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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187화 (187/857)

187화 히투메 이카르 (5)

바알제불이 루시퍼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유난히 창백한 피부에 왜소한 체구.

여전히 악마로 보이지 않는 외견에 숨을 죽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리 생각했다. 물론 겉만 보았을 때의 얘기다. 그의 전신에 휘몰아치는 악기는 그 어떤 악마보다 깊었다.

바알제불은 속내를 감춘 채 입을 열었다.

“타락지옥을 비워 두고 이리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로드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한데.”

“내 부하들이 잘 지키고 있을 거야. 믿을 만한 자들이거든.”

그의 말에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바알제불은 이 희미한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는 즉발적이고도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이 위화감을 입에 담는다면.’

루시퍼는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반응을 토대로 꼬리를 잡으면 된다. 그런데도 바알제불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애초에 루시퍼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입했다.

“미안한데 얘기를 좀 엿들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자신의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바알제불은 침음을 억지로 삼켰다. 겁을 먹은 건 아니다. 그러나 위축된 것은 맞다. 바알제불은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혈승지옥의 군주로서 이 이상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무례하군. 여긴 타락지옥이 아니다, 루시퍼.”

“그래서 사과했잖아.”

루시퍼는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그리 말했다.

이리 삐딱하게 나온다면 바알제불도 더 이상 참으면 안 된다. 그도 한 명의 군주로서 권위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경고를 입에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짚이는 바가 있다.”

“뭐?”

“배신자 말이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 데미갓의 움직임은 이상하다고. 놈들이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선수를 뺏겼다. 이러면 추궁하기 어려워진다.

바알제불이 머리를 굴릴 때, 루시퍼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부하 중 하나가 제법 오래전에 모습을 감췄지.”

“누구지?”

“칼투드.”

“…레드 데빌인가.”

바알제불 그 악마의 이명을 입에 담았다. 그의 특징적인 붉은 피부에서 유래된 이명이었다.

칼투드는 루시퍼의 최측근임과 동시에 최상급 악마 중 하나였다. 최상급 악마는 마계 전체를 통틀어도 백 명이 되지 않는다. 바알제불은 그들 대부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물론 칼투드에 대해서도 다른 군주보단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행방불명이 된 것이었나?”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해. 인간계에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데미갓의 밑에 들어갔을 줄은.”

“…….”

바알제불이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저 말투는? 단순히 심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칼투드가 배신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말꼬리를 잡으면?’

잠시 그런 고민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루시퍼가 끝까지 잡아떼면 더 압박할 건수가 없다.

‘장소도 좋지 않고.’

자신의 영토에서 소란을 피우기는 싫다. 그는 일대일로 루시퍼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수라를 제외한 모든 군주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바알제불은 자신의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몰아붙이는 건 좀 더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다른 군주들이 있을 때가 적당하겠군.’

지금 당장은 심증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회의에서 들었던 루시퍼의 선언.

데미갓을 몰아내면 타락지옥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군주직에서 내려온다고 말했다. 그전까지 루시퍼를 압박하던 아수라조차 입을 닫았을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고개를 숙인 게 먹혀들었던 거지.’

다름 아닌 그 루시퍼가 고개를 숙인 거니까. 모두 그 사실에만 주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존심이 강한 악마들이었다. 음흉하고 심계가 깊은 릴리스마저 떨떠름함을 느꼈지만, 결국 루시퍼가 가진 위치를 존중했다.

바알제불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루시퍼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오만한 존재인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 자존심을 죽일 정도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면?’

단순한 심증이다. 하지만 바알제불의 심증은 제법 적중률이 높았다. 그는 자신의 감을 굳게 믿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루시퍼의 모든 행동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전과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다르게 느껴졌고, 의심은 깊어져 갔다.

“사탄에 대해서 알고 있나?”

다시 뜬금없는 화두가 던져졌다. 바알제불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마왕魔王을 말하는 건가? 옛날 일에는 관심이 없어.”

“그런가. 그럼 그의 최후도 모르겠군.”

루시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돌았다. 바알제불은 순간적으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루시퍼는 마계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바알제불조차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은 사탄도 전설적인 존재다. 그는 과거 지옥 전체를 지배했었고, 마왕이라고 불렸던 유일무이한 존재다. 물론 바알제불도 사탄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전설에 대해선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필멸자에 비하면 무한에 가까운 삶을 허락받은 것이 악마지만 불멸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탄은 바알제불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존재다.

하지만… 루시퍼라면 직접 그를 보았을 수도 있다.

‘갑자기 마왕에 대한 얘기를 왜 꺼낸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 난 칼투드의 흔적을 찾아봐야겠군. 진전이 있으면 연락하지.”

“잠깐.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

몸을 돌리던 루시퍼가 빙긋 웃었다.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라네, 바알제불.”

“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퍼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바알제불은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사탄의 최후.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악마들에 비해 해박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지옥을 지배했던 마왕은 어느 날 돌연 행방불명되었다.

