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히투메 이카르 (3)
신과 대면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4,000년 전부터 그랬다. 그러나 프레이는 차오르는 의문을 접어 두었다.
우선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정말 신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네가 다운즈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프레이는 로드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스스로 로드임을 부정했다. 프레이도 그리 생각한다.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이자는 로드가 아니다.
[너를 만나고 싶었다.]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말투군.”
[오. 물론이지. 어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제3의 후보! 네 존재를 처음 느낀 순간 내가 얼마나 전율했는지 모를 거다.]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프레이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3의 후보?”
[이례적인 일엔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법이지.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거고. 축하한다. 너는 신을 대면한 최초의 인간이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프레이의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떠들고 있다.
프레이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나는 마법사다.”
[그래서?]
“너의 존재를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무신론자였지.]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스스로 신인 걸 증명이라도 할까? 하하. 불경한 놈이군.]
“…….”
[하지만 일리가 있어.]
프레이는 순간 말문을 잊고 말았다.
‘도저히 신으로 느껴지지 않아.’
얘기를 나눌수록 그런 생각이 커져 갔다. 그의 태도는 가벼웠고, 입은 방정맞았다.
그 순간 다운즈가 갑자기 픽 하고 웃었다.
[너희들은 항상 우리에게 초탈한 태도를 기대하더군.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나는 물론 세속을 초월한 절대자의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어째서일까?]
프레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허락 없이 남의 생각을 읽는 것도 네가 보여 주고 싶은 모습 중 하나였나?”
[직접 겪는 게 이해하기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때. 조금은 나를 신으로 보게 되었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한눈에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통찰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속내를 완벽히 읽어 낼 수는 없을 거다. 심상세계를 거친 프레이의 정신적 저항력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니 당연하다.
그를 신이라 확정할 수는 없지만, 필멸자로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너는 ‘우리’라고 말했지. 신이란 존재는 여럿 있나 보군.”
[글세.]
“스스로를 정의할 수도 없는 주제에 신을 자처하는 거냐? 점점 네 정체에 의구심이 생기는군.”
프레이의 냉소적인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어떤 달변가도 신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좋아. 너의 작은 의문을 풀어 주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은 바로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모호한 말이었지만, 프레이는 그의 말에 담긴 진의를 단숨에 이해하고 말았다.
‘설마 이자는…….’
그가 킬킬 웃었다.
[크크. 너는 진정 필멸자를 초월했군. 사소한 단서 하나로 내 정체를 거의 짐작하다니 말이야.]
“…그렇군.”
프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바로 ‘법칙’이었나.”
세계의 법칙. 혹은 의지. 데미갓이 떨어져 나온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
그게 바로 신의 정체였으며, 눈앞에 있는 존재였다.
‘네가 다운즈인가?’
그는 프레이의 물음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도 아니었다.
이 존재가 바로 모든 신적인 존재의 근원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그들이 믿는 신은 이 존재에게서 파생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결된 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큰 의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법칙엔 의지가 없다고 말했는데.”
다름 아닌 리키의 말이었기 때문에 프레이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너희들이 데미갓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말한 거겠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야.]
“뭐?”
[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더니 고민에 빠진 것처럼 턱까지 괴었다. 프레이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사소한 태도조차 너무나도 인간적이게 보였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필시 그는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존재는 그런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너희들이 알기 쉬운 개념으로 말하자면… 그래. 평소의 나는 부재중이다.]
방금 전, 작은 힌트로 그의 정체에 대한 윤곽을 잡은 프레이였으나 이번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프레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부재중?”
[나는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하릴없이 세상을 관조할 여유는 없어. 그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몇 가지 법칙을 세워 놓을 뿐이지. 그 이후엔 방치하는 게 내 스타일이야.]
“무책임하군.”
[흠. 사실이라서 되돌려 줄 말이 없네.]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프레이는 우묵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대무녀에게 예언을 내리는 건? 그것도 네가 세워 놓은 법칙 중 하나인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 해결책을 알려 주는 것보단 효율적이지. 가장 좋은 건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니까. 가끔 그런 자들이 태어난다. 나의 존재를 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자들이. 그들은 대륙에 닥칠 위험을 미리 깨닫는 것이 가능하지.]
신이 대무녀에게 직접 대륙의 위험을 알려 주는 게 아니다.
항시 대륙 전체를 감시하던 ‘법칙’이 일정 기준을 넘어서는 위협을 감지하면 그녀와 같은 존재에게 경고를 날린다. 그게 바로 신의 계시의 정체였다.
대무녀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프레이는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지금 대륙의 상황은 너도 파악하고 있겠지.”
[그래.]
