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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화 (227/857)

외전 6화

화려한 조명이 눈부셨다.

거의 한 달을 어두컴컴한 우리 속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더욱. 무대에 있던 조명은 은은한 편이었으나, 이곳은 다르다. 찬란한 광휘가 마치 과시하듯 방 안을 환히 밝히며 민하린의 망막을 헤집었다.

방의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인 후였다.

커다란 방이었고, 그에 부끄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방의 중간에는 은빛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곳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첫인상은 흡혈귀가 연상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전 흑백 영화에 나올 법한 드라큘라 백작이 떠오른다.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는 잿빛이다. 그와 대비되는 검은색 턱시도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만약 그가 악마가 아니었다면 멋지게 늙은 노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하린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오한을 느꼈다.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처럼 본능적인 공포가 목덜미를 핥았다.

공작(Duke).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악마 귀족들의 정점에 선 존재.

누군가는 대공(Grand Duke)이라는 작위가 존재할 가능성에 입을 열었으나, 그들조차 공작이 귀족의 정점에 선 대표적인 존재라는 건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특급위험생물.

걸어 다니는 재앙.

자아를 가진 핵탄두.

종말의 악마.

그들을 부르는 칭호만 수십 가지며, 협회는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공작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인다.

공작의 움직임에 자칫 대처가 늦거나 어설프게 대응한다면 지부 하나가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사냥꾼이 공작을 토벌한 기록은 단 두 번뿐.’

그리고 그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적어도 수천에 이르는 전도유망한 사냥꾼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그 이상의 물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 재앙을 숨처럼 흩뿌리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서있다.

저 늙은 가죽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건 손가락만으로 심장을 터뜨릴 수 있는 괴물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미간에 닿아 있는 기분이다.

민하린은 떨림을 억지로 무시했다. 위축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시선만큼은 내리깔았다.

굴복한 건 아니다. 대놓고 적개심을 표출하는 게 미련하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흐음…….”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산드로가 흥미로운 콧소리를 냈다. 그는 잠시간 민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이만 나가 보게.”

“예.”

악마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고, 문이 닫혔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산드로의 시선은 오직 민하린에게 꽂혀 있다. 뒤에 서 있는 루카스에겐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식사는 했는지 모르겠군. 목이 마르지는 않나?”

의외로 산드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의 정체를 몰랐다면 마음씨 좋은 이웃 노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님을 알기 때문에 민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드로가 픽 웃었다.

“어깨에 힘 좀 푸는 게 어떤가.”

“…….”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놓고 반항하진 않겠지만, 드리사처럼 자처해서 고개를 조아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죽인다.

“심경에 변화라도 일어났나? 처음이랑은 태도가 좀 달라졌군. 상관은 없지만.”

산드로가 낮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능숙하게 찻잎을 끓이기 시작했다. 악마와 털끝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향이 코끝까지 번졌으나, 민하린은 끔찍한 악취를 맡은 것처럼 코를 막을 뻔했다.

“인간의 본성이란 게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거든. 하지만 이대로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는 건 너무 재미없는데…….”

찻잎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산드로가 빙긋 웃었다.

“이렇게 하지. 앞으로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저 남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겠다.”

민하린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카스는 산드로의 흉악한 발언에도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저 사람은… 이미 정신이 망가졌어. 헛수고야.”

태연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옅게 떨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산드로는 그 사실을 아주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보고 싶은 건 너의 반응인데. 새로 산 노예가 어떤 성향을 가졌을지 궁금하군. 가르쳐 다오. 네가 도덕과 윤리를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서.”

“…큭.”

“다시 한 번 묻지. 갈증이 나지는 않나?”

민하린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지 않아.”

“그렇군.”

산드로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이제야 처음의 눈빛이 돌아왔군. 좋은 현상이야. 부디 그와 같은 반항심을 오래도록 유지해 주길 바라지.”

그 말에 울컥 분노가 차올랐다.

“나는 악마에게 복종하지 않아. 너에게 복종할 바에 차라리─”

“죽여라? 그리 말하고 싶은 거냐?”

산드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 즐거움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다.

“털을 곤두세우는 건 상관없지만 하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해선 조기교육 하는 편이 좋겠어.”

“어떻게? 또 저 사람을 들먹이면서 협박이나 하려고? 하. 공작도 별 볼일 없군. 고작 인간 한 명의 정신도 굴복시키지 못해서 이따위 편법이나 쓰다니.”

“편법?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산드로는 민하린이 도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루카스를 언급한 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발로겠지.

수백 년을 살아온 산드로에겐 이 어린 계집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인간을 굴복시킬 방법은 수도 없이 알고 있지.”

“고문 따위는 무섭지 않아. 정신이 망가지는 것도, 죽는 것도.”

“하하. 그거야말로 무지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군. 꼬마야, 너는 진짜 고통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해. 세상엔 죽음보다 끔찍한 일들이 산재해 있단다.”

산드로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당장 너에게 손을 대진 않을 것이다.”

“뭐?”

“최소한 한 달 동안 그러지. 믿어도 돼. 난 약속은 지키거든. 그럼에도 넌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따르게 되겠지만.”

“그럴 일은 결코 없어.”

