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히투메 이카르 (4)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프레이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눈앞의 존재도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천사장.’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지옥을 지배하는 군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포칼립스들도 그와 동등한 위치였을 수도 있겠지.’
지옥의 군주는 총 여섯이다.
‘로드를 포함한 아포칼립스도 여섯.’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게 단지 우연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로드의 모습 또한 그랬다.
그의 외관은 데미갓 중에서도 특히 기괴했다. 어떤 의미로는 해골의 모습을 가진 노즈독이나 화염의 육체를 가진 데미갓보다 더욱.
‘무의식적으로 신의 모습을 흉내 냈다는 건가?’
데미갓의 기원에 대해선 리키에게 들었으나 이 존재가 설명하는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들이었다.
천국의 주민들로 내정된 존재. 그게 데미갓의 정체였다니.
‘이건 데미갓들도 몰랐던 사실이다.’
낯선 감각이었다. 항상 베일에 싸여 있던 것이 데미갓이란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이 존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들의 진짜 정체를 몰랐다는 말이 된다.
그 로드조차도.
그 비밀을, 자신이 알게 된 것이다.
프레이는 그 사실에 일종의 작은 희열까지 느꼈다.
[생각보다 좋아하는군. 그런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뻐.]
“…네 볼일이 이거였나? 나한테 데미갓의 기원에 대해 가르쳐 주는 거?”
[그럴 리가. 이건 단순히 배경 지식일 뿐이야. 본론은 지금부터지.]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프레이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중요한 게 이제부터라니?
여태껏 들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깜박하지 않을 프레이조차 이 정도였다.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거나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렸으리라.
[균형을 지킬 존재가 필요했다. 세상을 항상 굽어살피며 조화를 추구할 존재. 세계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존재가. 그건 까다롭더군. 그 정도 인재는 잘 태어나지 않거든. 흐름이나 운명에 개입해 시기를 앞당기면 뒤끝이 나빠서 불가능했고. 하물며 셋이나 필요했으니까.]
프레이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셋이나 필요하지?”
[말했잖아. 이 우주엔 3개의 세계가 있다고. 만약 천계가 만들어졌다면 미카엘이 균형자가 되었을 거다. 녀석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거고, 천계는 정말로 천국 같은 곳이 되었겠지.]
“다른 세계에도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는 거군.”
[그래. 평계의 균형자는 너도 잘 알고 있을걸.]
그가 말한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건 대륙에서도 한 종족밖에 없다.
“드래곤.”
[그놈들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녀석이 제격이었지.]
드래곤 로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프레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존재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그는 스스로가 바쁜 존재라고 말했고,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게 이례적인 일이라 강조했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렇게 얘기를 나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로드가 처음 대륙에 떨어졌을 때, 드래곤은 단순히 덩치가 큰 몬스터였다. 놈들에겐 지능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로드도 별반 다를 건 없었어. 독립적인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프레이는 이게 몇만 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얘기란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진실. 그것을 신이라 자처하는 존재에게서 듣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로드의 자아는 확립되었고, 데미갓은 그의 뒤를 이어 대륙에 떨어졌다. 로드가 데미갓들을 모두를 거둔 것과 드래곤이 진화를 마쳐 대륙의 조율자를 자처한 건 비슷한 시기였지.]
그가 익살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에서 충돌은 불가피했지. 그들도 깨달았을 거야. 서로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
그럴 것이다.
그 시절엔 오직 드래곤만이 데미갓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솔라에게 들었다. 데미갓은 드래곤과 싸울 때만큼은 결코 방심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가 정해 놓은 ‘법칙’은 드래곤 로드를 균형자로 선택했더군. 단순 적성으로 따지면 로드가 한 수 위였지만, 따지고 보면 녀석은 평계에 있어 불순분자였으니까. 아무튼 로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드래곤들과 싸웠고, 결국 승리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늘 흐릿하게 느껴졌던 로드의 목적.
대륙을 완전히 멸망시킬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음에도 손을 쓰지 않았던 이유.
“로드의 목적은…….”
[평계의 균형자 자리를 꿰차는 거지.]
프레이는 다시 한 번 입을 닫고 말았다.
“…드래곤 로드는 대륙과 이어져 있는 존재라고 들었다. 네가 말한 균형자란 존재가 되면, 그 세계와 존망을 함께할 정도로 깊게 연결되는 건가?”
[맞아.]
천계는 이미 멸망했다고 했다. 그래도 로드는 죽지 않았다. 그의 혼은 이미 의지의 소용돌이에 흡수되었고, 다시 분리되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 과정에서 천사장 미카엘은 사라지고 데미갓 로드가 재탄생한 것이리라.
평계와 이어져 있는 드래곤 로드도 그렇다. 그는 로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죽지 않았다. 비록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확실히 살아 있다.
‘그렇다면 마계는?’
마계에 균형자라고 할 만한 존재가 있었던가?
‘여섯 군주?’
그들 중에 하나인가? 순간적으로 그런 의문이 든 순간이었다.
[…….]
