 악마.
루탄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리사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이거 봐.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