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지옥 (1)
“아, 아아…….”
몰기드가 두려움에 찬 얼굴로 프레이를 올려다보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왜 화를 내는 것이지? 그가 데미갓 면전에서 실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몰기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가 수많은 형제들을 제치고 국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 다른 이들보다 머리 회전이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평소처럼 두뇌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평소엔 그렇게도 잘 움직이던 혓바닥도 굳었다.
그러던 사이 프레이는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내가 죽으면 이 나라는 끝입니다!”
막무가내로 내뱉은 말이지만 프레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몰기드는 자신의 목덜미를 핥던 죽음의 기운이 살짝 물러난 것을 느꼈다.
“무슨 뜻이지?”
효과가 있다!
몰기드는 그 사실에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단순히 목숨을 연장한 게 전부일 수도 있다.
지체할 틈은 없다.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왕위를 승계받고 5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아직 야욕을 가진 형제들이 호시탐탐 기회만을…….”
“본론만 말해라.”
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제가 죽으면 왕의 자리를 저의 동생이 차지할 겁니다.”
“동생?”
“제, 젠타라는 놈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난타 님의 어포슬인…….”
몰기드는 아직도 자신을 데미갓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젠타는 추방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자가 왕권을 잡을 수 있는 건가?”
그 말에 몰기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미갓은 인간들의 일에 기본적으로 무관심하다. 젠타가 추방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젠타는 아난타의 어포슬이다. 그에 대해선 조금 더 상세히 알아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히투메 이카르엔 아직까지 젠타를 지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주로 어둠의 권력자들이죠! 구, 국내만이 아닙니다. 젠타는 외국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 어쩌면 저보다 훨씬요. 저도 젠타가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프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국왕으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버젓이 세력을 키우고 있는데,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고, 대책조차 없다니? 하물며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졌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시인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겐 왕의 자격이 없어 보였다.
이러한 무책임이 내란으로 발전하고, 커다란 겁화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프레이가 물끄러미 몰기드를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핏.
돌연 위쪽에서 투사체가 날아왔다. 프레이와 몰기드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언뜻 보면 그렇다. 정말로 살기가 담긴 건 몰기드 쪽이다. 프레이에게 날아오는 건 단순히 주의를 끌기 위함이다.
즉시 배리어를 시전한다. 보이지 않는 벽에 투사체가 가로막혔다. 프레이는 그걸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침.’
독액이 잔뜩 발라져 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은색 옷을 입은 자들이 동시에 떨어졌다. 신속하고 은밀한 동작, 군더더기는 없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손엔 번쩍이는 단검이 쥐어져 있다.
‘몰기드를 노리고 있다.’
파직.
프레이의 몸에서 창백한 뇌전이 튀었다. 바닥을 타고 흐른 전류가 그들의 발을 묶었다.
“끄르륵!”
“끅!”
암살자들이 몸을 경련하더니 게거품을 물었다. 그들은 짜릿한 고통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허, 허억…….”
몰기드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기까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프레이가 부들부들 경련하는 암살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놈들은?”
“아, 암살자들! 젠타의 수하들이오. 이럴 수가……. 설마 왕성에까지 잠입해 있을 줄은…….”
프레이는 몰기드에서 시선을 떼고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힘 조절을 했으니 아직 의식은 있을 것이다.
“젠타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
“…….”
주륵.
암살자들의 입에서 보라색 액체가 흘렀다. 프레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독이다. 입안에 숨겨 두고 있었던 건가? 턱을 움직일 여력은 있었나 보다.
프레이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설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결할 줄은 몰랐다. 목숨을 끊는 훈련 또한 받은 자들이었다.
그때였다.
프레이 옆에 있는 공간이 넘실대더니, 수직으로 죽 갈라졌다. 그곳을 통해 걸어온 건 대무녀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몰기드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나타난 대무녀가, 그가 데미갓이라 생각한 남자에게 태연스레 말을 건다. 마치 안면이 있는 것처럼.
‘대무녀가 어떻게……?’
그녀가 데미갓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건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몰기드와 대무녀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프레이는 몰기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국왕이란 작자가 데미갓과 내통하고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존심을 팔았고, 스스로 개가 되길 주저하지 않았지.”
“그래서 일국의 왕을 죽이겠다는 건가요?”
“이 남자를 죽이는 데에 신분이 무슨 상관이지?”
프레이의 말에 대무녀와 몰기드는 동시에 오싹함을 느꼈다.
특히 몰기드는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프레이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 자신은 죽었다.
왕이 된 이후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목숨의 위협이 항상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노골적인 죽음을 느낀 적은 처음이다.
“몰기드는 어진 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데미갓에게 이빨을 드러냈다면 이 섬은 전란에 휩싸였겠고, 많은 인명이 죽었겠죠. 당신은 그러길 바란 건가요?”
“사육당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신의 관점이에요.”
