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격동 (4)
요란한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무언가 터지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존재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콰직!
발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프레이는 소란의 주범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반이 땅바닥에 맨주먹을 꽂고 있었다. 마나를 조금도 두르지 않고 있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지, 아니면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주먹은 핏빛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해와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반은 으득 이를 갈았다.
부끄럽다. 그 이상으로 자신이 역겹게 느껴져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오른팔을 잃은 노라가 떠올랐다. 뒤이어 베니앙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여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구했다. 목숨을 빚졌다.
“제길! 제기랄!”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은 탈진해서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자 뜬금없이 눈물이 나왔다.
꼴이 우스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반이 맹세컨대, 짧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한심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
…….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이반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추한 하루다.’
다시 말해, 이런 한심한 모습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아마도 한참 전부터 그곳에 있던 것이 분명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이반은 딱히 놀라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들켰군.”
“썩 보기 좋지는 않았지.”
“떠벌리고 다니지는 마라.”
“그래.”
“…뭐 때문에 왔냐?”
“거인의 허리띠는 찾았나?”
“어.”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로가 발견한 호왕의 장갑을 건네주었다.
“…그건?”
“카사진이 남긴 삼신기. 그 마지막 조각이다.”
“그렇군. 호왕의 장갑인가.”
딱히 기뻐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카사진을 넘어서려면 그게 필요할 거다.”
“그렇군.”
그는 장갑에 힐끗 시선을 주고 다시 벌러덩 누웠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스노우보다는 상황이 낫다. 이반에겐 충고나 조언이 필요 없었다. 그는 이 정도 벽과 절망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가시밭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육체보다 더 단단한 건 정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약하다.”
이반은 홀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다음에는, 내가 구한다.”
어떤 적을 마주하든, 보호받는 입장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반은 그리 맹세했다.
* * *
프레이는 닉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택의 빈방 중 하나에 있는 듯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는 적발의 여자가 보였다. 프레이는 잠시 멈칫했다. 표정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닉스가 아니라 토르쿤타라는 사실을.
“왜 닉스가 아니지?”
“네놈이랑 얘기하기 싫다는데.”
“왜?”
“흥. 뻔하지. 아마 혼나는 게 무서워서… 큭! 떽떽거리지 좀 마! 그럼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냐?”
토르쿤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프레이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닉스, 나는 너를 나무랄 생각이 없다.”
“…….”
잠시 침묵하던 토르쿤타가 갑자기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쉰다.
“이런 꼴이 될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나았겠군. 파도 소리에 등 터지는 새우도 아니고. 젠장.”
그러다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기색이 바뀌었다.
잠시 후 말려 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닉스였다. 프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게, 최선일 줄 알았어요.”
위화감이 들었다. 닉스의 겉모습은 완연한 성인 여성의 그것이었지만, 표정이나 말투는 몇 살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당연한 일인가. 그녀가 인간의 모습을 갖고 채 몇 년도 되지 않았으니.
“좀 앉아도 되겠느냐?”
“네.”
프레이는 닉스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너를 나무라거나 탓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냥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얘기……?”
“되돌아보면 항상 너와의 재회는 의도치 않게 이루어졌지. 우리는 터놓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갖지 못했더구나.”
닉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의 부드러운 어조에 그녀의 경직되었던 몸이 많이 풀렸다.
“토르쿤타를 죽인 이후부터 듣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아…….”
닉스가 갑자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것이냐?”
“토르쿤타가 소리를 질러서요. 자기는 죽지 않았대요.”
그 말에 프레이도 픽 웃고 말았다.
* * *
닉스와 얘기를 마치니 새벽이었다. 프레이는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닉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다.
‘고된 나날을 보냈구나.’
헤어진 이후 하루도 편히 잠들었던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힘든 과거를 보냈다.
스스로 죽어 아그니를 동면에 빠뜨리겠다. 처음에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놓여 있던 상황이나 지식의 수준, 경험을 미루어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칭찬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프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그니의 결정의 나머지 절반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촛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길고, 지치는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도 프레이는 큰 피로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허기가 사라졌고, 목도 마르지 않는군.’
더없는 충만감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무한하게 최적의 컨디션이 유지되는 것 같다. 마치 자신의 심상세계처럼.
프레이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인간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원인은 짐작이 간다. 신마력. 이 가공할 만한 에너지가 프레이의 신체에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아마도 정신력을 극한까지 소모한 상태가 아니라면 음식이나 수분, 혹은 수면을 통한 기력 보충이 필요 없을 것이다.
프레이는 고개를 털었다. 인간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인간이다. 그 사실만큼은 결코 잊거나, 흐릿해지면 안 된다. 이건 본질적인 문제였고, 프레이의 정체성에 있어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깊게 생각하지는 않겠다.
그것보다는 당면한 일을 생각하자.
현재 단서를 잡은 어포슬은 두 명이다.
암왕 젠타. 그리고 최상급 악마인 칼투드.
후자의 경우엔 샤를이 추적하고 있다. 무언가 단서를 잡았다면 자신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젠타는? 그를 쫓고 있는 건 루시드 소드다. 서클 마스터인 제키드 디어시스. 그는 젠타의 출신지가 ‘히투메 이카르’라는 섬나라라고 말했다. 또한 그곳에 루시드 소드의 지부가 있으니, 그의 소재를 추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성과가 있기를 바라야 되나.’
