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창백한 피부의 남자였다.
남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본 이벤트에 참여해 주신 모든 고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진행을 맡게 된 루탄이라고 합니다.”
남자, 루탄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장내에 짧은 갈채가 울렸다.
루탄은 귀가 길쭉했고, 치아는 뾰족했으며, 무엇보다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턱시도를 입고 있었는데, 창백한 피부와 제법 잘 어울렸다.
“아울러 이 자리에 함께하진 못했지만 항상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주신 고객님들께도 상회를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 상회는 해체 직전의 순간까지 고객님들과 함께할 것이며, 매번 더 나아진 물건들을 선보일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루탄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거두절미하고, 이벤트의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상회의 검증된 고객님들이니 자잘한 애기는 생략토록 하지요. 기본적인 진행 방식은 일전과 동일합니다. 마음에 드시는 상품이 있다면 각 라인에 배치된 안내원을 통해 가격을 말씀해 주시길.”
루탄은 차분한 태도로 몇 가지 규칙을 더 입에 담았다.
장내에 있는 자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벤트는 사흘간 진행될 예정이며, 오늘의 행사는 약 한 시간 후에 개최됩니다. 그전에 조촐한 식사와 함께 간단한 눈요깃거리를 준비했으니, 부디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이벤트에 인간이 나온다고 들었소.”
묵직한 목소리였다.
배불뚝이 남자였으나, 피부는 보랏빛이었고 얼굴이 두 개였다. 눈동자는 네 개고 콧구멍은 없다. 그의 몸에선 녹색의 안개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루탄이 부드럽게 웃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고메스 백작님.”
“얼마나 구했소?”
“…….”
루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아마 장내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의 입을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입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뜸을 들이며, 그들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기다린다.
마침내 누군가 헛기침 소리를 내었을 때.
“─열하나.”
루탄이 선언했다. 뒤이어 장내가 술렁인 건 당연한 절차였다. 루탄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남자 일곱에 여자 넷입니다.”
“품종도 궁금하군.”
“황인과 백인, 흑인이 고루 있지요. 국적도 다양합니다. 미국인부터 영국인, 이탈리아인, 중국인, 한국인 등……. 물론 나이는 모두 서른 이하입니다. 저희는 상등품만 취급하니까요.”
“흐음.”
고메스가 콧소리를 냈다. 기분 좋은 듯한 콧소리였다.
“체스터 상회의 이름을 걸고, 티끌만 한 결점도 없는 제품이라 확신합니다. 깜짝 놀랄 만한 특급 상품들도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주시기를.”
“후후! 이곳에 자네들의 능력을 의심할 머저리들은 없겠지. 최고의 이벤트가 되겠군.”
대답한 건 고메스가 아닌, 상회의 VIP 중 하나인 산드로 공작이었다.
루탄은 그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말이 정확하다. 이번 이벤트는 최대 규모로 열릴 것이고, 여러 가지 의미로 체스터 상회에게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창고 깊숙이 박아 두었던 지고의 보물과, 한 마리에 수억을 호가하는 노예들을 빠짐없이 긁어모았으며 상회의 VIP 고객에겐 제품 리스트와 함께 초대장을 돌렸다.
그리고 그중 7할이 넘는 고객이 참가를 선언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나도 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탄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 * *
철창 안은 서늘했다. 기온은 적당한 정도일 것이다. 당연하다. 상품에 잔병이 걸리면 안 되니까.
그런데도 민하린은 뼛속까지 얼어 버릴 것처럼 강한 추위를 느껴 자신의 양팔을 끌어안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철창 밖을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 생기를 잃은 눈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마 저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노예가 된 인간의 최후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다. 그녀 또한 악마와 싸움을 택한 사냥꾼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두 개의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여 정해진 구역을 벗어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생포당하기 전 목숨을 끊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민하린은 자신의 목줄을 쓰다듬었다. 이건 족쇄다. 자해할 수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른다. 애초에 악마 자체가 해명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악마.’
개체에 따라 개별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연실색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과, 끔찍할 정도로 탐욕적이라는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은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녀의 부친은 원래 민하린의 나잇대라면 대학교를 다니며 청춘을 구가할 시기라고 말했다. 학업이나 취업으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뭐가 되었든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평화는 끝나고, 종말의 시대가 왔다.
인간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멸종의 위기를 맞이했다.
사실상 유일하게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인 사냥꾼 협회에서는 지금 전 세계의 인구가 10억 이하로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마저도 불확실한 정보였고, 실은 그 수에 훨씬 못 미칠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중 반은 가축이 되어 살고 있을 테고.’
악마.
모든 일의 원흉을 떠올리는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사회를 보던 턱시도의 남자, 루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악마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건가? 그대가 말한 특상품이.”
“예. 악마사냥꾼입니다. 이름은 민하린이고 나이는 스물둘, 한국인입니다.”
“화이트 플라워. 네임드군.”
귀족은 만족한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 태도에 루탄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라면 출하 전에 상품을 미리 보여 주는 일은…….”
“알고 있네. 무리하게 해서 미안하군. 그리고 내 체면을 세워 줘서 고맙네.”
“산드로 공작님은 우리 상회의 VIP시니까요.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겐가?”
