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98화 (198/857)

198화 각자의 음모 (1)

프레이는 흑몽지역으로 돌아왔다. 릴리스는 멀리서 접근하는 누군가를 보며 몸을 움찔거렸지만, 곧 데미갓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닌 게 맞나?’

저 남자에게선 신력이 느껴진다. 웬만한 데미갓보다 훨씬 거대하고, 농밀한 신력이.

하지만 그는 데미갓과 적대적인 관계다. 릴리스는 두 눈으로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다.

탓.

프레이는 릴리스의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없는 만큼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아수라는 어디 있지?”

“…나한테 그의 행방을 묻는 거야?”

릴리스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와 아수라가 원수지간이라는 건 지옥의 하층민들조차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대답을 독촉하거나, 기세를 바꾸진 않았지만 조용한 압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릴리스가 살짝 그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흑몽지역은 함락당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대책을 짜기 위해 회의가 열릴 거야. 아수라를 비롯한 군주들이 전원 참가하겠지.”

전원 참가.

프레이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루시퍼도?”

“당연한 소리를. 군주 루시퍼는 억제력이야. 그가 조율하지 않았다면 그 콧대 높은 군주들이 한자리에 앉아 탁상공론을 나눴을 것 같아?”

“…….”

루시퍼가 지옥에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상당히 난처하다.

‘골치 아프군.’

프레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루시퍼와 군주들의 관계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끈끈했다. 굴러 들어온 돌인 프레이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내가 조심해야 되는 입장인가?’

지옥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

그 사실이 군주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이 종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안전한 세계인 평계, 즉 대륙에 야심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악마의 탐욕은 프레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을 설득해서 제3의 세력을 형성해야 되는데.’

데미갓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이 로드에게 보내는 신뢰는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악마들은 다르다. 그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서로를 적대하고 있다. 잘 구슬린다면 자신에게 협력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시퍼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듣게 되자 암담함을 느꼈다.

그의 생각보다 일이 훨씬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

“회의는 어디서 열릴 예정이지?”

“데미갓의 다음 목적지. 바알제불의 땅인 혈승지옥. 아, 바르바토스는 오지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땅에 묻혀 있는 드래곤 로드를 지켜야 되니까.”

드래곤 로드는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빈껍데기일 테니까. 같은 맥락에서, 로드 또한 더 이상 지옥의 영토를 짓밟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 로드의 핵심은 이미 루시퍼가 취했고, 그 시점에서 로드의 목적은 오직 루시퍼 하나로 바뀌었다.

‘루시퍼 또한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움직일 터.’

로드가 자신에게 동맹을 제의했던 것처럼, 루시퍼 또한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일구려 움직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 군주들은 분노하고 있다. 자신의 땅을 멋대로 짓밟은 로드와 데미갓에게 원한을 품게 됐다.

루시퍼의 작전은 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프레이가 할 일은, 루시퍼가 볼일을 보고 있는 동안 나머지 군주들의 변심시키는 것이다.

완전히 변심시키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의심의 씨앗이라도 심어야 된다. 이들이 루시퍼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에 금이 가게 만들어야 된다.

그가 오게 되면 프레이의 발언권을 거의 사라질 테니, 시간제한이 걸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생각을 마친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혈승지옥은 어디 있지?”

* * *

혈승지옥의 입구는 혐오스러웠다. 어둡고, 음침한 기운만이 넘실거리던 흑몽지옥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피처럼 붉은 호수. 언뜻 보면 그렇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게 호수가 아님을 알고 있다.

우우웅-

엄지손가락만 한 핏빛의 파리가. 수억, 수십억, 어쩌면 그것보다 많이 구멍에 잠겨 있었다. 호수가 아닌 거대한 구멍. 그곳을 핏빛 파리가 빼곡하게 채워 액체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릴리스는 흑몽지역의 뒤처리를 끝낸 이후에 온다고 했다. 때문에 프레이는 먼저 혈승지옥에 오게 되었다.

탓.

프레이는 망설임 없이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파리 소리가 귓전을 사납게 때렸다. 파리의 날갯짓 따위 소음과 다름없지만, 경악할 만한 숫자와 맞물리자 끔찍한 폭음으로 변했다. 고막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진작 귓구멍에서 핏물이 흘렀을 것이다.

그때 무리를 이룬 파리들이 프레이에게 다가왔다.

츠즛-

프레이의 몸에 창백한 뇌전이 튀었다. 그 위협에 혈승血蠅들이 확 거리를 벌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까짓 파리 떼는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구멍의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혈승들은 더 이상 프레이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아득한 숫자의 겹눈으로 프레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뿐이다.

파앗.

마침내 프레이는 구멍을 벗어났다.

이윽고 보인 풍경은 일반적인 지옥과 별다를 바 없는 장소였다.

그때 거대한 음영이 졌다.

[뭐냐, 네놈은.]

[침입자? 그런데 왜 혈승들이 공격하지 않았지?]

거대한 악마였다. 두 마리, 산양의 머리와 사자의 머리를 가진 악마.

아그니, 혹은 아수라의 본체보다 거대하지는 않지만 웬만한 성에 근접하는 크기다.

프레이는 그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알제불을 만나러 왔다.”