따악

산드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민하린의 손과 팔에 채워져 있던 구속구가 풀렸다.

목줄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자유가 손에 들어왔다.

“무슨…….”

민하린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산드로를 보았다.

“너는 첫 토벌 임무에 귀족 사냥을 성공했다더구나. 그때 나이는 불과 열다섯이고. 과연. 될성부른 떡잎이라는 건가?”

“…잘도 조사하셨군. 노예의 뒤를 캐는 일은 즐거우셨나?”

민하린이 억지로 차갑게 말했으나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첫 번째 임무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름이나 나이, 기타 사소한 인적사항 같은 건 알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 정도 정보는 민하린을 팔아넘긴 체스터 상회에서도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냥과 관련된 토벌 정보는 협회 내에서도 대외비다. 악마 공작이 이토록 꿰뚫고 있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 인류는 멸망했을 테니까. 틀림없이 과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야만 된다.

“오늘 이벤트 회장엔 유난히 사람이 많더군. 그래서 구두가 조금 더러워졌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다.

민하린이 꾹 노려보자 산드로가 웃으며 자신의 발등을 가리켰다.

“혀로 핥아서 깨끗하게 만들어라. 먼지 한 톨도 허용치 않겠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민하린은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욕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래……. 노예가 말을 들지 않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산드로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내 행보에 대해 들어 보겠나?”

“관심 없어.”

“아니. 너는 관심이 생길 거다. 분명히.”

“…….”

그는 민하린의 시선을 받으며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방금 손에 넣은 노예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에 크게 상심한 나머지 혼자 외출할 것이다. 바람이라도 쐴 겸 말이지. 어쩌면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나라도 반도半島까지 가는 건 제법 힘이 들 테니까.”

마치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민하린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반도라면, 설마.

“바다가 보고 싶으니, 과거 항구도시라고 불렸던 부산이란 곳에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는 느긋하게 밤바다를 감상하고 싶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겠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사냥꾼들이 대거 몰려올 테고 나를 향해 날붙이를 휘두를 것 같군.”

“……!!”

어떻게.

민하린은 더 이상 동요를 숨길 수 없었다. 그녀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부산은 사냥꾼 협회 아시아 지부가 위치한 장소였다.

그리고 이 악마는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할 테고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어하겠지. 옛날부터 손대중엔 자신이 없었으니 대부분의 사냥꾼을 죽일 수밖에 없을 거야. 수백 명분의 피가 쏟아진다면 바다가 조금은 새빨갛게 물들 수도 있겠지. 물론 나는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을 거고.”

“그, 그만.”

“하지만 이미 밤바다를 보며 위안을 얻으려했던 작은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 나는 인내심이 깊지 않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날 거야. 벌레들의 소굴에 가서 끝장을 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고. 사냥꾼들은 지하에 만들어진 벙커의 위치를 누구도 모를 것이며, 더없이 안전한 철옹성이라고 여길 테지만 그게 착각이란 걸 얼마 안 가 깨닫게 되겠지. 나는 그들의 방어 시설을 비웃으며 벙커의 중추까지 단숨에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간부 세력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몰살시키겠지. 그런 다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부장에게 가서 웃으며 물을 것이다.”

산드로가 웃었다.

그의 얼굴에 늙고 추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민하루와 민유성이라는 아이들을 내게 준다면, 너희들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아, 아아…….”

동생들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민하린은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들의 죽음은 민하린 그녀가 자신이 죽는 것보다 수십 배는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법 터울이 많은 형제자매들이더군. 열둘, 그리고 열넷밖에 안 되다니 말이야. 좀 더 기뻐하는 게 어떤가? 곧 재회하게 될 텐데. 장담하지. 그들은 너를 처절히 부르게 될 거야. 목울대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산드로가 홍차를 모두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의자에 걸쳐져 있던 망토를 두른다.

“부디 동생들이 누나만큼이나 심지가 굳기를 바라지.”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산드로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죄송, 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하린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의로는 절대 꿇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던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나게 땅에 이마를 찧었다.

“저,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동생들은… 동생들만큼은 손대지 말아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산드로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픽 웃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아, 민하린을 내려다보았다.

“구두가 아직 더러운 것 같군.”

민하린이 멈칫했으나 찰나였다. 그녀는 체념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산드로에게 가기 위해. 혓바닥으로 그의 구두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아니지.”

“…네?”

산드로가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기어서 와야지. 노예답게.”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하린은 이번엔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자존심은 넝마가 되었고, 눈은 생기를 잃었다.

엉금엉금 산드로를 향해 기어갔다. 굴욕과 수치심 이상으로 산드로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공포가 마음을 잠식한다.

구두가 보였다. 산드로의 말대로 조금 더러워진 구두.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 저걸 핥는다면, 민하린은 죽는 그 순간까지 산드로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콰직!

그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민하린은 방의 공기가 갑자기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산드로 공작은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바라본 것처럼 안색이 살짝 굳어 있었다.

민하린은 그 시선을 쫓았다.

그곳에 루카스가 서 있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인상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으나 달라진 점도 있었다.

목줄이 없다.

‘아니.’

산드로 공작이 눈가를 좁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후두둑…….

루카스가 직접 뜯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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