“…….”
프레이는 그 말에 잠시 말문을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아. 그건 내 관점이지.”
순간 아수라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전사라고 했다.
싸우는 자. 그 말이 옳았다. 프레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존심을 죽인 자들을 경멸한다. 아니, 경멸을 넘어서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결국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몰기드에겐 왕의 입장이 있다. 머리가 차가워지니 그의 생각도 이해가 갔다.
그에겐 다른 무엇보다 자국민의 생존과 나라의 존속이 최우선일 테니까.
“내가 성급했다. 네 말대로 경우가 없었군.”
“…….”
돌연 사죄를 받자 이번엔 대무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이는 암살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몰기드를 죽이려고 했다. 젠타의 수하인 것 같더군. 그는 어디 있지?”
대무녀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알면 어떡하려고요?”
“죽여야겠지.”
몰기드와는 달리, 젠타를 죽이는 걸 무를 생각은 없었다.
“젠타는 암왕입니다. 어둠의 왕, 전설적인 암살자라고 불리는 존재죠. 그는 암습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정면대결에 약한 건 아닙니다. 하물며 몇 년 전에는 어포슬이 되어 신력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엇으니, 지금의 젠타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군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젠타가 머물고 있는 장소는 그의 영역입니다. 손짓 한 번이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 암살자들이 적게 잡아도 수백은 있겠죠.”
“괜찮아.”
“…….”
자만의 기색은 없다. 프레이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대무녀는 힐끗 옆에 있는 무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이 남자의 힘은 규격을 넘어섰다. 그녀가 아는 가장 뛰어난 주술사도 저 정도 수의 일류 무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속박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추이를 지켜보다가.’
혹시 젠타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면 개입한다. 젠타도 히투메 이카르의 국민인 이상 대무녀인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할 테니까.
계산을 마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젠타는 섬의 최북단에 있는 ‘페루나야’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페루나야라고?”
몰기드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대무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시다시피 당신의 여동생인 카루카의 도시죠”
그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들은… 그래. 젠타가 세력을 넓힐 기반을 그녀가 닦아 준 거였군. 흐흐…….”
몰기드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처량하게 보였다. 대무녀도 씁쓸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프레이는 왕족 사이에 얽힌 복잡한 관계를 느꼈지만, 그것에 대해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젠타를 죽이고 뒤처리는 이반들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언급했다시피 그에게 지체할 시간은 없다.
“곧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그래.”
“암살자가 아닌 민간인들은…….”
“말려들게 하지 않아.”
“자, 잠깐만요?”
대무녀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무시하고 페루나야를 향했다.
섬의 최북단에 있다고 했으니 찾아가기는 편했다.
탓.
순식간에 페루나야로 도착했다. 프레이는 주변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신력.’
프레이는 신력을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건 아난타의 신력이다.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피부를 훑는다. 기분 나쁜 더운 바람을 맞은 것 같다. 바닷바람이 부는 곳인데도 청량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저벅.
그는 음습한 뒷골목으로 향했다. 항구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멀어지며, 바다 특유의 냄새도 희미해졌다.
이윽고 프레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어둠 속에 있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한 번 보았던 남자, 젠타였다. 그는 인피를 쓰고 있지 않았다. 데미갓의 회의에서 보았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칠 이유가 없지. 내 손으로 직접 끝을 낼 기회인데.”
“그런 것치고는 꼬리를 주렁주렁 달고 왔군.”
젠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을 에워싼 부하들의 존재를 들켰다.
“알고 있으면서도 온 거냐? 하. 정신이 나갔군.”
“왜냐하면.”
프레이가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은 내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거든.”
* * *
[천박한 땅이다.]
로드는 마계의 대지를 내려다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정복하거나 다스리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과연 지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대륙에 비하면 그렇지요.”
이리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를 부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말하시죠.”
[히투메 이카르에 노즈독을 보내라]
그 말에 이리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시점에서요? 노즈독이 빠지면 본대의 전력이 대폭 감소할 텐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아니면.]
돌연 로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다른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리스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속내를 숨기는 데 익숙했다.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대답한다.
“바쁘다뇨. 제가 할 게 뭐가 있어서 바쁘겠어요?”
[너는 나의 권능을 빌리고 있지. 나를 제외하면, 마계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후후.]
로드의 낮은 웃음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그녀는 침묵하며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이리스를 등진 채 마계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얼굴을 봐도 내심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에겐 이목구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로드가 고개를 돌린 순간, 이리스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흡.”
이리스가 숨을 들이켰다.
로드의 얼굴에 확연하게 형상이 드러나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있었다.
그러나 기괴했다. 세로로 찢어진 입이 이마부터 턱까지 이어져 있다. 눈은 4개였고, 벌렁거리는 콧구멍은 셀 수도 없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
로드가 세로로 찢어진 입으로 흉측한 미소를 만들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