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4
이리스의 회상이 끝났다.
루카스는 다시금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완전히 수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저갱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세상 누구보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옹졸하고 자기편향적인 생각이라서 곧 그만두었으나, 루카스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괴롭고 긴 시간을 보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리스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루카스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정적靜寂의 세계인 무저갱과 달리, 이리스는 살아 있는 채로 지옥에서 발버둥을 쳤다. 루카스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계획이 시작한 이래,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육체는 진작 버렸다. 아무리 악마와 계약한 마녀라도 4,000년의 세월을 버틸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리스는 혼魂을 인형에 옮기며 삶을 연명해 갔다. 부작용은 있었다. 그녀의 영혼이 닳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시퍼가 언급한 영혼의 격. 인간의 영혼은 육체를 연이어 바꾸는 작업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지 않다.
이미 그녀의 혼은 너덜너덜해져 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그 촛불이 꺼지면… 그녀의 영혼은 사라진다.
초월체의 죽음과 별다를 바 없는 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스에게 밝은 미래는 없다.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괴로운 싸움을 이어 갔다.
그리고…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루카스를, 무저갱에서 빼 왔다.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혼자 힘으로 무저갱에서 탈출했다고 착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드가 최대 출력의 권능을 행사해서 창조한 세계가 바로 무저갱이다. 그가 가진 권능의 진수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였다.
그런 세계를, 아무리 4,00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9성의 루카스 트로우맨의 힘만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리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녀가 4,000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철옹성의 세계에 흠집을 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
루카스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턱 막혔다.
초월체가 되고서.
웬만한 일에는 크게 격동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감정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한 번 바랜 감정은 두 번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루카스는 확연한 슬픔의 소용돌이를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곳은 부서진 천계입니다.”
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이리스? 어디 있는─”
“당신은 로드와 싸웠고, 패하고, 죽었죠.”
“…….”
이리스의 목소리가 루카스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루카스의 가슴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세계의 주인인 천사들은 본디 영혼들을 사후세계로 인도할 역할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충분한 선행으로 영혼을 밝은 색으로 물들인 자들에겐 천계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죠. 원래라면 이곳은 모든 영혼이 한 번은 거칠 사후세계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 장소였기 때문에… 루카스의 혼이 붕괴하는 걸 늦출 수 있었죠.”
“…이리스, 너는 지금 어떤 상황인 거지?”
“당신은 충분히 잘해 줬어요.”
“…….”
대화가, 맞물리지 않고 있다.
루카스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막연한 불안감이 실체를 가졌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어쩌면.
이리스는 이미.
“아마도. 지금 저는 이미 죽은 후겠죠.”
“…….”
“그리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슬퍼.”
툭하고.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약에 루카스 슬퍼해 준다면, 저는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리스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가장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제 기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한 사람이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제가 해 온 일들을 알아줬으면 했어요. 기억해 줬으면 했어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그게 루카스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아서…….”
“이리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벌을 받아야 되니까. …루카스를 다시 만나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결국 저를 죽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
“그러면 안 되겠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되니까. 아하하……. 벌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네요. 저는 그냥 쉬고 싶은 것뿐이니까.”
이리스의 목소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그냥 쉬고 싶어요. 너무 지쳤거든요. 이 정도는 괜찮겠죠? 눈을 붙이는 건… 나 같은 악녀라도… 배신의 마녀라도… 그냥… 한숨 자는 것 정도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
…….
이리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루카스는 깨달았다. 방금 전 이리스의 영혼이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것을.
“아.”
멍한 목소리를 냈다.
루카스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이리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과 눈물, 그리고 고백을 떠올렸다.
[…그래서 욕심을 좀 부렸는데, 역시 안 되겠네요. 내가 좋아하는 루카스 트로우맨의 본질을, 내 손으로 바꿀 수는 없어.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는 기분이야.]
그 허상의 세계에서 보낸 몇 개월의 짧은 여정.
그 거짓된 추억이 이리스가 바란 욕심이었다.
4,000년을 헌신하고, 고작 몇 개월.
‘그건, 욕심이 아니야.’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용납할 수 없다. 이딴 결말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들의 재회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앗!
루카스의 가슴에서 밝은 빛이 솟구쳤다.
이리스가 채운 마지막 조각이, 그의 육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리스, 너는 아직 쉴 때가 아니야.”
더 이상 이리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언급한 ‘일기’는 이게 끝이었다.
이미 바스러진 영혼. 죽음보다 잔인한 최후를 맞이한 이리스 피스파인더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오.”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물론 루카스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바스러진 영혼이라도 재결합할 수 있는 존재라면 알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로드를 쓰러뜨려야겠지.”
쉬운 일은 아니다. 루카스는 약해졌으니까.
로드에게 신력을 모두 빼앗겼다. 덕분에 신마력의 총량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 힘으로는 종언도 몇 번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드 또한 약해진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가야 된다.
루카스는 부서진 천계를 뒤로하며 생각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제는 매듭이 지어질 것이다.
모든 것이.
* * *
[…….]
노즈독은 쏟아지는 졸음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수면. 해골의 몸을 가진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애초에 데미갓이란 종족은 대부분 수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서히 뻗어 오는 수마의 힘은 노즈독에게 낯선 것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당장이라도 깊은 잠에 빠질 것이란 것.
그럼 곧바로 죽겠지.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칼투드는 애초에 루시퍼의 부하였다는 거군.]
물론 그 붉은 피부의 악마를 완전히 신뢰한 건 아니다. 노즈독이 믿은 건 그가 ‘악마’라는 사실이었다. 본연의 힘은 둘째 치고, 평소엔 지옥에서 주로 활동하는 악마를 서클 놈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지옥과 전면전을 벌이게 될 줄이야.