우선은 제키드를 만나야 된다.
슉.
프레이가 이동한 곳은 준 가문의 저택이었다.
마지막으로 서클의 회의가 열렸던 장소다. 새벽이기 때문에 저택에 인기척은 희미했다.
프레이는 대저택의 3층에 있는 셰퍼드의 방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달칵.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셰퍼드 공작은 업무용 탁상에 앉은 채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걸 깨닫고 손을 멈칫한다. 그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라운더 프레이.”
프레이는 셰퍼드가 자신을 서클의 간부로 대우해 준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지금 카스트카우의 황실은 로드에게 굴복한 상황이다. 아마 내부적으로도 서클의 잔당을 처리하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셰퍼드 같은 경우는 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황실에 충성을 바친 공작임과 동시에, 서클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 간부니까.
그러나 셰퍼드는 프레이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다. 그의 속내는 모르지만, 당장은 황실의 명령에 복종을 택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무슨 일이오?”
정중한 말투였다. 프레이는 그와의 첫 대면이 떠올라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말을 이었다.
“제키드를 만나고 싶다.”
“마스터 제키드를? 흠.”
그는 프레이의 하대에도 개의치 않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잠시 후 펜을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떤 두루마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스터 제키드는 얼마 전 히투메 이카르에 입국했소. 이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루시드 소드에도 7성의 마법사가 한 명 있소. 밀리오라는 이름의 남자인데, 원래는 그와 정기적으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지.”
“…….”
연락이 끊긴 것치고는 침착한 태도였다.
프레이의 의문을 깨달았는지 셰퍼드가 말을 이었다.
“상정했던 상황이오. 히투메 이카르는 무척이나 폐쇄적인 나라니까. 제키드조차 편법을 쓰지 않았다면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없었을 것이오.”
“그 나라도 데미갓의 손길이 뻗쳤나?”
“아니오. 흠… 기이한 일이지만, 그 섬나라는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소. 데미갓의 마수가 전혀 닿지 않았다는 거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몇 없는 사례요.”
수상한 냄새가 났다.
이것 또한 젠타와 무언가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런데 갑자기 마스터 제키드는 왜 만나고 싶은 것이오?”
아마 첫 질문을 받았을 때부터 의아했던 점일 것이다.
프레이는 실키드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얘기를 모두 들은 셰퍼드가 입을 떡 벌렸다.
“아, 아그니를… 토벌하다니. 허허. 그것 참… 믿을 수 없는 업적이군.”
셰퍼드가 격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면 프레이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었다. 토벌에 따른 희생보다, 아그니를 토벌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는 모습 때문이다. 그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서클의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그래서 마스터 제키드의 일에 힘을 보탤 여유가 생겼다는 거군.”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마계에 대한 일까지 설명하면 얘기가 너무 길어진다. 프레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화제를 돌렸다.
“소식이 안 닿는 것에 대해선 짚이는 게 있나?”
“아마도 주술呪術 때문일 수도 있소.”
“…주술.”
프레이가 난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술.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일부 국가들이 사용하는 이능의 힘이며, 마법과 그 본질은 다르지만, 맥락은 흡사한 점이 있다……. 프레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당장 도서관에 있는 책을 펼치면 얻을 수 있는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상은 모른다. 주술은 4,000년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대륙 동쪽의 인종人種들은 과거부터 특히나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 수천 년이 흘렀다.
그들의 성향에 딱 맞는 고유의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껄끄럽군.’
미지의 힘이란 건 원래 그렇다.
“두루마리엔 히투메 이카르로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개 적혀 있소.”
“좌표값만 알 수 있다면, 워프를 사용할 수 있다.”
“라운더 프레이의 실력이라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관두시오. 만에 하나 덜미를 잡힌다면 일이 몇 배는 귀찮아질 것이오.”
“…….”
프레이는 셰퍼드의 조용한 경고에 납득했다.
침입을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다. 프레이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제키드를 비롯하여, 지금 수련에 힘쓰는 이반이나 스노우, 혹은 닉스까지 대동할 생각이다. 그 정도 인원의 외부인이 누군가의 뒤를 캐고 다닌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이후에 불법 입국자라는 게 밝혀진다면…….’
일은 훨씬 귀찮아지겠지.
물론 극단적인 방법도 있다.
그냥 히투메 이카르로 쳐들어가, 그 나라의 중진들을 협박해 젠타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뽑아내는 것이다. 만약 대답하지 않는다면 정신을 주물러서 강제로 불게 만든다.
극단적인 방식이지만 가장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프레이가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데미갓과 다를 게 없다.’
비윤리적이고 야만적이다. 카스트카우의 황실에 쳐들어가 그들의 복종을 강제로 얻어 낸 로드와 똑같아지는 것이다.
프레이는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항복과 복종을 요구하는 건 더욱 아니다.
필요한 건 그들의 협력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다.
히투메 이카르는 이례적으로 데미갓의 마수가 전혀 뻗치지 않은 장소다.
만약 그 이유가 이미 데미갓과 모종의 거래가 오갔기 때문이라면.
그것이 협박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나라를 지탱하는 중진들이 이미 썩어 문드러진 것이라면.
“…….”
프레이가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할 의무는 사라진다.