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검은 마녀 (3)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히투메 이카르의 국왕인 몰기드는 그리 생각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무사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비틀거리는 몰기드를 부축했다.
몰기드가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침통한 얼굴이 대부분이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친위대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프레이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몰기드의 목은 진작 떨어졌다.
그러나 몰기드는 그들을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가진 무위는 천재지변급 재앙이었고, 재앙이란 인간으로선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재앙이라 불린다.
“…나는, 괜찮다.”
몰기드가 그리 말하며 무사들을 물렸다. 수하들 앞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니. 더 보일 것도 없는가?’
프레이 앞에서 보였던 꼴사나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고소를 지었다. 몰기드가 비틀비틀 왕좌로 걸어가 앉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나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왕의 입장에서, 국민의 입장에서, 나라의 입장에서.
이번에도 그랬다.
데미갓.
나라 하나는 우습게 멸망시킬 존재가 적어도 수십 개체다. 그런 신의 일족을 상대로 싸우라고? 그게 자살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육이라니? 그는 잘못 알고 있어.’
몰기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뿐이다. 목숨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대국적인 판단이다.
다만 두려웠다.
몰기드는 이 나라를 중심으로 무언가 불온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히투메 이카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대답을 바라지 않고 던진 중얼거림이었다.
[멸망한다.]
“……!”
이제 막 혈색을 되찾았던 몰기드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저벅.
모습을 드러낸 건 해골이었다. 녹색의 귀기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입에선 불길한 보랏빛 기운이 끝없이 토해진다.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위험하다.
무사들은 두 가지 생각을 거의 동시에 떠올렸다.
탓.
그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비록 기력은 소진되어 있었으나, 프레이의 출현 때문에 감각은 훨씬 예리하게 서 있었다. 국왕 친위대. 정예무사 수십 명은 물 샐 틈 없는 포위진을 형성해 그 존재를 덮쳤다.
“그, 그만둬라!”
몰기드의 제지는 한발 늦었다. 아니, 제때 외쳤어도 결과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불길한 바람이 살결을 핥았다.
자르륵…….
그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수십 명의 무사의 몸에 녹색의 기운이 스치더니,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해골이 되어 버렸다. 마치 초고속으로 노화되어 버린 것 같다.
달그락.
해골 하나가 뻣뻣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무사는 끝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동작이었다. 무사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 아아…….”
프레이 때와는 다르다.
몰기드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알겠다. 프레이에겐 자신들을 몰살시킬 의도가 정말로 없었다.
눈앞에 있는 해골과 프레이. 몰기드로선 누가 더 강한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초월자가 내비치는 살기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시, 신의 일족이시여…….”
이 존재는 데미갓이다. 그 진면목을 눈에 담으니 알겠다. 몰기드는 확신을 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데미갓, 노즈독은 몰기드를 내려다봤다.
[너는?]
“히, 히투메 이카르의 국왕인 몰기드라고 합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닌데.]
“예, 예?”
[너는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노즈독의 눈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그가 몰기드에게 걸어왔다.
“허, 허윽…….”
몰기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깨에 바위를 짊어진 것처럼 무릎을 필 수가 없었다.
뼈밖에 없는 앙상한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훑었다.
[이건… 그런가. 대무녀가 수작을 부렸군. 최소한의 방어 주술인가? 과연. 그래도 왕이라는 거군. 끈질긴 맛이 있어.]
“시, 신의… 일족이시…….”
[하지만 귀찮을 뿐이지.]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끄아악!”
몰기드가 비명을 질렀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핏물과 살점이 지저분하게 달라붙은 발가락뼈를 보았다.
“흐, 흐, 흐하하!”
악몽이다. 이건 악몽이다.
몰기드는 거의 미쳐 버렸다. 그의 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고통이 뇌를 후벼 파고 있었다.
[주술이 허술한 부분부터 썩어 들어가는 건가? 재미있군.]
노즈독의 차가운 목소리가 몰기드의 이성을 되돌렸다. 그는 핏줄이 터진 눈동자로 노즈독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눈구멍에 타오르는 귀화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몰기드는 갑자기 프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사육.’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갔다. 프레이가 우려하던 게 어떤 것이었는지. 그가 왜 사육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는지.
‘언제가 되었든… 이렇게 될 수 있었다.’
데미갓의 사소한 변심으로 죽는다. 하나, 혹은 열이 아니다.
수백, 수천, 혹은 그 이상의 인간들이 그들의 변덕으로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것이다.
사육당하는 가축과 다를 바가 없는 삶, 정복이나 지배와는 전혀 다르다. 몰기드는 자신이 데미갓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흐하, 하하하!”
몰기드는 광기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국왕이 된 이후, 스스로 잘못된 선택을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생각했다.
데미갓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적합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전혀 아니었다.
몰기드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가장 비참한 건, 죽음이 목전까지 들이닥쳤는데 그 이유조차 모른다는 것이었다.
파각.
그러는 사이 노즈독의 사기死氣가 그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히투메 이카르의 왕은 새하얀 백골이 되었다.
노즈독은 그에게 시선을 뗐다. 일국의 왕을 죽였지만, 그에겐 의미가 없는 왕이었다. 개미든 여왕개미든 그에게 있어선 어차피 벌레였다.