만약 이리 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칼투드를 어포슬로 삼지 않았으리라.
드로가 낮게 중얼거렸다.
“루시퍼가 죽었다.”
[…뭐?]
“죽기 직전, 루시퍼의 생각이 내게 전해졌다. 알고 있는가, 노즈독? 네가 떠받드는 로드는 자신들의 동족을 모두 집어삼킨 모양이군.”
[무슨… 개소리냐?]
노즈독은 당황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이미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는 히투메 이카르의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드로를 노려보았다.
[로드가 그럴 리가 없다]
“믿든 말든. 이제 이 세상에 남은 데미갓은 로드와 너, 그리고 설원에 웅크리고 있는 엘리아란 존재가 전부다.”
[크윽…….]
노즈독은 큰 혼란을 느끼며 잠시 비틀거렸다. 그는 다시 왕좌에 털썩 앉고 말았다.
[로드는… 로드는 왜 동족들을 삼킨 거지?]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그야말로 사신死神의 목소리보다 음산한 기운을 풍겼지만, 지금은 단지 지치고 갈라져 있을 뿐이었다.
“뻔하지. 강해지기 위해서다. 로드는 이미 동족들을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로 취급하고 있다. 삼키면 건강해지고, 강해지는 영양제라고 할까.”
[…그럴 리가 없다.]
“악에 받친 부정은 그만둬라. 네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노즈독. 크게 놀라지 않고 있군. 어느 정도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걸 예상했다는 거겠지.”
노즈독은 다시 한 번 흠칫 몸을 떨었다.
정곡이었다. 로드가 레이린을 삼킨 시점부터,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그리고 아그니 앞에서는 잘난 듯이 입을 놀렸다. 로드가 무엇을 하든 그를 믿을 것이라 떠벌렸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로드가 걷는 길이 데미갓을 부흥케 하는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결과를 보라.
로드는 동족을 모두 집어삼켰다.
“곧 로드가 이곳에 올 거다. 그럼 너도 알게 되겠지. 그가 모든 데미갓을 삼켰다는 것을. 궁금하군. 노즈독, 너도 그런 최후를 원하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힙을 합치자는 거다. 죽기 싫다면 함께 로드를 쓰러뜨리자.”
[헛소리 집어치워라.]
노즈독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드로는 힐끗 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승산이 없지는 않아. 때마침 원군도 왔군.”
콰직!
왕실의 문이 박살 나며, 그곳에 몇몇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이반이 주먹에 묻은 철조각을 털어 내며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군. 얼굴 보기 힘든 양반들이 모두 여기 숨어 있었어.”
“…….”
“이봐, 드로. 볼일은 잘 끝내셨나?”
이반이 이죽이며 말하자 드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책망을 들을 시간은 없다. 너희들도 준비해라.”
“무슨 준비?”
좌악-
그 순간 공간이 갈라지고, 그곳에서 로드가 걸어 나왔다.
갑작스런 등장에 좌중에 있던 자들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춰 버린 이들 사이로 로드의 고개만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드로에게 고정되었다.
[여기 있었군, 드래곤 로드.]
“…….”
[나와의 약속을 잊은 것 같아서 말이지. 직접 받으러 왔다.]
“미안하지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드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자 로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프레이는 어디 있나?”
분명 로드를 막으러 지옥으로 갔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로드만이 서 있었다. 꼭 누구와 싸운 것처럼, 다친 몰골로.
아나스타샤는 불안감을 꾹 누르며 로드를 보았다.
로드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대마도사는 죽었다.]
“……!!”
“개소리 집어치워라.”
경악하는 아나스타샤와 달리 이반이 으르렁거렸다. 로드의 시선이 비로소 그쪽을 향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있는 건… 그래. 대마도사가 초월체가 되기 직전까지 사용한 껍데기인가.]
그레이 트로우맨. 프레이의 육체를 가진 존재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로드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기분 나쁘군. 죽어라.]
파앙!
“…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레이의 몸뚱이가 그대로 터졌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대무녀의 얼굴을 혈육이 적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드로가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나든, 기氣든! 뭐든 좋다! 에너지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해! 놈은 지금 약해져 있다!”
[이보다 더 약해도, 너희들을 죽이기엔 아무런 무리가 없다.]
로드가 그리 말하며 드로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로드.]
노즈독이 그를 불렀다. 로드는 반쯤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노즈독, 놀라운 정신력이군. 아직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니.]
[왜 동족을 흡수한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설명해 주지 않았었나. 흠.]
잠시 고민하던 로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군. 그냥 너도 나를 받아들여라. 그럼 알게 될 거다.]
쩌억-
로드의 얼굴에 입이 생겨났다. 다른 데미갓을 포식할 때처럼, 크고 흉측한 입이었다.
그 입이 쭉 늘어지더니, 그대로 노즈독을 삼킬 위치까지 접근했다.
탓!
지면에서 뼈로 이루어진 벽이 솟았다. 그게 입의 접근을 막았다.
로드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그 행동은 무슨 뜻이지? 노즈독.]
[…납득. 시켜 다오.]
노즈독이 쥐어짜듯이 말했다.
[…납득만 시켜 준다면, 순순히 너의 일부가 되겠다. 로드, 아무 생각 없이 동족들을 흡수한 건 아니겠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다. 우리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그걸 말해 다오. 그럼…….]
로드는 물끄러미 노즈독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싫다.]
[…뭐?]
[주절주절 말이 많군, 노즈독.]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그냥 닥치고, 내 양분이나 되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