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7
“끅…….”
의식이 날아갈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당장이라도 중압감을 떨치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압력이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골렘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진작 전신이 찌부러졌을 게 분명하다.
‘제기랄!’
무력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억지로 고개만을 쳐들었다.
그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라보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허상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흐릿한 시야 사이로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하, 하하.’
그래. 허상이 분명하다.
확실히 이 순간에도 아나스타샤는 마음 어딘가에서 루카스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이런 순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단순한 책임 회피, 아니. 현실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역겨워 구토가 치밀었다.
루카스는 신이 아니다. 고난에 처할 때마다 편리하게 부르짖을 수 있는, 그런 편리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저 모습을 보라.
‘프레이 블레이크’가 아닌, ‘루카스 트로우맨’의 모습이지 않나.
로드가 이미 죽었다고 말한 그가, 4,000년 전의 모습으로 나타날 확률은 대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대영웅 서사시에도 쓰지 못할 만큼 유치하지.’
그러니까 이건 허상이다. 아나스타샤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착각이 아니라면.
저 남자가 정말로 루카스가 맞다면.
우리를 구하러 이곳에 온 거라면.
‘조금… 늦었군.’
아나스타샤는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
로드는 자신의 종언이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가 거둔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가 자신의 압력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상대가 루카스라면 더더욱.
이윽고 아나스타샤와 제키드의 육신을 짓누르던 압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들이 일어서는 일은 없었다. 이미 정신을 잃었으니까.
물론 로드의 흥미 또한 그들에게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군.]
그의 시선은 오직 루카스만을 향하고 있다.
신력을 대부분 뽑혀 죽었어야 될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육신과는 다르다. 혼 그 자체에 입은 상흔은 오로지 기나긴 세월만이 치유할 수 있다. 하물며 루카스가 입은 상흔은 치명적이다.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죽음을 재촉했어야 됐다.
그런데도 그는 살아 있다.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균형자의 핵. 그 힘으로 목숨을 연명한 것이다.
로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다.
만약 이리스, 그 마녀가 작정하고 핵을 숨겼다면, 로드조차 그걸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핵을 가지고 있는 주체가 직접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조급해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여유가 생기니 의문이 치솟았다. 로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네놈은 왜 다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는 묵묵한 시선을 보내는 루카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알게 되었다. 이리스가 너를 데리고 떠난 곳이 어디인지. …부서진 천계. 이미 한 번 파멸당하고, 잔해와 파편만이 부유하고 있는 세계지.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거짓된 행복이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
[그게 바로 이리스의 바람이 아니었나?]
“그랬겠지.”
[그런데 왜? 왜 굳이 개죽음을 당하러 내 앞에 온 것이냐?]
“거짓된 환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리 말하던 루카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걸 바라지 않아. 내겐 현실이 더 중요하고, 이곳에 있는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고통 받는 걸 무시할 수 없어.”
[호오…….]
“그러니까 네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을 좌시할 수는 없단 거지.”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기억났다는 듯이 루카스는 덧붙였다.
“그리고 개죽음을 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거다.”
[크, 크흐흐…….]
로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다.
로드는 왠지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인간들은, 뜻밖에도 로드를 큰 위기로 몰아갔다. 로드 또한 순간적으로 낭패를 숨기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로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죽일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세상을 모두 통틀어도 단 하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최후의 최후에 자신을 가로막을 존재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알겠다.
놈들로선 부족했다. 한참이나 부족하다.
단순히 강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시 내 최후의 적은 너밖에 없다. 루카스 트로우맨.]
로드는 일말의 환희까지 담아 그리 말했다.
반면 루카스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땅바닥이었다.
그곳에 로드가 게워 낸 토사물이 있었다.
“…네가 직접 뱉은 거냐?”
[그렇다면?]
“스스로의 업業을 내던지다니. 한심하고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게다가 아직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니.”
[무슨 소리냐?]
“그래……. 그렇단 거군.”
낮게 읊조리던 루카스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장소를 바꾸자.”
파앗.
그 한 마디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마치 모든 색채가 반전하는 것 같았다. 혹은 세상이 반대로 뒤집히는 것 같기도 했다. 로드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고, 그게 사라졌을 때는 이미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10성의 권능인가? 그는 지금 종언의 권능을 사용한 것인가?
‘비슷해.’
그래. 비슷하다. 같은 힘이 아니다.
로드는 루카스를 보았다. 무심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이 갑자기 거대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위압감.
그것만이 아니다. 루카스의 몸을 어둠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둠은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뭐냐. 이 느낌은.’
고개를 돌리고 싶다. 시선을 마주하기 싫다. 되도록,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로드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이해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곧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을, 가장 완벽해진 지금에 와서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은 어디냐?]
“대륙 서쪽 끝에 있는 이름 없는 섬.”
[굳이 장소를 바꾼 이유는?]
“이 일대엔 생명체가 없으니까.”
[그렇군. 하지만 최후의 싸움이 치러질 장소로는 조금 빈약하구나.]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것이 내 최후의 시련이 될 것이다. 루카스 트로우맨, 이곳에서 너를 죽이겠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루카스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태도에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그 태도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쩔 텐가.”
[…영혼에 새겨진 상흔은 아직 남아 있을 텐데.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네 존재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갔던 존재가 누구인지.]
물끄러미 로드를 바라보던 루카스가 툭 말했다.
“적어도 네놈은 아니야.”
[개소리!]