* * *

[루시퍼가 마계의 균형자를 집어삼켰다.]

“집어삼켜?”

[흡수를 한 거지.]

흡수. 이것도 만만치 않게 불길한 울림이었다.

“그럼 마계의 균형자가 루시퍼로 바뀌게 된 건가?”

[그렇기 일이 쉽게 풀렸다면 마계는 지금 루시퍼의 세계가 되었겠지. 크크……. 아무튼 속이 시커먼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그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몸을 굳혔다.

[쳇. 아무래도 너무 나불거렸나 보다. 진짜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번쩍.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확 하고 광채가 치솟았다. 프레이는 두 눈을 뜨고 그를 직시하기 힘들어졌다. 마치 빛에 빨려 들어가거나, 혹은 합쳐지는 것 같았다.

그가 프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재밌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너를 응원하고 있거든? 그렇다고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충고해 주는 걸로 감사하라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대우 받은 거니까.]

“잠깐. 후보가 뭔지 말해 주지 않았잖아.”

[떠먹여 줬더니 씹는 것까지 도와달라고? 내가 아무리 착해도 그럴 수는 없지. 조각은 다 줬으니까 나머진 네가 조립해 봐.]

점점 광채가 강해진다. 안구가 타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

아무것도 없었던 그의 얼굴에 윤곽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가를 좁히려는 순간.

[또 보자.]

“…….”

프레이는 자신이 신당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단절되었던 감각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석상을 마주보고 있었다.

대지에 발을 디딘 감촉이 낯설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 신과 대면한 일이나 나눴던 얘기가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이 아님을 알고 있다.

또 보자. 설마 그 존재가 재회를 입에 담을 줄은 몰랐다.

프레이는 묘한 어운을 털어 내며 신당을 나섰다.

멀뚱히 서 있던 대무녀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그런데 왜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건가요?”

들어가자마자? 프레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짧아도 수십 분은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더 길게.

‘시간까지?’

프레이는 그 존재가 신이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무녀를 보았다.

그녀에게 신의 진면목을 알려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둘 중 하나겠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거나, 흔들림 없이 수긍하거나. 어찌 되었든 가르쳐 줘서 득 될 건 없다.

프레이는 침묵을 택했다.

그러자 대무녀가 눈을 빛냈다.

“다운즈께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나 보군요. 역시 당신에게 자격이 없다 판단하신 모양이에요.”

솔직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프레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히투메 이카르로 입국하지 못하는 건가?”

“…일단 얘기부터 듣고요.”

대무녀는 그리 중얼거리고 다시 주술을 사용하려고 했다.

“잠깐만.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될까?”

“이곳은 오직 대무녀만이 출입이 허락된 신성한…….”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프레이를 힐끗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도록 하지요. 그러면 당신이 히투메 이크라에 무슨 볼일이 있는지 들어 볼까요.”

“그 나라에 어포슬이 있다.”

“흐음.”

대무녀가 눈을 빛냈다.

어포슬에 대해서 알고 있다. 즉, 대무녀 또한 데미갓이 야욕을 드러내기 전부터 그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긴. 수백 년을 살아왔을 텐데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

“이름은 젠타. 암왕으로 유명한 남자라던데.”

그러자 대무녀의 인상이 다시 바뀌었다. 그녀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린 것이다.

“그렇군요.”

“내 말을 믿나?”

“젠타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를 알고 있나 보군.”

“추방된 왕족입니다.”

프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왠지 비슷한 경우가 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엘프의 숲에서, 오이딘의 정체를 찾을 때였나? 그때도 그 남자가 스노우의 오빠란 것을 알게 되고 혀를 찼었지.

그나마 이쪽은 추방당했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인가.

“추방당했다지만, 왕족이 데미갓의 밑에 들어가다니…….”

“젠타는 야심이 큰 아이였죠.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피붙이라도 망설임 없이 자를 수 있는 비정함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놀랄 일은 아니죠. 그리고 데미갓과 암약하고 있는 게 젠타만은 아니니까요.”

너무 담담한 말투에 오히려 프레이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나라의 중책인 대무녀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역시 이 나라는…….”

“나라 전체가 그런 건 아니고요. 보통 이런 일은 높으신 분들이 문제죠.”

히투메 이카르의 높으신 분들이라면…….

“왕?”

“네. 현 국왕인 몰기드. 그 남자는… 후우.”

잠시 골을 짚던 대무녀가 프레이를 보았다.

“아무튼 젠타에 관한 문제라면 저도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그자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나?”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요.”

대무녀는 그리 말하더니 잠시 고민했다.

“…루타하는 외부인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지만, 꼭 항로를 통해 입국할 필요는 없죠. 제가 다른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무녀의 협력을 얻은 이상 꼭 그녀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다. 아마 이 나라에서 자신의 마법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건 눈앞의 여자밖에 없을 테니까.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묵인해 준다면, 프레이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행방이 묘연했던 젠타의 소재마저 가르쳐 준단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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