그 존재는 프레이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던 얘기를 모두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 아마 우주를 통틀어서 딱 한 명이겠지.]
“그게 누군데?”
[나는 이미 그를 언급했었다. 그는 천계의 치명적인 결함이었고, 나한테 반기를 들었던 유일한 존재였지.]
그가 픽 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만했던 자]
* * *
“제블과 녹티스가 당했습니다.”
바알제불은 침묵했다.
제블과 녹티스는 바알제불을 수백 년 동안 받들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데미갓 측의 피해는?”
“…….”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하던 악마, 할리퍼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입술만을 짓씹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바알제불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급 악마 둘이 희생되었는데 성과가 없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바알제불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할리퍼는 바알제불이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때라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그런 바알제불을 보며 교활하다고 떠들지만, 할리퍼는 알고 있다.
바알제불이야말로 여섯 군주 중 가장 현명한 존재라는 것을.
‘이분이야말로 지옥의 유일한 군주가 되실 분이다.’
파리왕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배신자가 있군.”
“예?”
“데미갓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놈들은 마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그런데도 주변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확실히.
할리퍼는 바알제불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그들의 진격 진로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침입자에겐 가장 껄끄러울 수도 있는 첩살지옥을 지나쳤다.’
아수라의 첩살지옥은 데미갓이 쉽게 뚫어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아수라의 성향에 매료된 전투광들이 득실거린다.
그에게 충성하는 부하들 중 피와 살육을 싫어하는 악마는 하나도 없다. 그런 만큼 전투력도 뛰어나다. 만약 충돌했다면 데미갓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이 공략한 건 흑몽지옥이지.’
그곳은 릴리스의 영토이며, 모든 몽마들의 고향이다. 당연히 전투력은 다른 악마들에 비해 형편없다. 그럼에도 그 땅이 쉽게 침범받지 않은 이유는 몽마들이 다루는 현혹의 기술이 귀찮기 때문이다.
그 비장의 카드가 데미갓에겐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견고하니까. 몽마들의 여왕인 릴리스가 직접 손을 써도 먹힐지 의아한데, 그 부하들이 쓰는 현혹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이미 흑몽지옥의 절반이 공략당했다.’
함락당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이윽고 그들의 진격이 닿을 곳이 바로 바알제불의 땅이다.
놈들의 목표는 바르바토스의 절망지옥이다. 그곳에 당도하려면 필연적으로 바알제불의 혈승지옥血蠅地獄을 지나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흑몽지옥에 상급 악마 둘을 원군으로 보냈다. 다른 지옥에서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작은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전멸했다.
“로드의 행적은 여전히 파악되지 않나?”
“예.”
바알제불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로드의 권능. 확실히 귀찮군.’
공간을 다루는 힘. 범용성이 너무 넓다. 다른 데미갓들을 끌고선 이동할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따로 움직이는 거겠지.’
로드만 아니었다면 바알제불을 비롯한 군주들이 이렇게 따로 배치되어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놈들의 능력을 파악한 시점에서 바로 전면전에 돌입했겠지. 로드의 행적을 모르는 이상 이쪽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데미갓의 본대와 싸울 동안 로드가 자신들의 지옥을 빈집 털 듯이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데미갓과의 전쟁에서 승리해도 상처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정도라는 거지.’
악마가 맺은 동맹이란 것은. 물에 젖은 종이보다 얇고, 찢어지기 쉽다.
흑몽지옥을 공격받고 있는 릴리스가 다음 회의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눈에 선하다.
바알제불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흑몽지역을 공략하는 속도가 우리 예상보다 몇 배는 빠르다. 각 지옥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악마의 특성에도 해박하지 않으면 납득이 안 가는 속도지. 그리고 그런 정보를 데미갓이 알고 있을 리도 없고.”
“아. 그렇군요.”
“그리고 그 정도 정보는 질 낮은 놈들은 알지 못해.”
바알제불이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핏빛 눈동자가 기괴하게 꿈틀거린다.
“배신자는 최상급 악마다. 최소로 잡아도 상급은 되겠지. 할리퍼, 최근 수십 년 동안 갑자기 모습을 감춘 악마들을 조사해라. 상급 이상으로. 우리 구역만이 아니라 다른 지옥의 악마들까지 캐내야 될 거다. 군주들에겐 내가 미리 언질 해 두지.”
“명에 따르겠습니다.”
할리퍼는 파리왕의 혜안에 감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악마치고는 드물게도 군주에 대한 충의가 하늘을 찌르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떨어지는 전투력을 가졌음에도 파리왕의 한쪽 팔이 될 수 있었다.
그는 한층 더 끌어올린 충성심을 가다듬으며 방에서 나섰다.
바알제불 또한 왕좌에서 일어났다. 시급히 만나야 될 자가 있다.
그가 창문을 열고, 지옥의 탁한 하늘로 비상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
바알제불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락하지 않은 손님이 그곳에 있었다.
“타락지옥.”
“흠.”
타락지옥의 군주인 루시퍼는 고개를 까닥였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신가, 파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