로드는 그제야 재회한 순간부터 줄곧 느끼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루카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모든 것을 부딪쳐 맞서 싸울 난적이 아닌, 명백히 자신보다 아래인 존재를 대하는 것처럼 바뀌었다.
루카스의 식어 버린 표정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로드의 거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많은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나는 너와 마지막 싸움을 벌이게 될 테고, 누가 이기든 막대한 타격을 입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야. 나의 가장 힘든 사투는 이미 끝났군.”
그래. 지옥에서 로드와 벌였던 싸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패배를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다.”
[당연히 그래야지. 적어도 이 주변에 있는 섬은 모두 가라앉을 것이다.]
로드의 삶을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두 번의 싸움.
드래곤 로드, 그리고 루카스와의 싸움이 그것이었다.
이번 또한 그에 못지않은 혈투가 될 것이다.
그리 생각했고, 루카스 또한 동감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순간 알았다. 네가 게워 낸 토사물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의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뭐?]
“그런데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군. 오히려 허무하구나.”
[…….]
로드는 더 이상 저 개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를 길게 하는군. 이미 나는 너의 권능마저 다룰 수 있다……. 꺼져라.]
종언의 권능은 확실히 발동되었다.
로드는 이 힘이 루카스의 평정심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
…….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꺼져라!]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드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그 날개가 있는 한 네놈은 나를 이길 수 없다. 이미 너의 본질은 바뀌었어.”
[뭐……?]
로드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루카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너는 데미갓이 아니야. 아직도 그걸 모르겠는가.”
[그딴 건 알고 있다! 한데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로드가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내가 데미갓이 아니게 된 건 네놈을 죽이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어! 어차피 그놈들은 짐짝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반쯤 망가진 자아로 헛소리나 지껄이는 그 쓰레기들을 내가 왜 짊어지고 가야 되는 거지?]
“…….”
루카스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그것 또한 로드의 마음을 더욱 들끓게 만들었다.
“…한 종種의 지도자였던 자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건가. 게다가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별 감흥도 없어 보이는군.”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진화했으니까!]
“그렇지 않아. 네놈은 오히려 퇴화했다. 적어도 평계에서만큼은. …악마를 떠올려 봐라.”
[악마?]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의 다음 말을 듣고, 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대륙에서 본래의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있던가? 루시퍼조차 드래곤 로드와 융합한 이후에 그 법칙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균형자의 핵을 손에 넣은 다음에서야. 그럼 네놈은? 천계의 균형자이자, 루시퍼를 죽이고 사탄의 핵까지 흡수한 네놈이. 정말로 평계에서 모든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
“바로 얼마 전까지는 가능했겠지. 모든 권능을 마음껏 다룰 수 있었겠지.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데미갓. 네놈이 방금 짐짝 취급했던 그들의 존재가 너를 지탱하고 있었던 거다.”
[……!!]
데미갓.
비록 세계의 의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태생이 평계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수십 개체의 초월자들을 거두었기 때문에 평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제한 없이 휘두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의 법칙은 로드를 ‘데미갓’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더는 아니다.
[어, 으어.]
로드가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자신이 게워 낸 토사물을 떠올렸다.
검은색 액체들.
버림받은 동족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로오… 드으…….’
‘살려 줘어…….’
‘꺼, 끄거억, 꺽…….’
루카스는 얼굴을 움켜쥔 채 주저앉은 로드를 보며, 마지막 사실을 선고했다.
“그리고 지금의 넌, 더 이상 로드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게, 무슨…….]
“…‘로드’는 저곳에 있다.”
루카스는 그리 말하며, 그가 게워 낸 토사물을 가리켰다.
로드는 그제야 루카스가 자신의 토사물마저 이 섬에 같이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 사실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오싹 소름이 돋은 채, 풀린 눈동자로 검은색 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기포처럼 들끓는 수많은 얼굴 중에 문득, ‘그 얼굴’이 보였다.
달걀처럼, 이목구비가 존재하지 않는 얼굴.
‘로드’의 얼굴.
[아, 아아─!?]
“…너는 동족들을 안고 갔어야 됐다. 그게 괴로운 길이라고 해도, 짊어지는 걸 포기해선 안 됐다.”
루카스와 로드의 공통점은 있었다.
그들 모두 방식은 달랐으나 혼의 격을 불완전하게나마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 있었다.
루카스는 인간임을 버렸으나, 스스로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로드는 데미갓임을 버리고, 스스로 데미갓인 것조차 잊고 말았다.
본질을 잊고 말았다.
영멸하는 순간까지 응당 안고 갔어야 될 책무를 저버렸다. 편해지는 것을 택했다.
로드는 도망쳤다.
그리고 이것이 그 대가였다.
“천사로서의 권능. 분명 인간에겐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겠지. 나의 종언마저 다룰 수 있다면, 그들이 절망감을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루카스는 로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따위 권능은 동등한 존재를 상대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입 닥쳐라!]
로드가 거칠게 외치며 루카스에게 달려들었다.
루카스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에게 싸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름 아닌 네가 그 가능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 그럼. 나는 뭐지?]
저게 찌꺼기가 아니란 말인가? 저게 진짜 ‘로드’라면…….
‘나’는?
이 몸을 지배한 ‘나’가 바로 찌꺼기인가?
[아, 아아악! 으아아악! 루, 루카스─!]
로드가 비명을 지르며 루카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작은 섬에서 펼쳐진 광경은, 루카스의 말대로 싸움이라고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