[흥. 미친놈.]

왼쪽에 있던, 산양의 머리를 가진 악마가 손에 든 채찍을 휘둘렀다. 불길을 머금은 채찍이 혀를 낼름거리며 프레이를 덮쳤다.

지익.

프레이는 손가락으로 사선을 그었다. 그러자 화염 채찍이 순식간에 잘려 가더니,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꺼졌다.

[뭣!]

당혹성을 내뱉는 악마를 무시하며, 프레이는 왼발을 한 번 굴렸다.

파지직!

그의 발길에서 뻗어져 나온 뇌전이 뱀처럼 대지를 질주하더니, 그대로 악마의 몸을 물어뜯었다.

[꺼걱-!]

악마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쩍 벌린 입에서 김이 나왔다. 어쩌면 내장까지 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놈!]

그러자 오른쪽에 있던, 사자 머리의 악마가 포효를 터뜨리며 돌진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진동한다.

프레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지면을 박찼고, 단순한 도약력으로 수십 미터를 펄쩍 뛰었다. 그러자 사자 머리가 코앞까지 닿아 있었다.

[……!]

사자 머리의 악마는 당황하고 말았다.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좁힐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감히 자신과 육탄전을 벌일 셈인가? 그는 프레이를 그대로 삼킬 생각에 입을 크게 벌렸다.

빠악!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빨리 닫혔다. 턱에 강력한 충격을 느꼈다. 이빨이 몇 개는 부서진 것 같다. 프레이의 주먹이 사자의 턱을 후려친 것이다.

사자 머리의 악마는 꺽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쿠웅!

악마 두 마리가 순식간에 전투불능이 되었다. 프레이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급 악마 정도인가? 확실히 대륙에서보다 최소 10배는 더 강하겠군.’

덩치도 10배는 더 크고.

프레이는 그리 생각을 하며 손을 털었다. 제법 멀찍한 곳에 성이 보인다. 아마 저곳이 바알제불의 거주지일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려던 순간이다.

팟.

누군가 프레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리의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우웅-

뒤이어 파리의 사나운 날갯짓이 들렸다. 수억 마리의 파리가 만들어 낸 날갯짓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훨씬 위협적인 소리다.

프레이는 이 존재가 워프나 시공간이동 같은 순간이동의 기술을 쓴 게 아닌, 초고속으로 움직여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속이 거칠구나.”

바알제불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프레이가 혈승지옥을 통과한 직후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요된 시간은 아마도 1분 안팎.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상급 악마 둘을 제압할 줄은 몰랐다.

프레이는 쓰러진 악마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죽일 수도 있었다.”

“왜 그러지 않았지?”

“너와 적대할 생각이 없으니까.”

“헛소리. 네놈들이 지옥을 침범한 시점부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살육전뿐이다. 네놈들과 우리, 누가 더 절대자에 근접한지 정하는 일만이 남았단 말이다.”

“착각하지 마라. 난 데미갓이 아니다.”

“…뭐라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바알제불의 몸이 멈칫거렸다.

프레이는 뇌전을 살짝 일으키며 말했다.

파직.

“그 수천 개의 눈은 장식이 아니겠지? 너는 이게 신력으로 느껴지나?”

“…….”

바알제불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의 힘이 신력과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그럼 너는 대체 누구냐?”

“그것도 포함해서 할 얘기가 있다. 장소가 좀 그런데…….”

“…….”

잠시 침묵하던 바알제불이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라.”

팟.

그의 몸이 사라졌다. 앞서 보인 초고속이동을 다시 사용한 것이다.

‘시험인가.’

따라올 역량이 되는지 보기 위해서.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이쪽이 숙이고 들어가는 입장이니 이해해 줄 수 있다. 프레이는 군말 없이 바알제불의 뒤를 쫓아갔다.

바알제불은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붙는 프레이를 보며 약간 놀랐다. 지옥 전체를 통틀어도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올 존재는 다섯이 넘지 않는다. 물론 각 지옥을 지배하는 군주를 포함해서.

‘좀 더 속도를 높일까?’

바알제불은 그리 고민했으나 곧 그러지 않기로 했다.

목적지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성이 아니었다. 후덥지근하고 어두운 지하였다.

바알제불은 움직임을 멈춘 다음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정체를 모르는 외부인을 나의 성에 들여 놓을 수는 없어서 말이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물론이다.”

“그래서 너는 누구냐?”

프레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바알제불, 너는 루시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

바알제불의 기색이 바뀌었고, 프레이는 그 사실에 놀랐다.

이야기에 앞서 서두를 꺼냈을 뿐인데 생각 이상의 반응이다.

‘…이거 어쩌면.’

첫 번째 번지수를 제대로 짚었을지도 모르겠다.

프레이는 바알제불을 바라보았다.

이 악마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생전에 이리스가 계약을 맺었던 악마도 아니고, 바알제불과 계약을 맺었다는 계약자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다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들과 몇 가지 이명들은 알고 있다.

파리왕.

수천 개의 안구를 가진 자.

검은 모략의 대악마.

이 악마라면 루시퍼의 음모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거래를 하자, 바알제불.”

프레이는 그와 협상을 해야 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