“…데미갓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루니늄이라는 금속을 이용해 법칙의 처벌을 피하고, 필멸자들을 모두 복속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더군.]
다 알고 있다는 건가.
프레이가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도 너는 구경만 하는 거냐?”
[네 입으로 방금 말했잖아. 법칙의 처벌을 피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없어.]
그 말에 프레이는 처음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어떤 종교인이 그러더군.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을 준다고.”
그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그럴듯한 말인데.]
“네가 움직이지 않는 게 그딴 이유 때문이냐? 대륙을 휩쓸고 있는 피바람이 필요한 시련이라고 생각해서? 그도 아니면, 이 정도 위협은 재앙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의 의견이야. 나에게 너의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난 내가 만든 세상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
프레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진지해졌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보인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운즈’는 이 나라, 히투메 이카르에서 창조신으로 추앙받고 있지. 그래. 난 창조신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건 내가 만들었다. 알겠나? 모든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야. 데미갓 또한 내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데미갓이든 인간이든 너의 입장에선 피조물이란 건가. 그래서 한쪽 편을 들지 못하는 거고?”
[세상이 창조되고 많은 종족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재밌는 건 그중 적응하지 못하거나 진화에 실패해 도태된 종은 별로 없다는 거다. 대부분이 다른 종족의 손에 멸종당했지.]
“이번엔 인간이 그리 될 차례다?”
[그건 아니야. 후후. 이것 참. 어떻게 이해시켜야 될지 난감하군.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든, 얼마나 많은 종족이 멸망하든 상관없어. 내가 신경 써야 될 건 이 세상 그 자체뿐이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레이는 불현듯 이 존재가 정말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프레이는 몇 마디 대화만으로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대무녀조차 프레이에게 순식간에 간파되었다.
그런데 이 존재는 쭉 대화를 이어 가고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화를 할수록 의문은 깊어만 갔다.
생각의 근본부터 다르다.
“…그런 바쁜 존재가 굳이 나한테 얼굴을 드러낸 이유는 뭐냐? 네가 말한 후보라는 것과 관계되어 있는 건가?”
[역시 얘기하기 편하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 다시 장난기가 돌아왔다.
[들어 봐라. 이 우주엔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이들은 ‘이웃 세계’라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조건만 맞으면 서로에게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지.]
“…이웃 세계라면, 마계?”
[그래. 정확해. 흠. 그런데 넌 ‘천계’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나?]
화제 전환이 갑작스러웠으나, 프레이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군. 천국이라면 알고 있지만.”
프레이도 사후세계에 대해선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선한 인격을 가진 영혼만이 사후에 갈 수 있는 낙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고, 조금도 지루하지 않으며, 온갖 종류의 열매와 음식, 술이 있는, 해가 지지 않는 세계.
그게 프레이가 알고 있는 천국의 정의였다.
[천계와 천국은 달라. 그럼 질문을 바꿔서, 천사는 알고 있나?]
“천국의 주민들이 아닌가.”
[그것도 아닌데. 뭐. 하나하나 설명하면 끝이 없으니 그냥 들어라. 나는 과거 이 우주에 세 개의 세계를 만들었다. 평계, 마계. 그리고 천계.]
“…….”
평계는 프레이가 속한 이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마계는 악마들의 땅,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
하지만 천계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다.
‘게다가.’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거지? 프레이는 의문이 들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존재는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는 건 프레이가 의아함을 느낀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
‘끝까지 들으면 의문이 풀린다는 거겠지.’
프레이의 예상은 정확했다.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군주들 같은 존재가 천계에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있을 예정이었지. 천계. 내가 가장 공들여 만들었던 세계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리 되었을 텐데.]
그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결함’ 때문에 천계는 결국 멸망하게 되었고, 그곳에 속하게 될 강대한 영혼들은 의지의 소용돌이로 흡수되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바쁜 몸이라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지.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의지의 소용돌이가 천계의 영혼들을 뱉어 낸 거지. 떨어져 나간 영혼들은 천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계에 떨어졌다.]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척추를 번개가 관통하는 것 같았다.
일전에 들었던 얘기와 지금 듣고 있는 목소리가 합쳐지더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설마.”
[그들은 추방자다.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신의 세계에서 쫓겨났으니까.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대륙에 떨어졌으니 스스로를 ‘세계의 의지’에서 분리된 존재라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고.]
프레이가 부릅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더 이상 소름은 끼치지 않았지만, 숨이 턱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미갓이란 원래 천계를 다스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너희가 로드라고 부르는 존재는 그중에서도 특별했지. 시공을 넘어 나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이 세계의 누구보다 총애했을 것이고 증거로 특별한 이름을 내렸을 것이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신과 가장 가까운 자. 천사장 미카엘이라는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