‘대무녀는 없군.’
이곳에 오기 전, 대무녀의 거주지인 르샤에 먼저 들렀었다. 그러나 그곳엔 대무녀가 없었다.
노즈독은 그녀의 흔적을 쫓아 시공간이동을 사용했고, 이윽고 당도한 곳이 히투메 이카르의 왕성이었다.
몰기드를 비롯한 무사들을 죽인 이유는 없다. 정말로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들러붙는 날파리를 손으로 쳐낸 것에 불과하다.
[대무녀는 어디 있지?]
그녀는 히투메 이카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로드가 말한 드로라는 남자의 행방도 알고 있을 터.
우선은 그녀를 만나야 된다.
* * *
[생각보다 빨리 왔군.]
로드의 말에 프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자신이 무저갱에서 벗어나 지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떠나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데미갓은 로드 하나였다.
[결론은 내렸나?]
“그래.”
프레이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했다.
“네게 협력하겠다.”
[흐음. 알겠다.]
로드는 그리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혹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그 태도에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로드가 자신의 합류에 크게 기뻐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할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보인 태도는 너무나도 건조하다.
‘무슨 생각인 거지?’
프레이는 그의 의중을 짐작하려 눈가를 좁혔으나 헛수고다. 만약 그에게 이목구비가 있었더라도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쪽에 페이스를 뺏기지 않는 게 최우선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말해라.]
“루시퍼를 죽인 이후, 대륙으로 돌아간 이후엔 필멸자들을 지배하려 들지 마라.”
[그러지.]
“…그리고 이리스를 풀어 다오.”
[알겠다.]
“…….”
프레이의 위화감이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순순한 태도다.
거짓말을 하는 건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흠. ‘맹세’하지. 나는 대륙으로 돌아간 이후엔 필멸자를 지배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이리스 피스파인더 또한 놓아주겠다. 상처 하나 없이.]
프레이가 코웃음을 쳤다.
“구두에 의한 맹세를 믿으라고? 아무런 강제성도 가지지 못하는?”
[난 맹세를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리스는 그걸 알 테지. 리키가 죽었을 당시,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리스와 앞서 했던 맹세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녀는 내게 ‘부탁’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
[그럼에도 믿지 못하겠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프레이는 억지로 침음을 삼켰다. 로드의 말은 사실이다. 그 당시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었던 분노와 적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리키의 죽음으로 인해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
그런 상태에서도, 로드는 맹세를 지켰다.
그래서 그의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려 들면 안 돼.’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최대한 신경 쓰지 말자. 프레이 또한 이 동맹이 얼마나 허술한지 인지하고 있다. 물론 당장은 로드와 형식적으로나마 손을 잡을 생각인 건 맞다.
하지만 그와 힘을 합쳐 루시퍼를 죽일 생각은 없다.
‘승부가 완전히 갈리기 전에 끼어든다.’
로드와 루시퍼의 힘은 프레이보다 반 수 정도 높다고 보는 편이 맞다. 만약 그들과 1:1로 싸운다면 승률은 3할을 넘기지 못한다.
반면 로드와 루시퍼의 힘은 거의 동등하다. 직접 싸워 보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전투를 관망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투의 흐름을 조절한다.
자신의 힘은 보존한 채로, 그들의 체력이 동등하게 깎이도록 상황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프레이 홀로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조성되면, 바로 그들을 죽일 셈이다.
로드와 루시퍼는 너무 위험한 존재다. 살려 두면 필멸자들에겐 반드시 해가 된다. 프레이는 그리 확신하고 있다.
물론 대놓고 중립을 표방하지 않고 로드에게 붙은 이유는 하나다.
혹여 그들이 프레이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일시적인 동맹을 형성한 후 먼저 죽이려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설픈 생각이다. 조금만 머리를 굴릴 수 있다면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얕은 계략. 프레이는 자신의 작전을 그리 평했다.
결국 프레이가 입에 담은 조건도 위화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그러나 로드가 이 정도 어설픈 연기도 간파하지 못했을까? 최악의 최악까지 염두하고 움직이는, 데미갓의 지도자가?
…꺼림칙하다.
‘한 수.’
로드에겐 비장의 한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한 수’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보이는 낙관적인 태도는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패를 다 내보이지 않은 건 루시퍼도 마찬가지지.’
프레이 또한 패를 더 만들어야 된다.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기 위해선.
[더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그럼 이만 가 봐라.]
“같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루시퍼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그러자 로드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표정이 없어서 늦게 깨달았지만, 그건 실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옥에서 다른 볼일이 있었을 텐데? 애초에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잖나. 알아서 해라. 나는 간섭하지 않겠다.]
“…….”
[그리고 루시퍼는 바로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도 대륙에 볼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분명 프레이는 지옥에서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로드의 곁을 잠시 떠나, 그 일을 수행할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로드가 프레이의 의중을 읽은 듯 먼저 허락을 입에 담으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프레이는 로드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불쾌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문득 생각났다는 듯 로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데미갓들은 어디로 갔지?”
[…아. 그들 말인가?]
로드가 드물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