“하하. 미련한 질문이었군요.”
그들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교환했다.
그때 산드로의 시선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흠. …그런데 저놈은 뭐지?”
방에는 우리가 하나 더 있었고, 그 안에도 사람이 있었다.
금발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였는데, 흐리멍덩한 얼굴을 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루탄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놈은… 신경 쓸 필요 없는 녀석입니다.”
“음?”
“주운 녀석이거든요. 이 도시 근처에 멍하니 있는 걸 사로잡았습니다. 목줄이 채워지는 순간까지 아무 반항도 하지 않더군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요. 넋 놓은 연기라도 하는가 싶어 고문 좀 하고 정신도 건드려 봤는데 반응이 없더군요.”
“이미 미쳐 버린 녀석이라는 건가?”
정신이 망가졌다면 즐길 거리도 없다. 게다가 남자의 꾀죄죄한 몰골과 멍한 표정은 산드로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반면 민하린은 어떤가. 방금 낚은 활어처럼 표정이 살아 있다. 제 딴엔 숨긴다고 애쓴 것 같지만, 눈동자엔 들끓는 적대심이 잠자고 있다. 저런 노예야말로 조교하는 맛이 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인간이 있다고?’
산드로가 잠시 멈칫했다.
이 일대는 과거에 유럽 열강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이미 자신들의 땅이 되었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고, 모종의 목적을 갖고 침입했다고 해도 도시 근처의 심층부까지 들어올 수는 없을 텐데.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버려지거나 도망친 노예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상할 건 없다.
산드로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민하린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었다.
“이건 반드시 내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산드로 공작이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루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 또한 악마였다.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간 계집과의 동침이라니.”
악마는 역겨운 시선을 민하린에게 보냈다.
“지성을 갖고 있다곤 하나 하등 종족.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진대…….”
“입조심하도록. 그와 같은 귀족이 있기에 우리 상회가 존속하는 것이니.”
“…예.”
그 말에 악마가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뭐. 나도 독특한 취미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세상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별종들이 있다.”
루탄은 민하린에게 시선을 보낸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경매 시작에 앞서 최종 점검을 끝내라. 산드로 공작의 성미는 잘 알고 있겠지?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로 출품해야 돼.”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오늘도 음식을 남긴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야윈 거군. 피부도 거칠고. 뭐, 상관없다. 그 정도는 조명과 연출로 가릴 수 있으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우리 너머에 있는 민하린의 턱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오히려 이 정도 쇠약함은 산드로 공작이 반길지도 모르겠군. 차츰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재미가 있을 테니 말이야.”
루탄이 떠나고, 악마가 쇠창살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민하린을 벌거벗긴 다음 품평이라도 하듯 전신을 훑어봤다. 처음엔 몰려오는 치욕감에 악을 쓰고 반항했지만, 이제 와선 차라리 몸에 힘을 빼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다.
쿵.
굴욕적인 시간이 끝나고, 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하린은 눈앞에 있는 묽은 죽과 물을 바라보았다.
밥은 마치 사료통을 연상케 하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꾸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던가. 이대로 계속 굶는다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물 없이는 일주일도 못 버틴다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먹지 않는 건가?”
그 말에 민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금발 남자다. 민하린은 내심 놀랐다. 그가 입을 여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갇힌 이후, 민하린은 그에게 몇 번인가 말을 건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무시당했다. 때문에 루탄의 말대로 정신이 망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흐리멍덩했지만 목소리는 대조적으로 또렷했다.
아무튼 대답은 해야겠지.
“이건 음식이 아니에요. 사료지.”
“그래서 먹지 않는 건가.”
남자는 사료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건 음식보단 먹이에 가깝군. 진흙을 끓인 것 같은 맛이 나겠어.”
“…….”
“하지만 영양분은 충분하다. 꾸준히 먹기만 했어도 지금보단 상태가 나았겠지.”
“생포당했어도 제겐 아직 긍지가 있어요.”
민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긍지와 존엄성. 중요한 것들이지. 하지만 그걸 지키기 위해 먹지 않는 거라면 틀린 선택이다. 혹 굶어 죽는 걸 바라고 있다면 내 생각보다 훨씬 미련한 것일 테고.”
“제 목숨입니다. 어떻게 쓸지는 제가 정해요.”
“틀린 말은 아니구나. 하지만 그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남자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싸늘한 우리 안에서의 죽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저들이 너의 단식을 투쟁으로 기억할 것 같은가? 천만에. 그저 상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단 사실에 욕지거리를 내뱉을 뿐이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먹어라. 기력을 회복해. 힘을 비축하고, 때를 기다려라.”
“하.”
민하린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힘을 비축해서, 그 다음은?”
이곳이 어디인지는 그녀도 모른다.
하지만 악마들의 본거지 비슷한 곳이란 건 알고 있다. 목줄이 있는 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깝다. 만에 하나 탈출하더라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사로잡힐 것이 뻔하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민하린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는 건 어떤가?”
“뭐?”
“기회는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에게만 의미를 갖지. 궁금하구나.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다시 우리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민하린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인상을 구기며, 그를 따라 하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먹지 않는다. 먹지 않을 것이다. 가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하린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겼으나, 남자의 목소리가 뇌리에 박힌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